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의 깨어남에 대한 나의 생각
싯다르타가 출가를 한 이후에 요가(?) 스승을 만나 선정수행을 배웠다고 한다.
이때 만난 스승이 알라라 깔라마, 웃다카 라마풋다인데, 알라라 깔라마에게 무소유처정을 배웠고 웃다카 라마풋다에게 비상비비상처정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이것으로는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떠났다고 한다.
아마도 요가 스승들의 방법은 유의법(유의적인 수련을 통한 방법)이어서, 평상시에는 그 선정에 머물 수 없었을 것이었기 때문에, 싯다르타는 그들을 떠났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그 후 싯다르타는 선정 수행을 접고 육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6년간의 극도의 고행 수행을 했지만 고행수행을 통하여 얻는 게 없었다. 즉, 육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느꼈다. 그 당시 싯다르타는 고행도 올바른 방법이 아님을 깨닫고 고행을 접었고, 갈 길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 당시 싯다르타의 상황은 모든 인생을 포기하고 자살을 하려는 사람의 심정과도 같았을 것이다. 즉, ‘나(이상, 에고, 분별덩어리, 생각)’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구나 하고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수자따가 준 우유죽을 얻어먹고 기운을 차렸다'거나 ‘별을 보고 깨달았다’는 말이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점은 싯다르타의 ‘에고가 자포자기된 상황’이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별’이나 ‘우유’는 전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에고가 자포자기 상태가 되면 자연스럽게 ‘그것’(본성, 참나, 신, 멸진정)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별을 보고 깨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이것’이 드러나고 있는 시점에 멍한 상태에서 별이 눈을 통하여 들어왔을 뿐인 것이다. ‘별’에 의미를 두면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깨어남은 항상 이렇다.
에크하르트 톨레도 우울증으로 인하여 자살(에고의 자살) 직전에 깨어났고, 바이런 케이티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포자기 한 상태에서 깨어났다.
화두 등의 수행방법도 사실은 ‘에고의 자살’(분별의 쉼 - 에고의 자포자기) 상태와 비슷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숭산스님의 ‘오직 모를 뿐’(분별의 쉼)도 이와 같다.
부처가 뭐냐는 제자의 질문에 스승이 손가락 하나를 세우면 제자는 '모르는 마음 '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법문을 할 때 청자들은 스토리를 따라가서는(이해해서는) 안된다. 모르는 마음쪽으로 청자들을 인도하는 스승이 최고의 스승이다.
이렇게 하여 한 번 깨어나면 ‘이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점이 요가의 유의적인 선정과는 완전히 다른 점이다.
‘이것’은 한 번 드러나면, 그 이후에는 저절로 항상 드러나 있다.
이렇게 글을 쓸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생각을 할 때도, 일을 할 때도....
‘이것’이 드러난 이후에는 수행도 저절로 된다.
나는 요즘 명상 관련 유튜브를 둘러보고 있다.
나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둘러보기 위하여.
그러다가 봉서산 김용철님의 유튜브를 발견했다.
이 분도 자살을 하려고 하다가 '이것'을 체험하였다.
다른 분들은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는데 이 분은 친절하게도 설명을 하신다. 나는 이 분만큼 공부가 되지 않았으나 이 분을 이해할 수 있는 상태이기는 하다. 특히 ‘멍 때리고 전체를 통으로 보라. 검은 눈동자 초점으로 보지 말고 흰자위로 보라’는 이 분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것’으로 존재하면 이 분이 말씀하시는 상황과 비슷해지기 때문이다.이 분의 조언에 따라서 행동을 하면 ‘이것’으로 쉽게 계합될 수 있을 것 같다.
초심자들에게는 봉서산 김용철님의 방법을 권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