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중도-분별에서 벗어남13

22-04-18 원정 72

불이중도-분별에서 벗어남

 

우리에게는 분별에서 벗어난 살아있는 마음(의식)이 있다.

그 자리에 계합하는 체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전까지는 분별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다.

깨닫기 전의 이해는 모두 오해이다.

병은 취사간택에 있고, 그 병에서 벗어나는 것은 분별에서 벗어나는데 있다.

번뇌 망상은 분별 속에 있다.

 

그 자리는 분별되지 않는 자리이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다만, 방편으로 자성, 참나, 본성, 하느님, 부처 등등 이름을 붙일 뿐이다.

 

지혜로서 번뇌를 비추어 부순다고 하면 그 것은 분별이다.

지혜다, 자성이다, 불성이다, 본성이다, 깨달음이다 하고 이런 분별을 내면 망상이다.

이 자리는 이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끊어짐이 없이 뭔가를 붙잡고 있다는 생각도 분별이고,

중생심을 버리고 부처의 마음을 구하는 것도 분별이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혜를 구하는 것도 분별이고

어둠을 버리고 밝음을 구하는 것도 분별이고

망상을 버리고 실상을 구하는 것도 분별이고,

깨달음은 그런 분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색을 놓고 공이라고 깨달았다고 해도 분별이다.

색이니 공이니 하는 것은 방편으로 세운 이름이다.

색이 따로 있고, 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색을 잘 관해서 공인 줄 알았다고 해도 망상이다.

색이니 공이니 하는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 공부다.

그러면 비로소 진짜 지혜가 나온다.

 

이 자리는 중생, 부처의 분별이 없다.

고요함과 시끄러움의 분별이 없다.

공이라는 것도 분별이고, 부처라고 해도 분별이며,

깨달음이라고 해도 분별이다.

공, 부처, 깨달음은 방편으로 말하는 것이지, 그게 그렇게 실재한다고 분별을 하는 한 그 또한 망상이다.

 

여여하다 또는 밝다는 말도 방편이다. 이를 사실로 여기면 안 된다.

밝음을 구하고 여여함을 구하는 자체가 분별이다.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자는 생각도 또 하나의 분별이다.

어떤 것이다 하고 생각하면 모두 분별이다.

그 자리에 통해야 하는데, 통한다는 말도 방편으로 하는 말이다.

 

어떠한 분별도 없는 것을 방편으로 반야라고 하는 것인데, 반야라는 것도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분별이다. 금강경에서 어떠한 모습으로도 여래를 볼 수 없다, 즉 어떠한 모습으로도 분별해 버리면 그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분별이 없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생각도 분별이다. 이게 ‘분별없음을 가지고 여래를 보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분별이 있다거나 없다는 것도 모두 방편의 말이다.

 

뭔가가 있기만 하면 모두 분별이다.

분별을 벗어나면 법이라고 할 것도 없고, 깨달음이라고 할 것도 없다.

다 방편이다.

 

번뇌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은 이름이 있을 뿐이요, 실제로는 둘이 아니고 다름이 없으며, 실제로는 분별할 수 없다.

 

생과 멸도 분별이다. 생과 멸을 상대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생과 멸도 방편이다. 생의 반대가 불생이라는 것, 멸의 반대가 불멸이라는 것은 분별이다.

생이 없는데 어떻게 불생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밝다거나 밝지 않다는 것도 분별이다. 분별하지 않아도 햇볕에 내리쬐는 곳은 밝고, 그늘은 어둡지 않으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늘이 스스로 어둡다고 말하지 않고, 햇볕이 스스로 밝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 분별할 뿐이다. 하늘이(땅이) 스스로 하늘이라(땅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분별하여 따로 있는 것처럼 말한다. 자기 스스로가 분별해 놓고, 원래 그런 것이 있다고 착각한다.

 

밝다거나 밝지 않다는 분별하는 마음 자체는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다. 그래서 자성(본성)이라고 방편으로 말하지만 그 것도 붙잡고 있으면 안 된다. 그 것은 또 하나의 분별을 만드는 것이므로. 자성(본성)이라는 뭔가가 있어서 본다고 하면 그게 바로 분별이다. 자성(본성)은 분별되지 않는 것이므로, 굳이 자성(본성)이라고 이름 붙일 필요도 없다. 방편의 이름이고 버려야 할 것이다. 이 자리는 분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생불멸 자체가 방편의 말이다. 불생불멸인 뭔가가 있다고 하면 그 것도 분별이다. 진여도 방편의 말이다. 여여부동하고 진여불성인 진여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 또한 분별이다. 번뇌로부터 해탈한다거나 고요한 선정으로 들어간다는 말도 모두 분별이다.


말과 문자로 표현된 모든 것은 분별이다.

 

여기에는 어떤 방법도 없다.

이렇게 하면 될 것이다, 저렇게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도 정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분별을 극복해야 하는데 자꾸만 분별 쪽으로만 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그 자리를 체험하는 방법밖에 없다.

 

방편의 말이라는 것은 항상 부작용이 있다.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듯이, 분별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위하여 분별에서 벗어나는 방편의 말을 약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그 분별(방편)의 말에 사로잡혀 다시 분별하면 분별에 빠지는 부작용이 있다. 분별되는 말을 가지고 투약하다 보니까 그 말을 또 분별해 버리게 되는 부작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방편의 말은 모두 헛소리이다. 경전은 중생의 분별심을 부수기 위한 방편의 말이다. 외도가 내 마음은 불생이고 불멸이라고 말한다면, 부처는 ‘무슨 말이냐 마음은 생기고 사라지지’ 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 불생불멸이라는 망상하는 사람에게는 생멸이라는 약을 쓰고, 생멸이라고 망상하는 사람에게는 불생불멸이라는 약을 쓸 뿐이다. 이게 방편이다. 방편은 진실의 말이 아니다.

 

이 자리는(이 것은) 버릴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고,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알 수도 없고, 모를 수도 없다. 얻는 것도 아니고 잃는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 자리는 편안함이나 불편함과 관계없다. 그 자리는 망상도, 지혜도 없고, 실상과 허상도 없고, 번뇌도 보리도 없으며, 색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공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도를 방해하는 장애물은 도를 구하는(분별하는) 그놈이다.

깨달음을 기다리는 자에게는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

수행은 항상 뭔가 대상을 놓고 추구하는 것이다. 모두 분별이다. 분별하는 것은 모두 오염된 것이다.

 

중생의 문제는 망상심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분별하는 분별심이 문제이다.

그 자리는 내 마음 네 마음이 없다. 안팎이 따로 없기에. 그렇게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망상이다.

분별심을 조복시키는 것이, 불이중도에 계합하는 깨달음이다.

분별심이 극복된(조복된) 마음이 우리 마음의 실상이다.

 

우리에게는 분별에서 벗어난 살아있는 마음(의식)이 있다.

그 자리를 계합하는 체험을 하면 그 때서야 분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참고

이 글은 무심선원 김태완 선원장님의 육조단경 강의를 듣고 내 마음대로 정리한 글입니다.

불이중도에 대하여서는 이 분이 가장 잘 설명하시는 것 같아요.

 

 

  • 22-04-19 여원
    無念無想
    이라는 현상이 있고, 그대로 고정되어 있다 합시다.
    그건 법이 아닙니다.
    흘러가는 것이 법이기 때문입니다.
    無念無想에 대한 환상은 환상일 뿐입니다.

    무념무상이라는 것
    분별이라는 것
    …
    다시 말하면 고정되어 있는 것(사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법은 흘러갑니다.
    그러니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자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분별에 자성이 없고,
    에고에 자성이 없고,
    생각에 자성이 없고,
    무념무상에 자성이 없고,
    …
    그러하면
    그 자리가 바로 ‘보리’입니다.

    ‘중도’또한 여러 가지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자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쪽 자성도 없고, 저쪽 자성도 없고,
    둘 다 아우르는 자성도 없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분별, 에고, 생각이다’라고 하는 순간 ‘분별과 에고와 생각’은 탄생하며
    자성을 가지게 됩니다.
    번뇌 즉 보리
    분별 즉 보리
    에고 즉 보리
    생각 즉 보리
    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 자리가 즉,
    보리입니다.
    번뇌 자리가 보리이며
    분별 자리가 보리이며
    에고 자리가 보리이며
    생각 자리가 보리입니다.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과거
    현재
    미래
    에 자성이 없고,
    마음에도 또한 자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존재한 적도 없고
    그러니까 머물거나 얻은 적도 없지요.

    자성이 없다는 것이 중도입니다.
    불이입니다.
    왜냐?
    자성이 없는 데
    어떤 고정된 실체가 존재했으며 존재하고 존재할 것입니까?
    또한 그것을 얻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굳이 말하자면
    말하는 순간 어긋나지만
    그래도 말하라면
    '자성'이 없는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
    '중도'입니다.
    '불이'입니다.
  • 22-04-19 원정
    정말로 감동적인 법문입니다.

    오래전에 저는 여원님이 아직은 알아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보니 여원님은 적어도 저보다는 더 많은 것을 느꼈고, 더 많이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첨언하면, 여원님의 글
    "…=성품=본래면목=공=연기=중도=무아=참나=주인공=부처=신=반야진리=깨어있음=…"이 정답 같아요.
    금강경의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은 무아니까 그렇고, 연기니까 그렇고, 불이중도니까 그렇고, 자성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더 정답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말할 수록 본질에서 더 어긋나니까요.

    무심선원 김태완 선원장은 저 같이 좀 배움이 늦은 사람에게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 같고, 저는 도움이 되는 면이 있습니다. 저도 이런 면 때문에 제 인연들을 위하여 구구절절 적는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도 그렇게 많은 말을 하였지만 손가락을 내밀면서 "바로 이겁니다."라고 항상 말합니다.
  • 22-04-19 원정
    "번뇌 즉 보리
    분별 즉 보리
    에고 즉 보리
    생각 즉 보리"

    위와 같기 때문에 우리는 ' .....할 뿐'으로 살아야 하겠지만,
    위 이해가 가슴에 와닿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 22-04-19 원정
    김태완 선원장의 연기법 설명

    분별할 때도 양면이 함께 나타나고, 사라질 때도 함께 사라진다.
    분별함과 분별없음도 연기적이다.
    모든 분별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분별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바깥에서 말할 때는 모습을 분별함에도 모습에서 벗어나 있고, 안으로는 공에 있지만 공에서도 벗어나 있다.
    공이라는 정해진 뭔가가 있다면 연기법에서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공즉시색이라고 한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연기법을 말함이다.
    색과 공은 연기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진실은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다.
    공이란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색과 상대적으로 연기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 22-04-19 여원
    김태원 선원장의 연기법은 무엇인가?
    조건과 조건의 뭉쳐짐인가?
    연기란 것은 자성이 없음이다.
    공의 속성이 연기이고, 연기의 속성이 공이다.

    귀신이 있는가?
    귀신이 없는가?
    두려운가?
    두렵지 않는가?
    귀신자성이 있는가?
    귀신자성이 없는가?
    나는?…
    …
    …

    ‘연기’
    ‘공’
    을
    확철대오
    하라!
    헷갈리는 법이 없을 것이니~
  • 22-04-19 원정
    김태원 원장과 여원님의 차이가 있는가요?
    김원장이 좀 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나요?

    김원장의 "색과 공은 연기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진실은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다."는
    색도 자성이 없고, 공도 자성이 없다는 말이 아닌가요.
    색과 공이 서로 연기되어 있으니 색과 공 모두 자성이 없다는 말이 아닌가요.

    참고로, 여원님도 아시겠지만,
    소승불교(?)쪽에서는 연기법을 '이 것이 있으니 저 것이 있다.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인과 연에 의지하여 생겨난다'라는 식의 설명을 하고 있는데,
    대승불교(?)쪽에서는 연기법을 대법이라고도 하며, 위와 같은 설명 보다는
    안과 밖, 위와 아래, 삶과 죽음, 시작과 끝, 하늘과 하늘 아님이 서로 연기되어 존재하고 있다고 설명하지요. 그래서 실제로는 안도 없고 밖도 없으며, 위도 없고 아래도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라고 말하지요. 여원님 말씀대로 이름만 존재할 뿐 자성이 없다고 하지요.

    연기이니까 공이란 말도 맞지만,
    공이란 실체가(자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공도 색에 의지한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말에 걸리는 사람들을 위한 방편이란 뜻이지요.
  • 22-04-19 여원
    깨달음에 의하지 않으면
    누구누구의 중력에 의해서 돌고돕니다. 계속 그렇겠지요.
    벗어날 수가 없죠.
    벗어나는 길은 내가 그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 길은 깨달음 밖에 없지요.
    그것의 차이라고 봅니다.
  • 22-04-19 여원
    그 분의 글만 봐서는 돌고 도는 듯합니다.
  • 22-04-19 원정
    저는 오직 모를 뿐이고, 다양한 분들의 법문을 들으면서 길을 잘못 들지 않았나 확인해 보고 있는 중이에요.
    깨달음은 누가 확인해 줄 수 없고, 자신이 삶에서 자신만이 확인할 수 있겠지요.
  • 22-04-19 여원
    위조지폐를 식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진짜 지폐를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위조지폐를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만가지 위조지폐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지폐를 확실히 알면 위조지폐 천만가지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 22-04-19 여원
    생각
    분별
    에고
    라는 위조지폐를 통해서가
    아니라
    어떤 것에도
    자성이
    없다라는 진짜 지폐만
    확실히
    알면
    됩니다.
  • 22-04-19 원정
    여원님 말씀 100% 공감해요.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다만, 사람의 삶들은 바둑처럼 똑같은 판이 나올 수가 없잖아요.
    확실히 안다는 것이 때로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고,
    그 점수과정이 재미있는 여행이 될 수도 있고,
    확실히 돈오해도 주변을 둘러보는 여행이 재미있을 수도 있고......

    같은 내용도 이 사람은 이렇게 표현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표현하고
    그 자체가 재미있잖아요.
    내 방식의 표현만이 아닌.....
    개성이 넘치는 표현방식....
    자유로운 변주는 마치 재즈 같잖아요.^^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 놓으면 후학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잖아요.
  • 23-11-16 여원
    분별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은
    自我의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즉, 에고가 사라졌다는 것이고,
    그 자리는 에고가 애초에 自我가 없다는 것은 아는 자리다.

    心法은 따로
    自我가 없다.
    그 자리 또한 法임을 아는 것이며
    그 자리 또한 幻임을 아는 것이다.

    불이중도
    란
    분별을 떠나
    心法에 도달하는
    비결이 아니다.
    왜냐하면
    도달할
    心法은 환상이므로.
    분별을 떠났는데
    심법
    물질법
    육법
    이
    뭐냐?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