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의 견해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2

23-12-29 원정 46

우리는 몸과 생각에 동일시 되어 있다.


몸은 내가 아니다.

생각은 내가 아니다.

느낌은 내가 아니다.

감정은 내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나에 의하여 지각되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내가 없느냐?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엉덩이를 걷어차 버리겠다.

아픈 줄 아는 그놈은 누구냐?

  • 24-03-05 원정
    아래는 몽지님 설법 중 일부이다.

    석가모니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목적지가 자기로 돌아오는 길이라면 어떤 수단이 필요할까?
    그게 선의 길이다.

    석가모니도 처음에는 정신과 육체를 자기로 알았다.
    정신을 자기 의지대로 바꾸는 것이 선정 수행이요,
    몸을 자기 의지대로 통제하려는 것이 몸 수행 즉, 고행 수행이다.
    그러나 그게 뜻대로는 안된다. 몸과 마음은 자기가 아니므로.

    석가모니가 고행을 포기한 후 깨닫고 나서 설법을 했다.
    그건 자기가 아니다.
    몸을 관찰해라.
    느낌을 관찰해라.
    생각을 관찰해라.
    현상을 관찰해라.
    관찰되는 모든 것들은 무상, 고, 무아이다.
    그런(관찰되는) 나는 없다.
    이게 석가모니의 무아설이다.

    그런데 무아라는 것이 뭐냐?
    내가 없지만, 분명히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은 있지 않느냐?
    그걸 대승불교에서 뒤집어, 그 아무런 실체가 없는 이게(공) 진짜나(진아)라고 말한 것이다.
    말만 다르지, 초기불교나 대승불교나 똑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아의 경험이 진아의 경험인 것이다.
    바로 이거다(공을 의미함).
    어떤 대상도 아닌, 알 수도 없고, 모를 수도 없다.
    바로 이거다.
  • 24-03-05 여원남주
    無我를 가르쳐 주마.

    붓다의 핵심 가르침은 ‘諸法無我’이다.
    그것은 곧 연하여 일어난다는 말이며, 연기이다.
    즉, 제법은 셀프가 아니라는 말이다.

    몽지님 왈,
    “내가 없지만, 분명히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은 있지 않느냐?”

    몽지님,
    그러니까,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에서 我相을 가지지 말라고 하는 거 아니냐고요?

    몽지님,
    붓다의 핵심 가르침은 無我이기 때문에 연기랍니다.
    연기를 본다는 것은 분별을 하지 않는 차원이라는 다른 얘기랍니다.
    왜냐하면 분별하면 몽지님처럼 無我를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있음’이 탄생한답니다.
    자꾸 ‘있음’이 느껴져서 ‘無我’를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게 되죠.

    몽지님,
    無我따로
    무분별따로가 아니랍니다.
    무분별차원이 바로 無我랍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무분별해서
    無我로 보니까,
    주어가 사라지고,
    명사와 개념화된 것이 발붙이지 못해요.

    "붓다라는 ‘我’
    붓다라는 ‘셀프’가 있어 붓다인 것이 아니다.
    붓다상태를 보고 ‘붓다’라고 하는 것이다.
    붓다라는 ‘我’와
    붓다라는 ‘셀프’가 있어 空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空에 머무는 것을 보고, ‘붓다’라고 하는 것이다.
    비가 있어 내리는 것이 아니다.
    내리는 것을 ‘비’라고 부르는 것이다.
    책상이 있어 ‘책상’이 아니다.
    책상역할을 하니까, ‘책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박수소리가 있어 ‘박수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다.
    박수소리가 나니까, ‘박수소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모든 게 이런 동사다.
    즉, 업보를 보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이때 이름은 작자(주어)는 無我이다."

    몽지님,
    주어가 있어 셀프이기 때문에 동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동사를 필요에 의해 ‘분별’하여, 그 부분만 임시로 잘라서 이름을 짓는 것이라고요.
    이때, 분별로 탄생한 명사와 개념을 ‘있음’과 ‘我’라는 상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 붓다의 무아의 가르침이랍니다.

    몽지님,
    다시 한번,
    “내가 없지만, 분명히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은 있지 않느냐?”라고 하셨죠?
    대답할게요.
    보는 것?
    듣는 것?
    경험하는 것?
    그 모든 있는 것?
    그게 분별이랍니다.
    그것도 내가 셀프가 되어 보는 것과 듣는 것과 경험하는 것과 분별을 하고 있구먼요.
    명사와 개념화된 것은 다 분별이라고요.
    예를 들면 수증기와 냇물과 강물과 바다라는 각각의 명사가 있어요.
    이것들은 다른 것 없이 혼자서 수증기가 되고,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될 수 있나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어요.
    삼척동자도 아는 얘기라고요?
    알면 뭐해요? 분별에 쩔어서 계속 ‘있음’에 명사와 개념을 붙여서 분리시켜 희론을 만들어 내시면서.

    진정한 無我를 말씀드릴게요.
    無我는 주어가 없이 동사만 있는 거예요.
    그것은 누구는 작자(주어)는 없지만, 업보(동사)는 있다라고 말하기도 하죠.
    확실한 예를 하나 들면서 물러갈게요.
    공에 머무는 것을 보고, 붓다라고 부르는 것이예요.
    공에 머무는 동사를 보고 붓다라고 부르는 것이지, 붓다라는 주어와 명사와 개념화된 그 무엇(작자,셀프)이 있어 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요.
    공에 머무는 행위(동사)는 無我랍니다. 그것을 임시로 이름을 붙이죠. ‘붓다’라고.

    붓다가 가르친 것은,
    諸法無我이며, 諸法皆空입니다.
    無我라는 견해를 가지라.
    일체가 다 空이라는 견해를 가지라.
    는 거죠.
    그리하면 무분별지, 구경지가 바로 왕림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