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느끼는 공(참나, 순수의식, 불성.....)은 위치가 없습니다.
오히려 전체로 존재하는 느낌입니다.
대상으로는 절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空)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는 삼라만상 모든 존재(육체를 포함)를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물건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고,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생각도(이미지 포함), 감정도 알아차립니다.
그 자리에서는 안다는 것도 알아차리고, 모른다는 것도 알아차립니다.
밖이 밝았다가 어두워질 때, 밖이 어두워진다고 하여 어둠을 바라보는 공도 어두워지는 것은 아닙니다(밝을 때나 어두을 때나 늘 한결같다).
깨어 있는 것도 알아차리고 잠을 잤다는 것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무(無)는 아닙니다.
저는 공을 보는 것이 아니고, 공에 계합된 느낌입니다.
문제들을 공에 맡긴다고 말을 하곤 하지만 사실은 맡길 것도 없습니다.
모든 일은 (개체인 나 또는 나의 행동을 포함하여) 시절 인연 따라서 저절로 한통속으로 다 잘 돌아가고 있으므로, 손댈 것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문제 삼을 일이 없습니다.
문제라고 인식하는 것은 생각일 뿐이고(현실에 대하여 필요한만큼 대응하면 됨), 맡긴다는 것도 생각입니다.
따라서 생각은 (필요할 때만 분별하고) 평소에는 그저 쉬면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문자나 언어 구조상 ‘문제들을 공에 맡긴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저절로(무의식적으로) 생각이 돌아갑니다.
그런데, 공에 머물면, 생각이 잘 보이고(알아차려지고), 그러면 생각에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직 공에 머물 뿐입니다.
처음에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일정한 분기점이 지나면 저절로 공에 머물러지게 됩니다.
제가 한때 ‘주시자’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그 주시자는 지나다가님을 통하여 대상(생각)임을 알게 되었고, 그 주시자를 알아차리는 존재(앎)가 ‘공’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에는 ‘주시자’라는 말을 자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