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을 생각으로 그리고 있는가, 체험하고 있는가?16

23-12-25 원정 107

공이 뭡니까? 연기입니다.

연기가 뭡니까? 공입니다. 또는 인연생, 인연멸입니다.

공이 뭡니까? 무위자연입니다.

위와 같은 정도의 답변은 체험이 없이 지식을 짜깁기 하여 생각으로도(알음알이로도) 답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동어반복입니다. 추상적인 답변입니다.

왜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했을까요?

반야심경은 공을 생생히 체험한 사람이 쓴 내용입니다.


체험없이 생각만으로 짜깁기 하여 공을 답하는 사람은

아래와 같은 답변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공이 뭡니까? 텅빈 충만, 무심, 대상이 없는 바라봄의 상태, 있는 이대로, 존재의 가장 자연스런 상태(삼라만상과 분리된 초월적인 존재가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님, 전체로 존재한다는 뜻에 가까움), 생각없이(판단없이) 존재함, 생각(아상은 생각덩어리임)과 무관한 자리에 계합되어 있는 상태, 의식이 스스로 의식되는 상태입니다.

공에 대한 체험이 있는 사람은 어설프더라도 나름대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실제로 공을 체험하고 있으면, 그리고 그 자리에 머물면 자연스럽게 점수가 됩니다.

그러나 생각으로 공을 이해한 사람은 그렇게 되지가 않고(어느 정도 도움은 되겠지만), 그 이해가 힘이 없습니다.

'현실'은 정신적으로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현실에 대한 해석'이 우리에게 정신적으로 고통을 줍니다.

공을 생각으로 이해한 사람은, 생각 속에서 살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현실에 대한 해석(생각, 분별)을 하게 됩니다.

즉,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공에 대한 체험이 중요합니다.

  • 23-12-25 원정
    반야심경은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부분이 핵심입니다.

    반야심경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자아를 구성하는 5온 즉, 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이 공함을 '비추어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5온을 '생각으로 이해하라'는 것이 아니라 '비추어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24-03-01 원정
    연기는 결국 이 세상이 나를 포함하여 하나라는 통찰이다.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통찰이다.
    그래서 연기를 '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으로 정리하면 하나의 상을 그리는 것이다.
    그 생각조차 놓아야 한다.
    그 생각을 놓는다는 생각조차 없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이 저절로 쉬어지면....
    그러면 저절로 공이 드러난다.
  • 24-03-01 모모
    연기는 결국 이 세상이 나를 포함하여 하나라는 통찰이다.

    (이건 무아이면서 또한 연기..인정.)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통찰이다.
    그래서 연기를 '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부분은..공성에 대한 설명같은데.
    저와는 견해가 좀다른거 같아요.
    우선..
    유와 무..로 불법은 어떤 입장을 취하지 않습니다.
    현상으로 드러났다고 해서 봤다. 하는 순간 이미 과거로 흘러가버리기 때문에..현재 이순간은 붙잡아 이야기할수가 없지요.

    그래서..원정님이 말씀하는 것처럼..
    유라고 하지도 않지요.
    그렇다고.. 없다고 하면..
    계속해서 실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뭐라고 설명할수가 있을까요.

    그래서..중도 라고 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그래서 연기한다..라고 하거나..공성이다..라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원정님의 설명에서는. 다른 한쪽의 설명이 빠졌네요.^^
    그렇게 한쪽만 설명되면..중도가 성립되질 않고..공이. 있다고 볼수 없다.
    라는 뜻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공성이란..있다고 하기엔..머물지 앓고..없다고 하기엔..실상으로 꾾임없이 드러나는..연기의 세계를. 표현하는 언어지요.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요.^^)

    그러나 이렇게 생각으로 정리하면 하나의 상을 그리는 것이다.
    그 생각조차 놓아야 한다.
    그 생각을 놓는다는 생각조차 없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이 저절로 쉬어지면....
    그러면 저절로 공이 드러난다.

    (이 부분은..쉬고 말고. 할것이 없어 보여요.
    강물의. 여울목. 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면.. 미래와 과거로. 끊임없이 연기되어 나타나는 여울목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공성이지요.
    있다고. 하는순간 이미 흘러가버린 강물이요.
    그렇다고 실상으로 보여지는 이 순간 순간의 강 물..을 없다고도 할수 없는.....

    이것이 색이면서 공. .한..
    둘이 아닌..한몸.. 으로서의 색즉시공 의. 삶을 말하는게 아닌가 합니다.

    즉 생각을 쉬고 말고.. 그런 의미의 공 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연기로서의 공성 이지요.

    물론 의식이 지관 함(위빠사나) 으로서.. 숨 쉼 과 하나가 되어 편안한 상태의 유지와 삼매 로서의 경험은..
    삶에 매우 유익한 평화를 만들어 줍니다.
    그 상태..또한.. 엄밀히 말하면..
    공성ㆍ연기. 현상을 즐기는 상태라고 말할수 있지요.
    몸이라는..현상으로 나타나는 공성을 즐기는 거라 말하는 거지요.

    ㆍ 그런데..그 주체가 의식이라는 개념은 떨쳐내야 할 과제인거 같네요.ㆍ

    분명..의식적으로. 느껴지고.. 우주안에 가득한. 그 느낌이 실상으로 설명할수 없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이걸 뭐라고 말할수 있을까?
    이 가득찬..그러면서 텅 빈...충만감..

    그렇게 느껴질테지만..
    그 속에서 잘 바라보세요.
    그것이 진짜? 공인지?

    눈을 감고..집중해서 삼매상태로 들어가 통찰해 보세요.
    과연 난 뮐 하고 있는지..

    ...
    제가 경험한 바로는..
    눈을 감았을때..

    잠ㆍ든 상태가 아니라면ㆍ

    의식이. 집중된 생각의 비어있음. 상때에서라도..
    눈은 어둠을 향해 열려 있을것이고..
    촉각은 몸에서 움직이는 호흡의 오고감이 그대로 적나라 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의식..자체는 혼자 독립해서 존재할수가 없지요.
    의식은 오감에 기대어 함께 활동합니다.

    삼매라 하든..공 이라 하든..
    생각이 쉬는 자리라 하든..
    그 자리에서 어떻게 의식이..그 어떤오감에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독립된 의식으로 존재할 그 어떤 방법이..있는지...알수 있다면..제게도 알려주세요.

    전 그방법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거든요.

    원정님도..모른다..로 접근해서 살펴보실것을 권합니다.
    뭔가를 이미..안다로 접근 하게 되면..진리는.. 접근을 허용하질 않게되니까요.

    그러니..초심의 자세로서..모든 앎을 잠시 내려 놓고..살펴보세요.
    정말 삼 매에 드는 순간..몸이 완전히사라져 의식만 남는지..
    그 의식이..몸의 촉각 현상으로서의.. 호흡과 만나. 같이 활동하지 않는 건지..
    .어둠속이라도. 의식과. 더불어 눈의 활동이 정말.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건지..
    ,...
    솔직하게..통찰해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
  • 24-03-01 원정
    "그래서..원정님이 말씀하는 것처럼..
    유라고 하지도 않지요."와 관련하여

    제가 유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제가 잘못 설명했나 보네요.


    “그렇게 생각이 저절로 쉬어지면....
    그러면 저절로 공이 드러난다.
    (이 부분은..쉬고 말고. 할것이 없어 보여요.
    강물의. 여울목. 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면.. 미래와 과거로. 끊임없이 연기되어 나타나는 여울목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공성이지요.
    있다고. 하는순간 이미 흘러가버린 강물이요.
    그렇다고 실상으로 보여지는 이 순간 순간의 강 물..을 없다고도 할수 없는.....
    이것이 색이면서 공. .한..
    둘이 아닌..한몸.. 으로서의 색즉시공 의. 삶을 말하는게 아닌가 합니다.
    즉 생각을 쉬고 말고.. 그런 의미의 공 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연기로서의 공성 이지요.”와 관련하여

    제가 생각이 쉬어지면 이라고 왜 표현했는지 생각해 보세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표현한 것이에요.
    물론 제 말도 생각이지만 모모님의 나머지 글도 생각이에요.


    “분명..의식적으로. 느껴지고.. 우주안에 가득한. 그 느낌이 실상으로 설명할수 없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이걸 뭐라고 말할수 있을까?
    이 가득찬..그러면서 텅 빈...충만감..
    그렇게 느껴질테지만..
    그 속에서 잘 바라보세요.
    그것이 진짜? 공인지?
    눈을 감고..집중해서 삼매상태로 들어가 통찰해 보세요.
    과연 난 뮐 하고 있는지..”와 관련하여

    전 통찰하지 않아요.
    때론 통찰이 저절로 되지만.....

    “삼매라 하든..공 이라 하든..
    생각이 쉬는 자리라 하든..
    그 자리에서 어떻게 의식이..그 어떤오감에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독립된 의식으로 존재할 그 어떤 방법이..있는지...알수 있다면..제게도 알려주세요.
    전 그방법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거든요.
    원정님도..모른다..로 접근해서 살펴보실것을 권합니다.
    뭔가를 이미..안다로 접근 하게 되면..진리는.. 접근을 허용하질 않게되니까요.
    그러니..초심의 자세로서..모든 앎을 잠시 내려 놓고..살펴보세요.
    정말 삼 매에 드는 순간..몸이 완전히사라져 의식만 남는지..
    그 의식이..몸의 촉각 현상으로서의.. 호흡과 만나. 같이 활동하지 않는 건지..
    .어둠속이라도. 의식과. 더불어 눈의 활동이 정말.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건지..
    ,...
    솔직하게..통찰해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

    전 통찰하지 않아요.
    그냥 어느 순간 저절로 이렇게 되었을 뿐......
    죄송하지만 모모님의 위 글은 모두 망상이에요.
    그 생각만 쉬면 저절로 공이에요.

    다만, 이런 것이 있어요.
    현상적으로....
    의식이 저절로 의식을 의식하고 있어요.
    부수적으로 에너지장(기의 흐름)이 항상 드러나 있어요.
    제가 의도하는 것이 아니에요.
    누구에게나 에너지장이 있어요.
    다만, 생각이 끊임없이 윤회를 하니까 그 에너지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뿐.....
    석가모니 얼굴 뒤에 동그란 원이 있지요.
    전 그것이 에너지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느껴져요.


    제가 생각할 때 모모님은 다왔어요.
    그냥 쉬어지면 됩니다.
    곧 쉬어질 것입니다.
  • 24-03-01 원정
    외람되지만 모모님은 아직도 에고가 공부를 하려고 하는 면이 있어요.
    전 그게 거의 없어요.

    모모님은 에고가 공을 확인하려고 하고 있어요.
    에고가 쉬어져야 공은 드러나는데....

    전 제 에고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은 분명히 알아요.
    어느 순간 포기가 될 것입니다.
    그게 다에요.

    제 생각에 모모님의 잠재의식은 그걸 어느정도 알아차리고 있는 것 같아요.
    통찰하지 마세요.^^
  • 24-03-01 원정
    "정말 삼매에 드는 순간 ... 몸이 완전히 사라져 의식만 남는지..."와 관련하여

    저는 삼매에 들지 않아요.
    삼매에 들지도 않으니까 삼매에서 나오지도 않아요.

    다만, 항상 의식의 각성상태(의식이 의식을 스스로 의식하는 상태)로 존재해요.
    눈을 뜨고 있어도 감고 있어도 다를 바 없어요.
    그러나 각성의 농도는 달라요.
    대화중이나 일을 할 때는 각성의 농도가 옅어져요.
    가만히 정좌하고 있으면 각성의 농도가 높아져요.
    각성의 농도가 매우 높아지면 몸에 대한 느낌이 옅어져요.
    눈을 떠도 의식이 각성된 상태이나 몸과 다른 사물은 다 보여요.
    눈을 감으면, 각성의 농도가 더 높아져요.
    눈을 감은 상태에서 각성의 농도가 최고도로 짙어지면, 의식의 각성밖에 없어요.
    의식의 각성상태가 높아질수록 알아차림이 더 빠른 것 같아요.
    의식의 각성이 본질은 아니지만 알아차림(공)과 관련이 깊은 것 같아요.

    잠잘 때는 의식이 각성되어 있지는 않아요.

    지금 제 상태는 이래요.
    다만, 저는 요즈음 굳이 깊은 각성 상태로 존재하려고 노력하지 않아요.
    별도로 명상을 하지 않아요.
  • 24-03-02 원정
    이 공부는 에고(생각)가 주도적으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에고가 사라져 주는(쉬어지는) 공부에요. 에고가 쉬어져 본래 있던 공이 저절로 드러나게 하는 공부에요.
    그런데 위 글을 보면, 모모님은 생각으로 공을 알려고 해요.
    생각으로 공을 꿰어맞추려고 해요.
    그런데 생각으로는 절대로 공을 알 수는 없어요.
    공은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있는 것인데, 공에서 나온 생각으로 어떻게 생각 이전의 공을 알 수 있겠어요. 절대로 불가능해요. 에고는 ‘오직 모를뿐’이에요.
    그래서 내어맡김의 공부라고도 하잖아요.
    이 공부는 생각으로 아는 공부가 아니라 생각에서 벗어나는 공부에요.
    이 공부는 생각에서 깨어나는 공부에요.
    그래서 이 공부는 기존에 배운 공부와는 정 반대에요.

    이 말을 진심으로 이해하면, 모모님이 할 일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에요.
  • 24-03-02 모모
    네ㆍ 답변 감사합니다.
    저도 위빠사나 해보면서 그부분은 다시 통찰해 보겠습니다.^^
  • 24-03-04 모모
    하루동안..위빠사나를..해보면서..제 나름대로 통찰을 해보았습니다.
    원정님이 말씀하시는 공 체험 에 대해..좀더 자세히 바라보았지요.
    제가 예전에 알고 있던. 그 ㆍ공ㆍ체험이. 맞는지...
    제가 알지 못 하는. 또다른.. ㆍ공ㆍ이. 있는건 아닌지..살펴 보았지요.

    우선.. 제가 ㆍ공ㆍ인지 알지 못하고 오랫동안..(30년 이상) 머물러 있었고..도움도 받았던.. 그 ㆍ공ㆍ 은 맞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제가 어린 시절. 그 공체험을 했던것이..6세 정도 였다고 말씀드린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그 상태를 아지트 삼아 즐겼기에 제가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는 이야기도요.

    ..그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ㆍ..ㆍㆍ.ᆢ.ㆍㆍ.ㆍ

    그리고 그 생각을 쉬는 상태에서 드러나는. 무색계에서의. 공 과..
    연기함으로 드러나는 색계 에서의 ㆍ공..이. 같은 공인지..의미가 다른 공인지? 에 대해서도 통찰해 보았지요.

    우선 무색계 라 불리는 기억.생각. 감정. 으로 드러나는..명색도 색 으로 분류한다면..색이 될수 있겠지요.
    그리고..그 생각.기억 감정 을 모두 쉴때..드러나는 바탕을 공..으로 말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색계 에서 드러나는 공..
    그래서 ㆍ무기공ㆍ 이라 부른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무기공. 에 대해선..그동안 깊이 통찰해 보지 않았는데..
    그것이 무기공. 이라 부르는 공이 었다고 바라보니..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기공은..연기를 통해 드러나는..공이라 할수 없기 때문에..ㆍ업성ㆍ이 없는 것이 특징이지 않나 싶습니다.

    무기공이 라 해서 공성의 다르마가 다른건 아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인..연기적 색즉시공 과 관련해선.. 좀 다른면에서 다뤄져야 하는 내용.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위빠사나 명상은 분명 통찰을 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지만..
    그 정도를 넘어서서..생각.기억 감정을 바라보고 통찰하여..세상에 이익되고 참된 나로 변화시켜 가는 삶으로 전환하는...
    참된 업으로의 방향을 틀어 주는. 기능적 요소도 함께 할때.. 그 효과가 더 빛나지 않을 까..생각했습니다.

    우린..공성.으로 끝없이. 일어나는. 기억.생각 감정을 통해 생겨나는 업성인. 희노애락에서 완전히 벗어나 존재하기 위해..
    인간의 삶을 부여받은건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연기됨을 안다는 것은.. 그 희노애락으로. 반복해 이어지는..
    명색을 좀더 행복하고 밝은..업으로 계속 변화시켜 가는 ㆍ과정.ㆍ 으로의.. .
    또는..나 아닌 것이 없는 세상에서의..
    참된 나를 만들어 가는 ㆍ과정ㆍ으로의.. 참 인간의. 삶.. 참된 업..중도..
    그런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린 수행이란걸 하고..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공부를 한다고 생각들었습니다.

    그렇게..좀더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이 세상에서 다함께 누리며 살고자..공부하는 거라고 생각들어요.

    그것이. 연기적 측면에서의 공과.. 무기공의 다른 측면이 아닐까 생각들었네요.
  • 24-03-04 모모
    오늘..책을. 읽다가..이런글을 보았네요.
    부처님의 보적경 에서..
    ㆍ만일 그대가 존재한다.존재하지 않는다ㆍ라는 개념에 사로 잡혀 있으면..ㆍ공ㆍ이라는 개념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는데 도움을 줄것이다.
    하지만 ㆍ공ㆍ 이라는 개념 자체에 사로 잡혀 있다면 희망이 없다. ㆍ

    공은 통찰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도구이지만..도구를 곧 통찰로 간주해버리면..관념에 붙들리고 만다.

    라고 이야기 하네요.
    진정..새겨들을 이야기라 생각들어 올려봅니다.
  • 24-03-04 원정
    글을 읽어보면, 전 모모님이 공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모님이 공에 충분히 계합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충분히 ‘나’가 비워지고 내어 맡겨지지 않았다는 느낌입니다.

    충분히 내가 비워지고 내어 맡겨지면 어느 순간 생각의 힘이 약해지고 약해져서 저절로 공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내가 더 비워지고 더 내어 맡겨집니다. 모모님은 이 느낌을 충분히 느껴보지 못하신 것 같아요.

    모모님의 글
    “우린..공성.으로 끝없이. 일어나는. 기억.생각 감정을 통해 생겨나는 업성인. 희노애락에서 완전히 벗어나 존재하기 위해..
    인간의 삶을 부여받은건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연기됨을 안다는 것은.. 그 희노애락으로. 반복해 이어지는..
    명색을 좀더 행복하고 밝은..업으로 계속 변화시켜 가는 ㆍ과정.ㆍ 으로의.. .
    또는..나 아닌 것이 없는 세상에서의..
    참된 나를 만들어 가는 ㆍ과정ㆍ으로의.. 참 인간의. 삶.. 참된 업..중도..
    그런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린 수행이란걸 하고..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공부를 한다고 생각들었습니다.” 부분은
    제 입장에서는 미세망념입니다.
    모모님이 공을 충분히 믿지 못하고 생각이 뭔가 조작을 하려는 느낌입니다.

    깨어난 분들의 법문을 듣는 것도 생각의 힘을 약화시키는 좋은 방법입니다.
    머리를 뚝 때어놓고 법문을 듣는 것이지요.
  • 24-03-04 원정
    모모님의
    “부처님의 보적경 에서..
    ㆍ만일 그대가 존재한다.존재하지 않는다ㆍ라는 개념에 사로 잡혀 있으면..ㆍ공ㆍ이라는 개념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는데 도움을 줄것이다.
    하지만 ㆍ공ㆍ 이라는 개념 자체에 사로 잡혀 있다면 희망이 없다. ㆍ
    공은 통찰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도구이지만..도구를 곧 통찰로 간주해버리면..관념에 붙들리고 만다.”와 관련하여

    공에 충분히 진정으로 계합되면, 위 모모님의 글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거기에는 관념이 없어요.
    ‘통찰하는데 도움을 주는 도구’라는 말에는 아직 공에 충분히 계합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 도구를 이용하여 통찰하고자 하는 에고가 존재하잖아요.
    공은 도구가 아니에요.
    오히려 진정한 나 자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참나'라고도 하잖아요.

    물론 이런 것은 있어요.
    앞으로 저는 많은 시간 공에 충분히 젖어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생각의 노예로 살아왔기 때문에 생각에서 벗어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색즉시공’의 시간입니다. (그리하고 싶어져요)
    그러나 언젠가 생각에서 충분히 벗어나지면 저절로 ‘공즉시색’이 되리라고 믿어집니다. (이건 잘 몰라요)
  • 24-03-04 여원남주
    어디에 있든 자유로우라
    도반이여, 空을 그만 恐喝치시라!

    2003년 어느 날 문득,.
    “空을 보는 것이 불교의 깨달음이구나!”
    생각한 뒤로, 불교의 깨달음은 나에게 더 이상 신비의 영역이 아니었다.
    2008년∼2009년 두 해 동안 나는 줄초상을 겪었다.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뇌사판정을 받아 장기기증을 하고 떠났으며, 6개월 후에는 큰언니가 폐암말기 선고를 받고 돌아가셨다. 그 충격으로 엄마가 돌아가시고, 시댁에선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연달아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2년 동안 다섯 번의 장례식을 연달아 치른 것이다. 말로만 듣던 줄초상을 겪으면서 나를 견디게 하는 것은 ‘空’을 깨달음이 주는 혜택이었으며, 空에 대한 믿음이었다.
    류시화의 책
    <어디에 있든 자유로우라/틱낫한 저/류시화 번역>라는 책 제목이 좋아, 그 책 표지를 망자들의 영전에 바치며, 나는 끝없이 반야심경을 외웠다.
    그러면 남동생, 큰언니, 엄마, 시어머니, 시아버님이 空으로 흩어지며, 그 순간 나는 해탈할 수 있었다. 그리움과 불효의 한이 솟구쳐 오르면, 언제 어디서나 어김없이 그들과 나의 자유를 위해 반야심경을 외웠다. 그리하면 즉시로 모든 구체적인 형태(色)들은 空으로 흩어져 버리고, 나는 해탈하였고, 그들과 나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나에게 있어 空은 그런 존재였다.
    내가 구체적으로 있다고 여기는 것, 즉 色을 空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내가 믿는 진리는 뭐냐? 실체가 비어있다는 空인 거잖아? 그렇다면 내가 잡고 있는 구체적인 이것은 헛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나의 모든 것은 비어졌고, 해탈만이 남았다.
    자유로워졌다.

    반면 나에겐 오랜 도반이 있었다. 그 도반은 내게 자신의 깨달음을 이야기했다.
    그도 나처럼 ‘空’을 얘기하며, 자신이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깨달음에 대해 얘기를 들어보았다.
    그는 자신이 空에 계합한다는 것이다. 그 순간 자신은 사라지고, 空이 드러난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는 空을 체험한다고 하고, 空에 머문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는 생각이 저절로 끊어지는 단계를 자유자재로 오간다고도 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깨달은 상태를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는 언제나 그가 중심축에 존재한다.
    그러니까, 자세히 들어보면 처음과 끝이 자신에 대한 설명이 되는 것이다.

    내가 ‘空’을 깨닫는 순간은, 내가 아웃되는 순간이었다.
    일체가 하나라는 깨달음은 마치 내가 소금인형이 되어 바닷물에 빠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경험이었다.
    空에 대한 깨달음이 생생해질 때면, 만생만물과 공감 못할 것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왜냐하면 나하고 만생만물은 한 몸이니까.
    그런 측면에서 도반의 깨달음이 불교의 空을 깨달은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空을 깨달으면 내가 사라지는 것인데, 설명할 자신이 따로 있다면 그건 我相인 동시에 나라는 주관과 空이라는 객관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이었다.

    붓다가 가르침 ‘空’에 대한 가르침은 나라고 내세울 만한 고정된 실체가 비어있다는 것이다.
    그건 곧 스스로 셀프가 될 수 있는 자성을 가진 실체는 없다는 것이며, 어떤 것도 셀프가 아닌 동시다발적으로 한꺼번에 움직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도반이 깨달음이라고 주장하는 ‘空에 계합하고, 空에 머물고, 空을 체험하는 그 놈은 대체 무엇이기에 시퍼렇게 살아 계합하고, 머물고, 체험한단 말인가. 무엇이기에 생각을 하고, 무엇이기에 생각을 쉬었다가 다시 분별도 했다가 하는 것인가. 왜 그 놈의 속성은 비어있지 못하고, 주어로서 살아남은 것이냐 말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주어, 즉 작자가 없다는 것이며, 작자가 있어 작자 스스로 어떤 능력을 가져서 셀프로 행동할 수 있는 법은 실상이 아니니까, 셀프라는 구체적인 것이 다가오면 헛것이니 속지 말라는 것이다. 즉, 붓다라는 작자가 空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주어를 빼고, 空에 머무니까 붓다라고 부르는 것이지.

    다음에 계속
    답글을 사양합니다. 내 얘기만 잠시하고 사라집니다.
  • 24-03-11 여원남주
    그리고 그 생각을 쉬는 상태에서 드러나는. 무색계에서의. 공 과..
    연기함으로 드러나는 색계 에서의 ㆍ공..이. 같은 공인지..의미가 다른 공인지? 에 대해서도 통찰해 보았지요.
    → 연기해야만 드러나는 ‘空’은 아니죠. 무엇이든지 동시에 일어납니다.

    우선 무색계 라 불리는 기억.생각. 감정. 으로 드러나는..명색도 색 으로 분류한다면..색이 될수 있겠지요.
    그리고..그 생각.기억 감정 을 모두 쉴때..드러나는 바탕을 공..으로 말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색계 에서 드러나는 공..
    그래서 ㆍ무기공ㆍ 이라 부른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 무기공이든 뭐든, 잠시 죽음체험을 하는 거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

    무기공. 에 대해선..그동안 깊이 통찰해 보지 않았는데..
    그것이 무기공. 이라 부르는 공이 었다고 바라보니..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기공은..연기를 통해 드러나는..공이라 할수 없기 때문에..ㆍ업성ㆍ이 없는 것이 특징이지 않나 싶습니다.
    → 한마디로 무기공은 망념이고, 망념이란 업이 있다.

    무기공이 라 해서 공성의 다르마가 다른건 아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인..연기적 색즉시공 과 관련해선.. 좀 다른면에서 다뤄져야 하는 내용.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연기적 색즉시공
    이란 말은 처음 들어보네.
    색즉시공
    이 곧 연기다.
    왜 모모님이 이런 ‘연기적’이란 수식어를 쓰냐하면 역시 연기를 ‘用’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명상은 분명 통찰을 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지만..
    그 정도를 넘어서서..생각.기억 감정을 바라보고 통찰하여..세상에 이익되고 참된 나로 변화시켜 가는 삶으로 전환하는...
    참된 업으로의 방향을 틀어 주는. 기능적 요소도 함께 할때.. 그 효과가 더 빛나지 않을 까..생각했습니다.
    → 반야가 함께 하지 못하는 죽음체험은 죽음체험일 뿐이다.
    업과 연기를 역시 用의 기능으로 보고 있다.

    우린..공성.으로 끝없이. 일어나는. 기억.생각 감정을 통해 생겨나는 업성인. 희노애락에서 완전히 벗어나 존재하기 위해..
    인간의 삶을 부여받은건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 有(존재,being)가 생겨나니, 주어가 탄생하고, 그 주어의 생노병사와 희로애락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희로애락에서 완전히 벗어나 존재하기 위해 인간의 삶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니? 놀랍다. 이건 연기와 공을 ‘用’으로 인식하는 결과물이다.

    연기됨을 안다는 것은.. 그 희노애락으로. 반복해 이어지는..
    명색을 좀더 행복하고 밝은..업으로 계속 변화시켜 가는 ㆍ과정.ㆍ 으로의.. .
    또는..나 아닌 것이 없는 세상에서의..
    참된 나를 만들어 가는 ㆍ과정ㆍ으로의.. 참 인간의. 삶.. 참된 업..중도..
    그런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 연기를 안다는 것은 ‘有(존재,being)’가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모모님은 원정님과 형태는 다르지만, 똑같은 주관과 객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나라는 주관이 대상이 ‘用’으로써의 연기와 중도와 업과 수행을 한다고 말이죠.

    그래서 우린 수행이란걸 하고..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공부를 한다고 생각들었습니다.
    그렇게..좀더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이 세상에서 다함께 누리며 살고자..공부하는 거라고 생각들어요.
    그것이. 연기적 측면에서의 공과.. 무기공의 다른 측면이 아닐까 생각들었네요.
    → ‘有(존재, being)’ 탄생시키지 않는 것이 연기요, 공이요, 중도요, 무아이며 부처님의 공부를 제대로 하는 것이고, 무기공은 그냥 我相의 반야를 제거하려는 ‘죽음체험’정도죠. 죽음에 계합해 보다와 같다고나 할까요.
  • 24-03-11 여원남주
    글을 읽어보면, 전 모모님이 공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모님이 공에 충분히 계합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충분히 ‘나’가 비워지고 내어 맡겨지지 않았다는 느낌입니다.
    → 모모님은 ‘用’으로 空(연기)을 色의 형태로 가지고 있고, 원정님은 ‘근원, 진공, 태초’라는 色으로 ‘空을 가지고 있습니다. 空에 계합한다는 것은 붓다와 등정각인 중도에 계합하여야 空에 계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충분히 내가 비워지고 내어 맡겨지면 어느 순간 생각의 힘이 약해지고 약해져서 저절로 공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내가 더 비워지고 더 내어 맡겨집니다. 모모님은 이 느낌을 충분히 느껴보지 못하신 것 같아요.
    → 주어가 사라지는 차원은 둘 다 아닌 것 같고요.

    모모님의 글
    “우린..공성.으로 끝없이. 일어나는. 기억.생각 감정을 통해 생겨나는 업성인. 희노애락에서 완전히 벗어나 존재하기 위해..
    인간의 삶을 부여받은건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연기됨을 안다는 것은.. 그 희노애락으로. 반복해 이어지는..
    명색을 좀더 행복하고 밝은..업으로 계속 변화시켜 가는 ㆍ과정.ㆍ 으로의.. .
    또는..나 아닌 것이 없는 세상에서의..
    참된 나를 만들어 가는 ㆍ과정ㆍ으로의.. 참 인간의. 삶.. 참된 업..중도..
    그런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린 수행이란걸 하고..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공부를 한다고 생각들었습니다.” 부분은
    제 입장에서는 미세망념입니다.
    모모님이 공을 충분히 믿지 못하고 생각이 뭔가 조작을 하려는 느낌입니다.
    → 원정님, 의식이 의식을 의식한다는 생각이 거대망념입니다.
    관계를 떠나 의식에게 주관과 객관의 지위를 부여하고, 굳이 또 그것을 설명하는 ‘我相’을 독립시킵니다.

    깨어난 분들의 법문을 듣는 것도 생각의 힘을 약화시키는 좋은 방법입니다.
    머리를 뚝 때어놓고 법문을 듣는 것이지요.
    → 생각을 바꾸는 것이 해결책입니다. 단견과 상견을 깨부수고, 정견인 중도의 생각을 하라고요. 아예 통째로 다 제거한다는 것이 거대망상입니다.
  • 24-03-11 여원남주
    우린..공성.으로 끝없이. 일어나는. 기억.생각 감정을 통해 생겨나는 업성인. 희노애락에서 완전히 벗어나 존재하기 위해..
    인간의 삶을 부여받은건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 有(존재,being)가 생겨나니, 주어가 탄생하고, 그 주어의 생노병사와 희로애락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희로애락에서 완전히 벗어나 존재하기 위해 인간의 삶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니? 놀랍다. 이건 연기와 공을 ‘用’으로 인식하는 결과물이다.

    2024년 3월 4일
    공을 생각으로 그리고 있는가, 체험하고 있는가?
    원정님에 대한 답글에서 모모님은
    “우린..공성.으로 끝없이. 일어나는. 기억.생각 감정을 통해 생겨나는 업성인. 희노애락에서 완전히 벗어나 존재하기 위해..
    인간의 삶을 부여받은건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글을 적었습니다.

    그 답글로 제가
    有(존재,being)가 생겨나니, 주어가 탄생하고, 그 주어의 생노병사와 희로애락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희로애락에서 완전히 벗어나 존재하기 위해 인간의 삶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니? 놀랍다. 이건 연기와 공을 ‘用’으로 인식하는 결과물이다.
    와 같은 글을 적었습니다.

    모모님은 연기와 공과 무아와 중도를 ‘用’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정남주페이스북에 ‘心’에 대해서 이런 글을 쓴 일이 있어요.
    공유한 바 있으니, 아마 아실 겁니다.
    1월 22일
    공유 대상: 전체 공개
    양자역학 코펜하겐해석으로 풀어보는
    一切唯心造 두 번째 이야기
    一切,
    모든 물질은 가능한 모든 상태가 중첩상태로 동시에 존재한다.
    唯心,
    관측되는 순간
    이때 관측이란 온 우주가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주관인 관찰자가 객관인 어떤 상태를 관측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가 빠진 동사의 상호작용이다.
    ★물질파개념에 따르면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모든 물질은 크기와 상관없이 파동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관측하지 않는다면 파동함수를 이용한 확률적 서술만 가능하다. 관측되기 전에는 파동성만 지니고 있고, 파동은 물질이 아니므로 실체가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造,
    중첩되어 있다가 관찰순간, 하나의 고유상태로 결정되어 나타난다.(파동함수 붕괴)
    비결정론적인 양자역학의 코헨하겐 해석에 따르면, 인과율은 깨어진다.
    하나의 원인에 의한 무수한 미래가 가능하며, 반대로 관측되는 미래의 결과에 의해서 원인이 결정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미래가 과거를 결정해 버리는 논리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셰익스피어의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제목은 혹시라도 양자역학이 인과율을 깰 것을 예감한 작품이 아니었을까.

    제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마음이 발생하는 것은 일체와 상호연결이라는 겁니다.
    이때, 일체와 상호연결에는 주관과 객관이 없는 것이죠.
    이 글을 굳이 다시 가져 온 이유는 주관인 모모님이 객관, 대상으로서의 用인 연기와 공과 중도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