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원님
저와 여원님은 적어도 지금은 시절인연이 아니에요.
이 글은 쓰고 싶지 않지만, 여원님과 23년 이상의 연연을 생각하여 쓰는 것이에요.
여원님, 저는 ‘생각으로써(말과 글로써)’ ‘생각과 무관한 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에요.
여원님은 깨달음, 공, 견성, 참나 등을 말하지만 그것들을 체험했거나 현재 체험하고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계속하여 입으로 그런 말들을 반복하여 말한다고 하여 그게 여원님에게 어떤 공부가 되나요.
여원님의 에고만 더 강화되지.
이 공부는 단순히 이해하거나 믿는 정도만으로 해결되지 않아요.
체험을 해야 더 확고한 믿음이 생기기도 하고요.
여원님의 에고가 감당할 정도의 도전이 오면 여원님의 지금 공부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만, 여원님의 에고가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도전이 오면 지금의 여원님의 공부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지금 죽음이 앞에 다가올 때 여원님의 지금의 공부가 여원님께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요.
지금 여원님이 도배해 놓은 정도의 글들을 여원님은 제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여원님이 쓴 글 정도는 제가 2,000년 경에 이해한 내용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여원님 글은 그럴듯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원님의 글은 동어 반복일 뿐이에요.
그 자리(공, 견성, 참나, 불성)를 체험해 보고 쓴 글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 자리를 직접 경험해 보아야 그 말들이 살아나는 거에요.
아, 이래서 이렇게 말하는구나!!!!
그리고 부족하더라도 좀 더 풍부하게 그 자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고요.
말과 글로써는 이것(참나, 불성, 공)을 설명하기가 애초에 불가능해요.
방편으로 설명하거나 근사치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에요(어떻게 생각으로 생각 이전의 것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예를 들어서 여원님의 관찰자는 ‘생각 속의’ 관찰자(주관과 객관이 나뉘어져 있음, 대상으로 관찰을 함)입니다. 여원님은 공을 체험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 관찰자는 당연히 에고지요.
그런데 생각과 무관한(생각 이전의) 이것(참나, 공)이 있어요.
만약에 그것을 이름하여 관찰자라고 칭한다면 그 관찰자는 ‘생각을 벗어난’ 관찰자에요.
에고가 아니에요.
물론 그 관찰자가 대상으로(주관과 객관이 둘로 나뉘어) 다른 것을 관찰하는 것은 아니에요.
눈이 눈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마치 다른 사물을 바라볼 때 눈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방식으로 관찰이 되는 것이지요.
(눈이 눈을 볼 수는 없지만, 다른 사물을 바라봄으로써 눈이 존재함을 알 수 있잖아요. 그런 방식으로 알아차려지는 것이에요. 알아차림은 대상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어요. 제가 이렇게 설명하지만 여원님은 공을 체험한 사실이 없으니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를 것입니다)
이름이 같다고 다 같은 것이 아니에요.
말과 글로는 설명이 잘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여원님은 제가 '알아차림'이라고 말할 때 주관과 객관이 나뉘어진 상태에서 알아차린다고 생각할 거에요.
그런데 여원님이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여원님이 모르는 자리가 있어요.
많은 조사들이 바보가 아니에요.
제가 여원님에게 여원님이 체험하고 있는 ‘공’을 설명해 보라고 했지요.
그런데 정작 여원님은 설명을 못하셨잖아요.
비슷한 그림조차 그리지 못하셨어요.
체험이 없으니 그렇지요.
그리고 오히려 여원님은 제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시면서 생각으로 막 제 상태를 재단해요.
참으로 무모할 정도에요.
에고가 원래 그래요.
에고는 자신이 안다고 생각해요.
왜 석가모니가 어떤 견해도 잡아서는 안된다고 말했을까요?
법도 잡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여원님은 여원님의 확고한 견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어떠한 말을 해도 안 들리지요.
‘사과 맛을 보려면 사과를 그리는 것으로는 안된다, 한 번 맛을 보아야 한다’라고 말해도 여원님의 에고는 계속하여 사과를 그리기만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여원님의 입장에서는 여원님의 견해가 너무도 완벽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원님,
제가 ‘동그라미’를 말하고 있는데,
여원님은 제게 ‘당신의 6각형은 왜 이 모양이냐’라고 저를 나무라고 있어요.
왜냐?
여원님은 직접 동그라미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에요.
이때 저는 뭐라고 답해야 하나요.
이게 제 심정이에요.
여원님이 공(견성, 참나)을 체험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쓰세요.
여원님이 공을 체험한 경위(과정)를 쓰시고요.
많은 깨어난 사람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말하잖아요.
십우도 그림이 왜 있겠어요.
그런 체험이 없으면 그런 것들에 대하여 조심해서 말씀하시고, 차라리 다른 글을 올리세요.
이렇게 글을 써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잖아요.
지금 같은 도배글이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여원님의 에고를 빼놓고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 것과 뭔 차이가 있겠어요?
왜 체험해 보지도 않은 것을 마치 체험해 본 것처럼 쓰시나요.
마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것처럼 쓰시잖아요.
‘내가 이러이러한 책을 읽었는데, 이러한 견해들을 종합해서 정리해 보니 나는 공을, 중도를, 견성을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쓰세요.
나는 ‘십우도 그림 중 어느 정도의 체험을 어떻게 하고 있다’ 라고 쓰세요.
생각으로 정리한 것을 가지고, 마치 모두 다 아는 것처럼(모두 체험한 것처럼) 쓰지 마시고요.
그게 싫으시면 글을 자제하세요.
그것도 싫으시면 다른 곳에 가셔서 여원님의 도를 전파하세요.
부탁드립니다.
더 이상 여원님께 답글은 달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