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의 위대함은 방편으로 ‘견성’이란 것을 만들어 놓은 점이다.
사람들에게 부처자리까지 가보라(실제로는 오고 갈 것도 없다) 하면, 사람들은 너무나 막막하고 어려워 시작조차 하지 아니한다. 이럴 때 ‘견성’이라는 방편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높이뛰기 하는 사람에게 최대한 높이 뛰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봉’이라는 방편을 만들어 줄 수 있다. ‘최대한 높이 뛰어봐’라고 말하는 것보다, 봉으로 목표를 정해주고 ‘이 봉을 넘어봐’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더 쉽게 더 높이 뛸 수 있다. 여기서 포인트는 '높이 뛰는 것'이지 봉이 아니다. ‘봉’은 높이뛰기 쉽게 가상으로 만들어준 방편이다.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아트만(인간 존재의 영원한 핵)’의 존재에 대하여 반대하면서 나온 인도불교 정서에서는 아트만과 유사하게 보이는 ‘봉’이란 방편을 만들어 줄 수가 없었으나 인도불교와 다른 환경인 중국불교 환경에서는 ‘봉’이란 방편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 ‘봉’이 ‘참나’요, ‘불성’이다. “(가상의 봉인) 불성을 한 번 체험해 봐!!!” 그렇게 방편으로 ‘견성’이란 것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법화경의 화성유품에도 ‘화성의 비유’가 나오는 데,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르기가 너무 힘이 드니까 리더가 중간에 환상의 성인 화성을 하나 만들어서 힘든 수행자들을 충분히 쉬게 한 후 수행자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내용이 있다.
참고로, 어떤 사람들은 ‘초기불교는 무아를 주장했는데, 선불교는 유아, 참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무아를 주장하는 분이 아니다. 사람들이 아트만이라는 ‘아’에 사로잡혀 있으니 그 것을 깨주기 위해 무아를 내세운 것이지 무아를 꽉 잡고서 무아가 법이라고 말씀하신 분이 아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무아를 딱 지키고 서서 ‘선불교는 불성을 말하므로 무아가 아니기 때문에 불교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선불교는 ‘불성’이나 ‘본래면목’을 지키고 있지도 않다. 즉, 십우도에서 처음에는 목동이 흰 소(불성)를 찾아 나서지만 나중에는 흰 소가 없어지는 것처럼 ‘견성’이 목표가 아니다. 원래는 ‘흰 소’가 필요 없었던 것인데, 방편으로 ‘흰 소’를 내세운 것뿐이다. 즉, ‘흰 소’라는 ‘자기’(불성)를 확인하는 단계를 만들어 놓은 것인데, ‘자기’는 ‘있다’라고 해도 틀리고 ‘없다’라고 해도 틀린다. 유무중도. 초기불교와 선불교는 방편이 다를 뿐이다.
한편, 초기불교에서는 해탈은 원인을 알면 되고, 分別이 원인이니(탐진치가 원인이니) 分別을 빼라, 그 원인을 제거하라고 합니다. 즉, 업장을 다 소멸시킨 후 깨닫는 깨달음을 말합니다.선불교에서는 이 分別 저 分別 탐친치 언제 하나하나 다 제거하느냐, 分別심을(수미산을 넘는 업장을) 언제 다 조복 받고(제거하고) 공부할거냐, 안 좋은 성격 다 바꾸고 공부할거냐? 즉, 업은 내버려두고 법을 확인하고 얻는(업이 더 이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깨달음을 말합니다. 곧장 열반의 자리를 직지하여 법을 바로 가리켜보인다. 선불교는 위치나 방향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전부니까) 목적지를 딱 찍어주는 면이 있다. 즉, 법을 바로 가리켜보인다(직지인심). 즉, 해탈에도 업장을 다 소멸한 후 오는 해탈이 있고, 법을 한 번 확인해서 오는 해탈이 있는데, 전자가 초기불교이고, 후자가 선불교이다. 스승이 직지하면, 제자는 모든 문제를 법에 대한 간절한 발심 하나로 딱 모아 발심하나로 생각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생각이 꽉 막히게 하여, 分別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그 자리를 버틴다. 화두란, 이미지가 그려지는 화두는 진짜 화두가 아니다. 화두는 생각이나 방법으로 푸는 것이 아니다. 머리를 굴려서도 안 된다. 경전을 통해서 이해해서도 안 된다. 꽉 막힘 상태에서 그냥 하나로 계합하는 것이다. 제자는 꽉 막힘 막힌 상태에서 법문에 귀 기울일 뿐인데, 그게 중도수행이요, 화두에 들리는 것이다.
참고로, 이 글은 ‘법상’ 스님의 법문을 듣고 제 마음대로 정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