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의 깨어남에 대한 나의 생각(수정)77

22-05-11 원정 67

싯다르타의 깨어남에 대한 나의 생각

 

싯다르타가 출가를 한 이후에 요가(?) 스승을 만나 선정수행을 배웠다고 한다.

이때 만난 스승이 알라라 깔라마, 웃다카 라마풋다인데, 알라라 깔라마에게 무소유처정을 배웠고 웃다카 라마풋다에게 비상비비상처정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이것으로는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떠났다고 한다.

아마도 요가 스승들의 방법은 유의법(유의적인 수련을 통한 방법)이어서, 평상시에는 그 선정에 머물 수 없었을 것이었기 때문에, 싯다르타는 그들을 떠났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그 후 싯다르타는 선정 수행을 접고 육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6년간의 극도의 고행 수행을 했지만 고행수행을 통하여 얻는 게 없었다. 즉, 육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느꼈다. 그 당시 싯다르타는 고행도 올바른 방법이 아님을 깨닫고 고행을 접었고, 갈 길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 당시 싯다르타의 상황은 모든 인생을 포기하고 자살을 하려는 사람의 심정과도 같았을 것이다. 즉, ‘나(이상, 에고, 분별덩어리, 생각)’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구나 하고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수자따가 준 우유죽을 얻어먹고 기운을 차렸다'거나 ‘별을 보고 깨달았다’는 말이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점은 싯다르타의 ‘에고가 자포자기된 상황’이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별’이나 ‘우유’는 전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에고가 자포자기 상태가 되면 자연스럽게 ‘그것’(본성, 참나, 신, 멸진정)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별을 보고 깨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이것’이 드러나고 있는 시점에 멍한 상태에서 별이 눈을 통하여 들어왔을 뿐인 것이다. ‘별’에 의미를 두면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깨어남은 항상 이렇다.

에크하르트 톨레도 우울증으로 인하여 자살(에고의 자살) 직전에 깨어났고, 바이런 케이티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포자기 한 상태에서 깨어났다.

화두 등의 수행방법도 사실은 ‘에고의 자살’(분별의 쉼 - 에고의 자포자기) 상태와 비슷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숭산스님의 ‘오직 모를 뿐’(분별의 쉼)도 이와 같다.

부처가 뭐냐는 제자의 질문에 스승이 손가락 하나를 세우면 제자는 '모르는 마음 '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법문을 할 때 청자들은 스토리를 따라가서는(이해해서는) 안된다. 모르는 마음쪽으로 청자들을 인도하는 스승이 최고의 스승이다.

 

이렇게 하여 한 번 깨어나면 ‘이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점이 요가의 유의적인 선정과는 완전히 다른 점이다.

‘이것’은 한 번 드러나면, 그 이후에는 저절로 항상 드러나 있다.

이렇게 글을 쓸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생각을 할 때도, 일을 할 때도....

‘이것’이 드러난 이후에는 수행도 저절로 된다.

 

나는 요즘 명상 관련 유튜브를 둘러보고 있다.

나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둘러보기 위하여.

그러다가 봉서산 김용철님의 유튜브를 발견했다.

이 분도 자살을 하려고 하다가 '이것'을 체험하였다.

다른 분들은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는데 이 분은 친절하게도 설명을 하신다. 나는 이 분만큼 공부가 되지 않았으나 이 분을 이해할 수 있는 상태이기는 하다. 특히 ‘멍 때리고 전체를 통으로 보라. 검은 눈동자 초점으로 보지 말고 흰자위로 보라’는 이 분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것’으로 존재하면 이 분이 말씀하시는 상황과 비슷해지기 때문이다.이 분의 조언에 따라서 행동을 하면 ‘이것’으로 쉽게 계합될 수 있을 것 같다.

초심자들에게는 봉서산 김용철님의 방법을 권해보고 싶다.

 

 

  • 22-05-11 여원
    석가모니의 깨달은 순간은 이랬을 것입니다.
    석가모니도 그동안 독립된 개체로서의 습기가 미세하게나마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 깨달음은 너무나도 위대하여 알아들을 자가 없을 것이다.”하면서 깨달음을 전하기를 포기하고 혼자서 열반하려고 했었죠. 그러다가 깨달음의 힘이 세력을 발휘되자, “너는 나다. 나는 너다”하면서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 내가 깨달을 수 있다면 너도 깨달을 수 있다’는 자각을 했을 것입니다.
    싯달타가 깨달을 수 있다면 분명히 다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단박에 믿었을 것입니다.
    싯달타와 싯달타가 아닌 이들은 하나이니까요.
  • 22-05-11 원정
    여원님께 제가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말은...
    적어도 견성을 하면 심인성 질병 및 현상은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다는 점입니다.
    반야심경은 공포심은 모두 사라진다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지니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 22-05-11 여원
    여기에서도 원정님은 독립된 개체를 세우고 계십니다.
    잠시 잠시 부처의 상태가 되면
    잠시 잠시 부처가 가려지면
    이지
    특정한 개체가 생로병사를 겪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질병또한 나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구도 하나의 생명입니다.
    지구도 생로병사를 겪습니다.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완벽한 것은 실상이 아닙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공이 되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개체에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색은 공이면서
    공은 색입니다.
  • 22-05-11 원정
    당연히 독립된 개체로 말하는 것이고,
    실제로 깨어남이 독립된 개체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독립된 개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 깨달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깨달음을 위한 깨달음!!!???

    여원님은 지금 독립된 개체가 없나요?
  • 22-05-11 여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원정님께서는 '연기'를 깨달은 힘이 미약한 것입니다.

    불교의 깨달음은 '공'이며,'연기'이며,'중도'이며, '무아'입니다.
    개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 22-05-11 여원
    개체가 개체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환경운동도 하고, 사회운동도 하고, 정치참여도 하는 겁니다. 봉사활동도 하고요. 수많은 너를 위한 우리 모두를 위한 활동을 하지요.
    너를 위해 나를 헌신하는 이들로 인해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이죠.
    그들은 개체의 행복이 있기 위해서는 전체의 행복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 개체에게 도움이 되지 않나요? 그런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는 것인데요.
    그렇지 않나요?
    개체는 없어요.
    잠시 번쩍 하고 번개처럼 나타난 현상일 뿐입니다.
    번개를 나타나게 한 조건들은 온 우주의 성분들입니다.
    번개에는 자성이 없습니다. 스스로 번개일 수 있는.
  • 22-05-11 원정
    그래서 지금 여원님은 독립된 개체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요?
  • 22-05-11 여원
    우리도 번개와 다르지 않아요.
    번쩍 하고 나타난 어떤 현상에 불과합니다. 그 현상조차도 착각이죠.
  • 22-05-11 원정
    그래서 지금 여원님은 독립된 개체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요?
  • 22-05-11 여원
    그리고 병과 고통을 없애야 되는 것으로 보지 마세요.
    그런 시각이 문제입니다.
    병과 고통이 어떤 열매로 결과를 맺을 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병으로 인해서 더 건강해 질 수 있고요, 고통으로 인해서 강해질 수 있어요.
    이런 것은 나쁘다 혹은 저런 것은 좋다.
    그런 것은 없어요.
  • 22-05-11 원정
    제가 묻는 것은

    그래서 지금 여원님은 독립된 개체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요?
  • 22-05-11 여원
    원정님뿐 아니라 어떤 것도 개체는 있을 수 없습니다.
  • 22-05-11 여원
    제가 일요일 엄청난 댓글을 남겼습니다.
    그게 다 개체가 없다라는 소리였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사랑
    미움
    분별
    번뇌
    이런 것도 포함됩니다.
  • 22-05-11 원정
    그럼 여원님은 지금 개체로서 분별하는 마음이 없나요?
  • 22-05-11 여원
    제가 얼마전에 저를 두고 '여름날의 번개나 천둥 또는 벼락'과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나요?
    그 말을 지금도 똑같이 드립니다.
  • 22-05-11 원정
    그럼 여원님은 지금 개체로서 분별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냥 단순하게 말씀해 보세요.
  • 22-05-11 여원
    큰언니가 죽었을 때 봤어요. 육신은 베어진 나무토막이었어요.
    우리네 존재의 실상입니다.
    지금도 계속 세포가 교체되고 있어요.
    마음은 나왔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잠시 잠시 어떤 상태에 머무는 것입니다.
  • 22-05-11 원정
    제가 질문하는 것이 아렵나요?

    그럼 여원님은 지금 개체로서 분별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냥 단순하게 말씀해 보세요.
  • 22-05-11 여원
    그 상태또한 착각입니다.
    원정님께서
    맛도 없고
    냄새도 없고
    모양도 없다란 것이
    우리의 이런 상태같지 않나요?
  • 22-05-11 원정
    제가 질문하는 것이 아렵나요?

    그럼 여원님은 지금 개체로서 분별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냥 단순하게 말씀해 보세요.
  • 22-05-11 여원
    찰나찰나 상태를 기록하고 있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흘러가는 구름으로 봐주세요.
    그저.
  • 22-05-11 원정
    여원님 마음을 들여다 본 후에
    여원님은 지금 개체로서 분별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냥 'yes' or 'no'로 단순하게 말씀해 보세요.

  • 22-05-11 여원
    원정님,
    연기를 깨달으면
    개체가 있을 수 없어요.
    홀로 독립되어 존재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연기가 성립되지 않아요.
    착각들은 수없이 합니다.
    실상을 모를 때는요.
    그렇지만 실상을 깨닫는 순간 착각을 알아차립니다.

    착각은 분별이 아닙니다.
  • 22-05-11 여원
    연기와
    개체는
    양립할 수 없어요.
  • 22-05-11 원정
    다시 한 번 여쭈어 볼께요.

    여원님 마음을 들여다 본 후에
    여원님은 지금 개체로서 분별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냥 'yes' or 'no'로 단순하게 말씀해 보세요.
  • 22-05-11 여원
    연기가 아니든지
    개체이든지
    양자택일입니다.
    공존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 22-05-11 여원
    나는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반응할 뿐입니다.
  • 22-05-11 원정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여쭈어 볼께요.

    여원님 마음을 들여다 본 후에
    여원님은 지금 개체로서 분별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냥 'yes' or 'no'로 단순하게 말씀해 보세요.

    그냥 'yes' or 'no'로
  • 22-05-11 여원
    no
    입니다.
  • 22-05-11 여원
    억지로 질문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22-05-11 원정
    no라면,
    분별하는 마음이 없다면,
    지금 여원님은 어떻게 제가 원정인 걸 아시나요?
  • 22-05-11 여원
    내 책상
    내 컴퓨터
    내 가족
    내 집
    을 생각하면 보이지 않는 법칙과 연결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죽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한 순간 속절없이 죽고
    속절없이
    치매에 걸리고
    속절없이
    장애자가 됩니다.
    속절없이

    다들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들 속에서
    안일하게
    절벽끝에 매달려서
    떨어지는 꿀을 빨고 있을 뿐입니다.
  • 22-05-11 여원
    no라면,
    분별하는 마음이 없다면,
    지금 여원님은 어떻게 제가 원정인 걸 아시나요?
    ------------------------------------------
    원정님,
    우리집 개 허쉬는
    내가 주인인 것을 압니다.
  • 22-05-11 원정
    no라면,
    분별하는 마음이 없다면,
    지금 여원님은 어떻게 제가 원정인 걸 아시나요?

    솔직하게 답변해 보세요.
    그래야 여원님에게 도움이 됩니다.
    말이 길어지는 것은 에고의 장난입니다.
  • 22-05-11 여원
    봄에 새순을 돋는 식물들을 보세요.
    그냥 알아서 새잎을 내는 겁니다.
    그게 자연입니다.
  • 22-05-11 원정
    여원님 허쉬를 무시하지 마세요.
    허쉬도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요.

    다시 물을게요.
    no라면,
    분별하는 마음이 없다면,
    지금 여원님은 어떻게 제가 원정인 걸 아시나요?
  • 22-05-11 여원
    분별과 에고의 제거가
    연기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되나요?
    그걸 묻고 싶네요.
    연기만 깨달으면 되지, 분별과 에고의 제거가
    방해꾼으로 보입니다. 저는.
    깨달으면 사라지는 것을
    굳이 왜?
  • 22-05-11 원정
    솔직히 여원님께 실망입니다.
    여원님이 불이법(중도, 공)을 모르신다는사실이 아니라
    여원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실망입니다.
    솔직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여원님이 에고에게 속고 있는 것이지요.

    분별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사람입니다.
    불교에서 불이법은 '분별하는 마음'과 '분별하지 않는 마음' 둘을 다 포함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불이법이요, 그래서 연기법(대법)이요, 그래서 공인 것입니다.
    체험이 없고 생각으로만 이해하시고 계시니 여원님이 깨달으면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대화를 반복해서 읽어 보세요.
    지금은 불편하시겠지만, 오늘 대화는 제가 여원님께 드리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여원님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훤히 보일 것입니다.
    에고는 항상 이렇습니다.
  • 22-05-11 여원
    업이 있다고 하는 것과
    인과라고 하는 것과
    공과 연기는 같은 차원이 아니다.
    그와 같이
    에고와 분별도
    공과 연기와 같은 차원이 아니다.
    왜냐하면
    업도
    인과도
    에고도
    분별도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 22-05-11 여원
    같은 차원이 아닌 것을
    같은 차원에 있을 수 없을 것을
    같은 차원에 놓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우기는 것이다.
    같은 차원에 놓일 수 없는 일이다.
  • 22-05-11 원정
    지금 여원님은
    지금 에고의 춤을 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에고가 발버둥 치는 것이지요.
    슬적 에고의 본 모습이 드러났거든요.
    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 22-05-11 여원
    불이

    무아
    연기
    중도
    는 실상이며

    에고
    분별
    과보

    허상입니다.

    구별해 주세요.
  • 22-05-11 여원
    원정님께서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양립하시니까
    자꾸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작은 글의 세계니까
    아무 문제를 느끼지 못하지만,
    그렇게 하면 중국의 나비짓이
    미국의 태풍으로 되는 것이 연기법입니다.
  • 22-05-11 원정
    계속 에고가 춤을 추게 놔두세요.
    그 것도 좋아요.
    그 에고를 지켜볼 수 있으면 더 좋구요.
  • 22-05-11 여원
    실상과 허상을 둘다 있다라고 전제하고 시작하면 안됩니다.
  • 22-05-11 여원
    구름이 생겨났다가 구름이 사라지는 진다고 허공이 죽나요?
    살아있는 자의 생각은 구름과 같아요.
    마음은 그것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아요.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22-05-11 여원
    분별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사람입니다.
    불교에서 불이법은 '분별하는 마음'과 '분별하지 않는 마음' 둘을 다 포함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불이법이요, 그래서 연기법(대법)이요, 그래서 공인 것입니다.
    체험이 없고 생각으로만 이해하시고 계시니 여원님이 깨달으면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
    분별하는 마음이 어찌 마음인가요?
    마음은 본성입니다.
    분별은 티끌입니다.
    생겨나는 데 무심하고
    사라지는 데 무심하면
    생겼다가 사라집니다.
    그건 마음(본성)이 아닙니다.
  • 22-05-11 여원
    티끌을 두고
    불이를 들먹이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 22-05-11 원정
    분별하는 마음이 없으면
    여원님은 저를 알아 볼 수도 없고,
    집도 찾아갈 수 없고,
    .....
    살 수가 없어요.

    스승들이
    "분별하되 분별하지 않는다"
    는 말뜻이 여기에 있어요.
  • 22-05-11 여원
    분별하는 마음이 있어요.
    당연히.
    하지만 그게 마음은 아닙니다.
    본성은 말입니다.
    같은 차원이 아닙니다.
  • 22-05-11 여원
    육신이 내것이 아니라도 마음이 거하고 있고,
    분별이 마음이 아니라도 마음과 함께 있어요.
    함께 있되 집착하지 않는 게 중요해요.
  • 22-05-11 원정
    여원님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나요?
  • 22-05-11 여원
    집착하지 않으면 될 일을 문제를 만들기 위한 문제만들기입니다.
    문제를 만드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 22-05-11 원정
    '분별하지 않는 마음'과 '불별하는 마음'이 연기(대법)되어 있는 사실은 알고 있나요?
  • 22-05-11 여원
    분별하는 마음이 본성이라고 하던가요?
    그럼 그가 잘못되었어요.
    우리는 분별하는 마음을 가지되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본성)에 머물 수 있어요.
    분별하는 마음과 분별하지 않는 마음은 하상의 양면이지
    실상의 불이가 아닙니다.
  • 22-05-11 여원
    불이는
    중도의 다른 말입니다.
  • 22-05-11 원정
    여원님
    다시 물어볼게요.

    '분별하지 않는 마음'과 '불별하는 마음'이 연기(대법)되어 있는 사실은 알고 있나요?
  • 22-05-11 여원
    "분별하되 분별하지 않는다"

    분별회되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 22-05-11 원정
    여원님
    다시 물어볼게요.

    '분별하지 않는 마음'과 '불별하는 마음'이 연기(대법)되어 있는 사실은 알고 있나요?

    그냥 yes or no로 간명하게 답해보세요.
    여원님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 22-05-11 여원
    '분별하지 않는 마음'과 '불별하는 마음'이 연기(대법)되어 있는 사실은 알고 있나요?

    '분별하지 않는 마음'과 '분별하는 마음'
    즉 수식어가 붙은 것은 마음(본성)의 세계가 아닙니다.
    육신이 마음의 것입니까?
    그것과 같아요.

    물론 다 마음(본성)에서 나왔어요.
    하지만 마음(본성)을 분별하고 안하고와 다른 차원입니다.
    본성은 분별하지 않아요. 분별하면 연기할 수 없죠.
    분별이라는 자성(개체)이 없으니까 서로 연기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 22-05-11 원정
    여원님
    여원님은 yes or no로 답변하기 힘들지요.
    생각으로 답변하니까 그래요.
    에고가 항상 그래요.
    에고는 아는 척을 해야 하거든요.

    제가 뭐를 알겠어요.
    제가 여원님과 다른 게 하나가 있어요.
    저는 모르는 마음이 있어요.
    저는 솔직히 지금도 공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생생하게 체험하면서도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마음공부에 도움이 돼요.
    참 모를 일이에요.
  • 22-05-11 여원
    여원님
    다시 물어볼게요.

    '분별하지 않는 마음'과 '불별하는 마음'이 연기(대법)되어 있는 사실은 알고 있나요?

    그냥 yes or no로 간명하게 답해보세요.
    여원님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원정님,
    각각 독립되어 있는 것은 다른 것들이 필요없어요.
    그것만으로 독립적이까요.
    그래야 독립체이죠.

    연기의 차원에서는 각각 개체의 고집이 없어요.
    스스로를 고집하지 않으니까 서로 연기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연기의 차원에서
    분별하는 마음이라는 실체와
    분별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실체를
    억지로 연기시킬려고 하는 것은
    글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불법도 상식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게 아니예요.
  • 22-05-11 원정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여원님 정말로 수고하셨어요.
  • 22-05-11 여원
    분별하는 마음과
    분별하지 않는 마음은
    분별하는 마음의 실체와
    분별하지 않는 마음의 실체를 가지고 있어요.
    둘의 특징이 있기 때문에 연기될 수 없어요.

    마음(본성)의 차원에서는
    어떤 하나의 특징을 고집하지 않아요.
    그래서 연기로서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 22-05-11 여원
    원정님은 모르는 마음이 있군요.
    저는 특정한 마음이 없어요.
  • 22-05-11 원정
    여원님
    '분별하는 마음'이 있으니
    '분별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는 거에요.
    여원님이 여원님이라는 개체로서 분별될 수 있는 있는 것은 '여원님 이외의 모든 것들'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구요.
    '하늘'은 '하늘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이 있어서 하늘로서 분별될 수 있는 것이에요.
    그게 대승불교의 연기법(대법)이에요.
    고저, 장단, 크다 작다, .....
  • 22-05-11 여원
    업과 업보
    인과 과
    분별
    .... 이런 것들은 구름이다.
    본성은 허공이다.

    구름은 생겼다가 사라진다.
    허공은 그대로다.

    구름이 생겨나는 것을 두고(분별하는 마음)
    구름이 사라지는 것을 두고(분별하지 않는 마음)
    허공과 연기되어 있다고 우기지 마시라.

    허공은 아무것도 모른다.
    느끼지도 못한다.
    왔는지도 모르고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 22-05-11 여원
    여원님
    '분별하는 마음'이 있으니
    '분별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는 거에요.
    여원님이 여원님이라는 개체로서 분별될 수 있는 있는 것은 '여원님 이외의 모든 것들'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구요.
    '하늘'은 '하늘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이 있어서 하늘로서 분별될 수 있는 것이에요.
    그게 대승불교의 연기법(대법)이에요.
    고저, 장단, 크다 작다, .....
    =============================================
    대승불교의 연기법은 공입니다. 개체가 텅 비어 있어요.
  • 22-05-11 여원
    텅 비어 있기에 무엇이든 들어갈 수가 있어요. 원정님처럼 있다/없다, 높다/낮다....는 '있다(有)'의 세계입니다.
    공의 세계가 아닙니다.
    중도라는 것이 있다와 없다가 공존하는 게 중도가 아닙니다. 공이라는 말입니다. 연기라는 말입니다. 무아라는 말입니다. 중도의 뜻은.
  • 22-05-11 여원
    무아입니다.
    연기는.
  • 22-05-11 여원
    하늘이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이 우리는 하늘과 탯줄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러니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는 '연기'이지요.
  • 22-05-11 원정
    이 글에 더 이상 답글은 달지 않을게요.
    시간 날 때마다 여원님이 쓰신 댓글을 읽어 보세요.
    수고하셨습니다.^^
  • 22-05-11 여원
    불교에 대한 글은 이것으로 마감합니다.
  • 22-05-11 여원
    '여원이라는 개체의 분별'
    이런 것은 '유/있다'의 차원이 아닌가.
    있다/없다
    의 차원입니다.
    난 공의 차원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구별해 주세요.
  • 22-05-11 여원
    공의 차원인데
    무슨 기준을 두고
    구분을 할 수 있습니까?


    분별
    분별없음
    .....
  • 22-05-11 여원
    혼자서 불교공부는 계속됩니다. 내친김에 제 페이스북에는 계속 불교글을 쓸 것입니다. 혹시라도 인연되는 도반이 있으면 같이 공부하는 꿈을 포기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게 연기법이니까요. 나혼자 사는 법이 연기법은 아니죠.
    불교이외의 글들이 있으면 올리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23-11-15 여원
    초기경전 어디를 찾아봐도
    앞으로 발견될지는 몰라도
    유위법
    무위법
    이라는
    표현은 없다.

    유의
    무위

    표현을
    붓다가 하신 적은 있어도.

    유위법
    무위법
    이라는 표현은
    아비달마의 논설이다.
    역시.

    붓다 사후 300년 후쯤 되자
    붓다의 법을 이해할 수 없는
    수행자들이 많아
    아비달마의 논설이
    필요한 시절인연이었다.
    뭐 아쇼카왕의 불교에 대한 막대한 지원으로
    배가 부르니 할 일 없어
    논설이나 적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유위법 말고
    무위법

    절대적인 이데아
    가 있다는
    생각은
    그 동안의 모든 철학과 종교와
    과학이 추구해 온 발자취다.
    요즘에는
    양자역학으로
    깨지고 있지만.

    붓다는
    양자역학보다 먼저
    그 어떤 것도 셀프가 없다는 것을
    보신 것이다.

    드러날 참나가 조건이 되어
    얼굴을 보이는 것이다.'라는
    그 허무맹랑한 절대적인 객관이
    없다는 것을
    보셨다는 거다.
    즉, 없던 뭔가가 조건에 의해 존재가 되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업보에 맞게 발현할 뿐이다.

    셀프가 없다는 것을 보는 것이 견도
    셀프가 드러나는 것에 속지 않는 것이 수도
    그 다음은
    발원과 서원을 해서
    주체적인 세상을 만들어 가라고
    가르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