옛날 극장에서, 정지된 장면들이 이어진 필름이 빨리 돌아가면 마치 영상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필름의 영상이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을 주려면 변함없는 빛이 그 필름(경험)을 비추어야 한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엉덩이의 감각이 있다고 치자. 이 감각이 필름이자 그림자이다. 이 감각은 나타났다 사라지니까. 이 감각을 뭐가 비추고 있느냐? 이 비추는 것을 이거(공)라고 한다. 이것이 비추고 있는 것이다. 필름을 비추는 빛은 상대적으로 대상으로 이미지화 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또 다른 필름이다. 이 마음을 느끼려고 하거나 경험하고자 하면 빛을 그림자로(이미지로, 대상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빛은 절대 알 수 없다. 빛은 비추는 자이지 비추어지는 필름이 아니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가 경험이 안 된다. 그림자가 경험되는 것을 통하여 빛을 알라. 그런데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빛이 필름을 비추는 방식으로는 즉, 이미지로는(대상으로는)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비약이다. 비약은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뚝 끊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이미지가, 그림자가 아니므로. 이미 빛 그 자체이므로.
이미 빛이 있기에 모든 변화가 경험될 수 있다. 분별, 망상조차도 빛에 의하여 비추어지고 있기에. 분별, 망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큼 빛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증거도 없다. 영상은 끊임없이 바뀌지만 여기에 빛이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 자성광명, 신광(신령스러운 광명), 대적광(크게 고요한 빛) 이런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의 모든 경험을 비추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잘못하면, ‘빛’, ‘비추는 것’, ‘마음’ 이런 식으로 개념화 한다. 그렇게 하면 그것은 이미지화 하는 것이다. 그것을 싹 거둬들여야 한다. 그러면 그것을 평범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것(공)을 몰랐을 때와 똑같아지는 것이다. 이거(공)를 모르고 이 감각적으로 느껴지고 보이는 것을 실제라고 여기는 것 그대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 속지만 않을 뿐이다.
이런 비참하고 누추한 나의 감정을 구원해 줄 그런 것은 없다. 그런 구원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망념이다. 그런 것을 바라는 마음이 사라져야 한다. 깨달음이 있다거나 영원불멸한 의식 그런 것이 있으면 안 되는 이유는 그런 게 있다고 믿는 순간 거기에 의지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순간 둘이 되어 버린다. 이 현실이 고통이 되어 버린다. 그게 사라지면(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옥 같은 여기가 극락이 되어 버린다. 우리 사람에게는 망상이 갈 곳이다. 뭐뭐하면 이라는 가정법이 들어간다. 그런데 모든 가정은 미래를 상정한다. 즉, 지금 말고 다른 공간을 상정한다. 그러나 그런 유토피아는 없다. 그걸 우리는 절망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망 속에 평화와 안식이 있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의지하려는 모든 것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분별, 망상은 허공에 신기루로 오아시스를 그려놓고 저기만 도달하면 목마름이 그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곳을 쫒아가다가는 죽는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 때 어떻게라도 살아나려고 하는 것과 똑같다. 바람이 사라지면 그게 평화다. 뒤돌아볼 과거가 없고, 앞으로 기대할 미래가 없는게 평화로 가는 길이다. 지금 이 순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 고통이다. 그러나 과거는 망념, 이미지다. 그 때도 빛은 비추고 있다. 이미지가 빛이다. 망념을 생각하는 순간 허상을 실제로 착각한다. 미래에 대한 고통과 걱정도 허상이다. 단순한 현재 경험으로 돌아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