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마음공부 중간 점검
저는 주시자(관찰자, 나라고 생각되는 느낌의 부분)를 화두 삼아 ‘이게 뭔지’ ‘향후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해 하면서 집중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주시자로 존재하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1시간, 출근 중 하천을 걸으면서 30분, 퇴근 중 하천을 걸으면서 30분, 잠자기 전 1시간 이렇게 집중적으로 궁금해 하면서 주시자를 바라보았습니다(주시자로 존재하였습니다). 또 시간이 나면 틈틈이... 이 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집중력입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확보하느냐는 것 보다 얼마나 고도로 집중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정말로 고도로 집중하면 시간은 일주일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주시자로 존재하기 시작한지 약 1달 쯤 되어) 주시자로 존재하면서 하천을 걸어가는데 주시자 주변에서 뭔가가 드러나더군요. 얼마 정도 지나고 나서 보니 주시자(관찰자, 나라고 생각되는 느낌의 부분)는 생각덩어리였고, 그 드러난 부분이 본 성품(이것)이었어요. 그 당시 느낌으로 이것은 ‘의식이 각성을 하였구나!’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나(참나, 한마음, 본성)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점점 강해지고 확장되더니 어느 순간 이것은 존재감으로 인식되었고, 지금은 몸을 포함하여 끝없는 허공(의식의 장)이 나로 인식되기 시작하였어요. 이것은 사실상 항상 존재합니다. 즉, 항상 삼매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래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표현하는 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이 때의 나는 전체(한마음)로서의 나이지 개체로서의 나가 아니겠지요. 이게 ‘참나의 탄생’이요, ‘살아서 부활’이라는 말의 의미 같아요. 이 때 개체로서의 나는 '무아'(참나 중 일부, 연기)입니다.
온통 끝없는 허공이 통으로 하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것을 ‘공’이라고 표현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정한 나는 육체 속에 제한 된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끝없는 허공 속에서 삼라만상이 생멸하는 것 같습니다.
이 끝없는 허공은 삼라만상의 바탕으로서 항상 존재합니다.
이 끝없는 허공 속에서 생각도 감정도 나오고 또 생각과 감정은 이 허공 속으로 다시 사라집니다.
이 끝없는 허공 속에서 동물, 식물, 온갖 사물, 별, 우주가 나오고 또 이 허공 속으로 다시 사라집니다. 이 끝없는 허공은 세포 속에도 존재하고, 건물 속에도 존재하고, 온갖 사물 속에도 존재합니다.
이 끝없는 허공이 진정한 나(한마음, 순수의식)인데, 이 곳에서 삼라만상이 나오고 사라지니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바다(본성) 위에서 파도(현상)가 일어났다 사라지는 모습에 비유하면서 한마음(이것, 참나)에서 모든 삼라만상이 나왔다가 사라진다고 말했나 봅니다.
이 끝없는 허공(한마음)에서 모든 삼라만상이 나왔으니 개체로서의 내 몸을 포함한 삼라만상이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순수의식, 참나, 본성, 한마음, 부처, 신)은 분별하기 이전의 앎의 자리입니다. 소리가 있으면 있음을 알고, 소리가 없으면 없음을 알며(소리의 내용은 분별할 수 없지만), 눈에 사물이 보이면 보임을 알고, 안보이면 안보임을 알며(보이는 사물을 분별할 수는 없지만), 생각이 있으면 생각이 있음을 알고, 없으면 없음을 압니다(생각의 내용은 모르지만). 아마도 갓난 아기가 이런 앎의 상태에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상태가 갓난 아이와 같은 상태라고 하는 듯 싶습니다.
이것은 시공도 없고(시공은 분별심 속에 있다), 대상화해서 볼 수 없고(이것의 존재를 깨달을 수만 있습니다), 안밖이 없고, 모양도 색깔도 없고, 오고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不生不滅불생불멸 不垢不淨불구부정 不增不減부증불감”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고통은 ‘나가 육체 속에 제한되어 있다는 환상’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십우도를 보면 깨달음도 깨달은 사람도 사라지는 경지가 있고, 반야심경에도 공즉시색이라는 표현을 하는 것을 보면, 어느 순간 이것(참나, 공)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이 자리(공, 순수의식, 참나)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사람들이 몸의 어느 부위가 통증이 심하면 그 곳에 저절로 마음이 가듯이, 의식(공, 참나)이 각성되어 있어서 그런지 저절로 의식에 마음이 머뭅니다. 저절로 회광반조가 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머무르면 저절로 분별심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생각(분별심)이 줄고, 사물을 전체로 통으로 보게 됩니다. 이렇게 이 자리에 계속하여 머물다보면 에고(분별심, 업장, 습기)는 어느덧 녹아버릴 것도 같습니다. 많은 세월이 필요하겠지만... 이 자리는 저절로 마음공부가 되는 자리 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은 그저 이 자리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저절로 이 자리에 머물게 되는 면이 있지만... 그래서 이 마음공부는 작위적인 수행을 하지 않는 무위법입니다.
그러나 저는 갈 길이 멉니다. 십우도의 '목우' 초반 즈음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싯다르타나 예수나 모든 각자들이 이 자리(공, 참나, 순수의식)에 머물렀을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일정기간 공(참나, 순수의식)에 머물지 않고서는 업장(습기)을 제거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참고로, 의식이라고 말하면 보통 사람들은 순수의식으로 존재하지(순수의식에 계합하지) 못하고, 의식이라는 생각(분별심-기존의 고정관념)을 통하여 의식을 인식할 것입니다. 보통 일반인들은 생각(분별심) 속에서 생각(분별심)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심지어 명상조차도 생각(분별심) 속에서 합니다. 이런 이유로 보통 사람들이 생각(분별) 속에서 생각(분별)을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생각(분별심)에 속아서 그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생각(분별심)의 노예로 살고 있으면서도(에고로 똘똘 뭉쳐있으면서도) 생각(분별심)에서 벗어났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공(순수의식)에 한 번 계합해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봉서산 김용철님의 유튜브를 보면, ‘멍 때리고 사물 전체를 통으로 보라. 검은 눈동자로 어떤 사물에 촛점을 맞추어 보지 말고 흰자위로 전체를 통으로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공(순수의식, 참나)으로 존재하면 이 분이 말씀하시는 상태와 비슷해집니다. 이 분의 조언에 따라서 행동을 하면 공(순수의식)에 쉽게 계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의식이 각성을 할 것 같습니다. 초심자들에게는 봉서산 김용철님의 방법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