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을 대하는 태도10

22-05-08 원정 73

경전을 대하는 태도

 

지금 모닥불 위에 타오르는 불꽃이 있다.

그 생생한 불꽃 중 한 장면을 순간적으로 촬영한 사진이 경전이다.

그 사진을 통하여 불꽃을 상상해 볼 수는 있지만 그 사진은 살아있는 불꽃은 아니다.

 

‘이것’도 그렇다.

‘이것’의 한 장면을 깨어난 자들이 촬영해 보니,

누군가는 ‘이것’을 ‘공’이라 칭하였고,

누군가는 ‘이것’을 ‘참나’라고 칭하였고,

누군가는 ‘이것’을 ‘중도’라 칭하였고,

누군가는 ‘이것’을 ‘신’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공’이 ‘이것’은 아니고,

‘참나’가 ‘이것’은 아니고,

‘중도’가 ‘이것’은 아니고,

‘신’은 ‘이것’이 아니다.

뭐라 칭할 수 없는 것을 각자 최선을 다하여 방편(거짓)으로 칭한 것일 뿐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과’의 ‘사진’을 백날 보아도

‘사과’의 ‘참맛’을 알 수는 없다.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진정으로 그 맛을 알 수 있다.

그때야 만이 사과의 맛을 알 수 있다.

경전에 대한 이해도 그렇다.

 

생각(이해)은 이렇다.

우리는 ‘어린왕자’를 10대에도 이해할 수 있고,

20대에도 이해할 수 있다.

각자 인생을 체험한 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

신(神)도 그렇다.

각자 인생을 체험한 만큼 이해할 수 있다.

‘이것’도 그렇다.

체험하지 아니하고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경전을 읽는다고 해도.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이것’에 대하여 실제로 아는 것이 없으므로.

그래서 그럴듯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거나 경전을 들이댈 수밖에 없다.

그 경전도 자기 체험 수준에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가 경전을 통하여 깨달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석가모니나 예수가 재림을 한다고 해도. 오히려 자신의 깨달음을 유지하기 위해 석가모니나 예수를 죽일 것이다.

 

경전을 대하는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나온 모든 경전들은 진실이 아니고, 방편(거짓)이라는 사실을.

 

내가 생각하기에 경전은 깨달은 사람에게 정말로 필요하다.

깨닫고 난 이후에 나의 체험이 선지식들의 체험과 같은지 확인하는 용도로 필요해 보인다.

그 전에 경전을 통하여 나름대로 생각으로 이해를 하게 되면 깨달음과는 더 거리가 멀어질 수도 있다. 자신이 깨달은 자라는 분별심만을 더욱 커지므로. 그 이해가 자신의 인생에서 경험한 것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일진대.

깨달음의 핵심은 분별심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 22-05-09 여원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 스스로 저술하신 경전이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다 사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우리나라 조계종의 소이경전인 금강경도 6조 혜능스님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부처님 당시와 가장 가까운 경전은 숫타니파아타 그 다음이 아함경인데, 그보다 더 가까운 것이 경전형태가 아닌 율장이 있다.
    그렇게 본다면 불교의 팔만사천 경전은 모두 수행자들과 스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말과 본뜻을 수행자들 스스로의 깨달음에 기초한 소통의 기록이다. 물론 경전의 뒤안길에서는 탐욕만족을 위한 해석들이 경전의 지위를 획득했다가 박탈되기를 무수히 반복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것은 쉬지 않고 진행 중이며, 불교의 경전은 끝없이 숫자를 추가해 갈 것이다.

    경전의 역할이란 ‘내가 궁극적인 어떤 자유를 향해 가는데, 당신들은 어떤가?’하면서 소통하는 도반이며 스승이다. 그중 어둠을 밝혀주는 것이 있다면 가져다 쓰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일시적으로 왔다가 사라지는 것 말고, 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것들은 살아남아 경전의 무한창고가 된다. 우리는 그 창고를 무한정 무료로 꺼내다 쓸 수 있는 행운아들이다.

    경전이나 고전이나 궁극적으로는 해석의 역사일 수밖에 없고, 그것도 결국에는 나에 의해서 취사선택되는 것이고 진품으로 받아들여지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과 장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닌 모두 다 통해서 막힘이 없는 경전일 것이다. ‘경’이라는 높은 지위를 획득한 것들도 사실 역할은 강을 건너서 저 언덕으로 가기 위한 뗏목에 불과하다.

    부처님 사후 500년 후부터인 비교적 초기경전들은 주로 ‘有’에 방점이 찍혀 있고, 1000년 이후 대승경전들은 ‘空’에 방점이 찍혀 있다. 소승불교국가에 가서 불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들은 ‘12연기와 사성제’가 불교라고 하고, 대승불교국가에 가서 불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空사상’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 불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신을 섬기고 고행과 선정주의에 집착했던 브라만교의 형태를 띠면서 불교의 특징들을 잃어갔다. 자본주의 속의 현대불교는 그 증상이 더욱 심각해져 거의 기업의 형태로 진화해 간다고 할 수 있다.

    예수이후의 기독교에서 십일조를 비롯한 예수가 배격한 구약의 형태가 여전히 남아 중심축을 이루듯이 불교도 수입구조를 원활하게 하는 천도재와 업장소멸 그리고 여러 가지 기도와 불사를 장려하고 있는 처참한 구조이다.
    절대자인 신을 신앙하는 religion(신앙은 종교가 아니기에 그냥 religion이라 함)은 교단과 교리에 규칙이 있다. 하지만 Religion이 아닌 유일한 종교불교(불교만이 종교: 스스로 깨닫는 것이지 절대자를 신앙하는 게 아님)는 그 핵심에 도달하는 데 있어 규칙 같은 것이 없다. 무한정하게 자유롭다. 다만 도통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수단과 방법에는 태클을 걸지 않는다.
    다만, 자유를 주는 대신 도달지점에서는 ‘도장(印)’을 받아야 한다. 그 도장을 받아야 만이 불교의 핵심에 도달했는지 아니면 절대자인 신을 신앙하는 religion에 도달했는지가 가려진다. 그것이 ‘삼법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매우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고, 불교의 핵심은 무엇인가. 경전을 축으로 찾아보면 ‘중도(연기=무아=공)’가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 대승불교인 공과 초기경전인 숫타니파아타와 아함경의 유와 그리고 그 이전의 율장을 꿰뚫는 것은 오직 하나 ‘중도(연기=무아=공)’인 것이다.
    그래서 불교가 노는 마당에 무한정 자유를 부여하되 그것에 ‘중도(연기=무아=공)’가 있으면 불교가 되고, ‘중도(연기=무아=공)’가 빠져 있으면 외도가 되는 것으로 하였다. 외도의 길을 가면 늪에 빠지고, 정도의 길을 가면 해탈의 길로 가기 때문에 점검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가는 길이 곧 생사의 길이기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럼 외도란 무엇인가.
    왜 외도를 경계하면서 하지 말하고 했던 것인가.
    하긴 외도를 하든지 불교를 하든지 그것도 자유라고 하면 그 자유를 누리면 될 것이다.
    하지만 석가모니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이가 아니던가.
    외도를 하면 시간낭비만 할 뿐 결국에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애초에 그 길을 가는 것을 되도록 하지 말라고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 늪에 빠지면 스스로 빠져 나올 수도 없지만, 누군가 꺼내 줄려고 해도 꺼내줄 수가 없는 깊은 곳으로만 빠지기 때문이다.

    딱 봐도 표시 나는 외도는 제쳐두고, 불교의 깨달음과 유사한 외도에 대해서 말해보자.
    외도의 길을 가는 이들은 불교의 깨달음의 경지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고요한 어떤 자리라고 상상하거나 혹은 마법사나 신처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 두 가지는 고행주의와 선정주의다.

    고행주의는 극단적인 고행을 하다보면 일반적인 괴로움이나 고통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경지가 된다. 그러면 그는 자신이 세상의 고통과 번뇌를 초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초탈은 다람쥐쳇바퀴 속에서 초탈인 것이다. 고행이라는 행위가 사라지면 초탈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선정주의의 방식은 마음의 장난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수만 가지 마음에서 발생하는 것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머물다보면 마치 아무것도 없는 그 자리가 깨달음의 경지라고 여겨서 자신이 깨달았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궁극적인 깨달음인 ‘중도(연기=무아=공)’의 세계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이 있다. 하지만 중도의 말 그대로 ‘중도(연기=무아=공)’로 있거나 없거나 또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헷갈리는 방법보다는 확실하게 아무것도 없어 고요한 그 자리를 취사선택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선정의 방법도 고행과 다를 바 없다. 선정상태에 접어들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끊어져버린 상태에 거할 수 없고, 마치 발전기를 가동하듯이 선정을 돌려야 만이 맛보기를 할 수 있다. 선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와 이후로 수많은 스승들은 철저하게 외도를 금지하셨다. 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해오(解悟)의 길과 증오(證悟)의 길이 있다. 해오는 외도의 방법을 동원하여 인위적인 깨달음을 맛보는 것이고, 증오는 ‘중도(연기=무아=공)’라는 본성을 따라가는 자연적인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해야만 초탈이 되는 외도의 방법들은 모두 해오의 길이다. 절대로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으면 얻어지지가 않는다. 반면에 정도인 증오(중도=연기=무아=공)의 길은 자연이다. 본래 있는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뿐 어떤 인위적인 방법도 동원하지 않는다.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불법 또한 만나기 어려운 일이다.
    이 몸을 금생에 건지지 않으면
    다시 그 어느 생을 기다려 건질 것인가.

    불교의 정법도장은 ‘중도(연기=무아=공)’에 찍힌다. ‘중도(연기=무아=공)’가 유일한 경전의 가르침이다.
  • 22-05-09 원정
    '이것'은 생각으로 분별하기 이전의 것입니다.
    그런데 경전은 분별된 문자로 기재되어 있지요.

    경전을 보면, '이것은 이거다'라고 명확히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아니하고,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라고 부인하는 방식으로 기재되어 있잖아요.

    이 점을 여원님이 이해해야 해요.

    사과 사진을 가지고 이리저리 연결해 생각해 봐야 사과맛을 알 수는 없어요.
    경전을 공부한다고 하여 고통이 해소되지는 않아요.
    분별심이 사라져야 고통은 비로소 해소됩니다.
  • 22-05-09 원정
    "그런 측면에서 선정의 방법도 고행과 다를 바 없다. 선정상태에 접어들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끊어져버린 상태에 거할 수 없고, 마치 발전기를 가동하듯이 선정을 돌려야 만이 맛보기를 할 수 있다. 선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와 이후로 수많은 스승들은 철저하게 외도를 금지하셨다. 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거는 여원님이 아무 것도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런 글은 여원님이 죄를 짓는 일입니다.

    석가모니나 선지식들이 금하는 것은 유의적인 수행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의적인 수행을 통해 선정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선정은 유의적 수행을 멈추면 다시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선정은 마약과 같지요.

    그러나 분별심이 쉴 때 '저절로 드러나는 선정'이 있습니다.
    이런 선정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데, 분별심이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선정은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일행삼매, 일상삼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판을 두드리는 이 순간도 선정상태인 것입니다.
  • 22-05-09 원정
    여원님은 "생각(분별심)은 아는 것이 없다." "생각(분별심)은 진실됨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깨어난 자들은 이 것을 진심으로 아는 자들입니다.
    지금 여원님은 '생각(분별심)'을 마구 들이대고 있는 중입니다.
  • 22-05-10 여원
    선방에서 일어나는 부질없는 일은 ‘생각을 막는 것’이다.
    왜 생각을 그들은 그토록 목숨 걸고 막으려고 할까?
    그것은 간단하다. 그들의 스승으로부터 선정에 들려면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차단하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참으로 황당한 사건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따라서 할 뿐이다. 마치 약장수가 이것 먹으면 만병통치된다는 논리와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세상에 만병통치약은 없다.

    큰언니는 폐암으로 만51세 때 돌아가셨다. 동네에서 인물이 났다고 할 만큼 큰언니는 미인이었다. 나는 외모적인 면에서 그런 큰언니의 그늘에 가려진 돌멩이와 다를 게 없었다. 잔재주가 많았던 점이 인정받는 측면도 있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큰언니의 빛나는 외모와 나의 잔재주를 같은 급으로 절대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큰언니는 나의 노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외모의 성안에서 추앙을 받았다.

    큰언니는 폐암선고를 받은 후부터 점차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고통이 극심해질수록 몸의 아름다움이 빛을 잃어갔다. 큰언니는 암 선고 후 6개월이 되는 시점에 저 세상으로 돌아갔다. 나는 큰언니가 눈을 감았을 때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아름답던 큰언니의 육신은 나무토막과 다를 바 없었다. 몸이라는 것에 대한 적나라한 실체를 체험한 것이다. 마음이 빠져나간 몸은 베어진 나무토막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이 떠난 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몸을 마음이 만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목격한 일은 내내 마음에 대해 살피는 계기가 되었다.

    살아있는 사람은 마음을 멈출 수 없다. 그건 마치 몸이 숨쉬기를 멈추고, 피가 흐르는 것을 멈추고, 위장이 소화를 멈추는 것과 같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영역이다. 이를진데 사람들은 참으로 황당한 발상을 하여 마음을 멈출 수가 있다고 여긴다.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일어난다고 믿는 것은 망상이다. 분별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은 생각에서 나왔고, 그 생각은 마음에서 나왔다. 생각을 쉬어라고 하거나 멈추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멈추라는 것인데 거기까지는 망상이 연결되지 않는 희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음을 멈추는 순간은 오로지 죽은 순간밖에 없는 데 말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절대로 마음을 멈출 수 없다.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대로 마음을 멈출 수가 있겠는가. 다만 멈출 수 있는 것은 마음에 깃든 ‘탐욕심’이다. 마음을 멈추라는 것이 아니라 ‘탐욕심’을 멈추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마음은 늘 바쁘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은 ‘탐욕심’을 멈추면 그만이다. 그게 수행이다.

    ‘탐욕심’을 멈출 수 있는 이가 바로 수행자며 깨달음의 자리에 머무는 자다. 멈춰선 그 자리는 성취가 정체된 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성취를 발견하는 자리다. 일체 삼라만상이 숨 쉬는 바로 그 자리다. 생각이 나면 나는 대로 하되 마음의 ‘탐욕심’만 내려놓으면 그게 선정이며 '바로 지금 여기 이순간'에 머무는 것이다.
  • 22-05-10 원정
    생각을 막으면 죽어요.

    많은 스승들이 분별하되 분별하지 않는 자리가 있다고 하잖아요.
    여원님은 그 자리가 궁금하지 않나요?
  • 22-05-10 여원
    대원성취진언(大願成就眞言)
    옴 아모카 살바다라 사다야 시베 훔

    불교에서 가장 큰 ‘願’을 성취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깨달은 후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다.
    그럼 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흔히 사람들은 깨달음이라는 것을 가져와서 고통을 멸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깨달음이란 게 있으면 ‘탐, 진. 치’를 없애서 해탈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어디 있으며, 어떻게 가져올 수 있는 것일까? 깨달음은 어떤 특정한 자리에 나와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늘 나와 함께 있고 한 번도 나와 분리된 적이 없다. 다만 맑은 하늘이 잠시 구름에 가려졌을 뿐이다.

    이때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구름이 흘러가버리면 되는 일이다. 그와 같이 ‘탐, 진, 치’를 흘러 보내 버리면 깨달음은 홀연히 드러난다. 그러니까 내 마음 속에 있는 ‘탐, 진, 치’를 비워버리면 본래의 모습이 ‘짠’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탐, 진. 치’와 ‘걱정, 근심’은 해탈과 별도의 장소에 있는 게 아니라 가려져 있는 것들이 자리만 비우면 바로 그 자리에 있다.

    종소리가 멀리까지 울리는 것은
    종의 속이 비어있기 때문이고,

    거울이 세상의 모습을 다 담을 수 있을 것은
    거울의 겉이 맑기 때문이고,

    또한 강물이 넓은 바다로 흐르는 것은
    바다가 낮고 넓기 때문이고,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은
    바람에 형체가 없기 때문이다.
  • 22-05-10 원정
    불가에 '견성'이 왜 있겠어요.
    그게 생각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성'은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생생하게 존재해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 22-05-10 여원
    관념적인 제가 원정님께 늘 배웁니다.
    생생한 그 세상.
    안에서 큰소리 뻥뻥 치다가 밖에 나가면 맨날 얻어 터집니다,
    말과 글로써는 우주의 웜홀도 통과 못하겠습니까?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마당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 22-05-11 여원
    본성(마음)이란 무엇인가? 에 대하여

    불교는 心法이라 하고, 도통해서 하는 말이 ‘一切唯心造’라고 말한다. 그럼 대체 본성(마음)은 무엇인가.

    깨달음을 얻는 것이 공, 연기, 무아, 중도를 본 것이라고 하면 그런가하면서도 그것을 아는 본성(마음)은 별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완전히 헷갈려하는 현상이다. 그렇게 갈팡질팡하는 이유는 ‘본성(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본성(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아무런 감정이 없고, 멍만 때리는 존재라고 표현하니까, 실지로 그런 본성(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본성(마음)은 아무런 감정이 없다든지, 본성은 아무런 색깔도 맛도 없다 등으로 말하면서 본성(마음)의 신성을 피력하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본성(마음)은 어떤 수식어로도 표현될 수가 없는 것이니까. 그것은 한 번도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본성(마음)을 가린 것들을 다 제거하고 본성(마음)과 만난다는 것은 선이다.
    사마타는 나의 외부요인이 나에게 걸림을 주는 것에 몰입(삼매)하여 그 정체를 깨부수고 나의 본성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위빠사나는 회광반조다. 내부의 걸림에 몰입(삼매)하여 분별과 번뇌를 파헤쳐 부셔버린 후 본성과 만나는 것이다.
    외부요인이 인연에 의해서 생긴 것을 걷어내고 고요해지는 사마타나 나 자신을 돌이켜서 걸림을 뿌셔버리는 위빠사나나 결국 본성(마음)을 가린 것들을 걷어내고자 하는 명상에서는 같은데, 본성(마음)이 뭔지를 모르면 걷어내어 본들 다 도루묵이다. 헛것을 보고서도 본성(마음)이라고 착각한다면 견성하였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승들은 ‘선’은 깨달은 후에 숙성시키는 용도로 선을 사용하는 것이 알맞다고 하였다. 본성(마음)의 정체를 알고 나서 걸림을 제거할 때 선을 써먹어라는 것이다. 물론 단박에 본성(마음)을 알면 선이든 교이든 그 무엇이든 아무 상관없다.
    (화두 선은 선으로 가장한 도교이지 불교의 방식이 아니다.)

    그러면 그 본성(마음)은 누구의 마음이냐? 누구의 마음이며 어디에 있는 것이냐?
    그것은 깨달음이냐? 깨달음을 얻는 존재냐?
    여기에서 또 사람들은 헷갈려하는 것 같다.
    깨달음과 깨달음을 얻는 존재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공=연기=무아=중도=본성(마음)’을 한 몸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해결되었다. ‘공=연기=무아=중도’가 따로 있고, 그것을 깨닫는 것은 본성(마음)이 아니라 본성(마음)이 곧 ‘공=연기=무아=중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속성만 알면 나머지는 한 몸들이니까 다 알게 되는 것이다.
    색깔이 없느니 사심이 없느니 모양이 없느니…, 하는 말들을 개뿔이다. 물론 본성(마음)은 그러하다. 하지만 그게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 ‘공=연기=무아=중도=본성(마음)’라는 공식을 만들어 버리면 깨닫는 대상과 깨닫는 자가 분리되지 않는다.

    공하다고 하면 그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모든 것이 들어 있지 않다. 반대로 모든 것이 들어 있지 않고,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즉 유도 없고, 무도 없고, …해도 맞고, 그 반대로 말해도 맞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과 본성을 분리하여 생각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본성(마음)의 상에 벗어난다고 우를 범하게 된다. 깨달음(공)과 깨닫는 본성(마음)이 각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생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는 데, 부처의 눈에는 중생도 부처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중생의 눈으로 보니까 ‘완벽한 본성(마음)’의 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부처의 눈으로 보면 본성(마음)도 안보이고, 중생(마음)도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보인다는 것이 바로 중생(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본성(마음)은 공이다.
    본성(마음)은 연기다.
    본성(마음)은 무아다.
    본성(마음)은 중도다.
    공은 본성(마음)이다.
    연기는 본성(마음)이다.
    무아는 본성(마음)이다.
    중도는 본성(마음)이다.

    본성(마음)을 봤다는 것(견성)은 성불을 한 것이다.
    견성과 성불은 똑같은 말이다.
    그럼 무엇을 봤다는 것인가?
    공을 보았다는 것이며,
    연기를 보았다는 것이며,
    무아를 보았다는 것이며,
    중도를 보았다는 것이며,
    본성(마음)을 보았다는 것이다.

    완벽한 본성(마음)의 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유위법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본성(마음)의 부처가 보이고 그것을 보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초기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즉, 본성(마음)을 찾는 것은 진흙 속에 덮인 것을 벗겨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중생의 마음이 곧 본성이고, 본성이 곧 중생의 마음이라고 했다.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치를 알고 도를 닦으면 힘을 적게 들이고도 깨달음을 얻는데, 마음이라는 근원의 이치를 모르고 도를 닦으면 평생을 노력해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하였다. 그 중 가장 헷갈리게 하는 것이 깨달음과 깨달는 본성(마음)이 따로 있다는 착각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