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을 대하는 태도
지금 모닥불 위에 타오르는 불꽃이 있다.
그 생생한 불꽃 중 한 장면을 순간적으로 촬영한 사진이 경전이다.
그 사진을 통하여 불꽃을 상상해 볼 수는 있지만 그 사진은 살아있는 불꽃은 아니다.
‘이것’도 그렇다.
‘이것’의 한 장면을 깨어난 자들이 촬영해 보니,
누군가는 ‘이것’을 ‘공’이라 칭하였고,
누군가는 ‘이것’을 ‘참나’라고 칭하였고,
누군가는 ‘이것’을 ‘중도’라 칭하였고,
누군가는 ‘이것’을 ‘신’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공’이 ‘이것’은 아니고,
‘참나’가 ‘이것’은 아니고,
‘중도’가 ‘이것’은 아니고,
‘신’은 ‘이것’이 아니다.
뭐라 칭할 수 없는 것을 각자 최선을 다하여 방편(거짓)으로 칭한 것일 뿐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과’의 ‘사진’을 백날 보아도
‘사과’의 ‘참맛’을 알 수는 없다.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진정으로 그 맛을 알 수 있다.
그때야 만이 사과의 맛을 알 수 있다.
경전에 대한 이해도 그렇다.
생각(이해)은 이렇다.
우리는 ‘어린왕자’를 10대에도 이해할 수 있고,
20대에도 이해할 수 있다.
각자 인생을 체험한 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
신(神)도 그렇다.
각자 인생을 체험한 만큼 이해할 수 있다.
체험하지 아니하고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경전을 읽는다고 해도.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이것’에 대하여 실제로 아는 것이 없으므로.
그래서 그럴듯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거나 경전을 들이댈 수밖에 없다.
그 경전도 자기 체험 수준에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가 경전을 통하여 깨달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석가모니나 예수가 재림을 한다고 해도. 오히려 자신의 깨달음을 유지하기 위해 석가모니나 예수를 죽일 것이다.
경전을 대하는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나온 모든 경전들은 진실이 아니고, 방편(거짓)이라는 사실을.
내가 생각하기에 경전은 깨달은 사람에게 정말로 필요하다.
깨닫고 난 이후에 나의 체험이 선지식들의 체험과 같은지 확인하는 용도로 필요해 보인다.
그 전에 경전을 통하여 나름대로 생각으로 이해를 하게 되면 깨달음과는 더 거리가 멀어질 수도 있다. 자신이 깨달은 자라는 분별심만을 더욱 커지므로. 그 이해가 자신의 인생에서 경험한 것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일진대.
깨달음의 핵심은 분별심에서 벗어나는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