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중도-분별에서 벗어남
우리에게는 분별에서 벗어난 살아있는 마음(의식)이 있다.
그 자리에 계합하는 체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전까지는 분별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다.
깨닫기 전의 이해는 모두 오해이다.
병은 취사간택에 있고, 그 병에서 벗어나는 것은 분별에서 벗어나는데 있다.
번뇌 망상은 분별 속에 있다.
그 자리는 분별되지 않는 자리이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다만, 방편으로 자성, 참나, 본성, 하느님, 부처 등등 이름을 붙일 뿐이다.
지혜로서 번뇌를 비추어 부순다고 하면 그 것은 분별이다.
지혜다, 자성이다, 불성이다, 본성이다, 깨달음이다 하고 이런 분별을 내면 망상이다.
이 자리는 이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끊어짐이 없이 뭔가를 붙잡고 있다는 생각도 분별이고,
중생심을 버리고 부처의 마음을 구하는 것도 분별이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혜를 구하는 것도 분별이고
어둠을 버리고 밝음을 구하는 것도 분별이고
망상을 버리고 실상을 구하는 것도 분별이고,
깨달음은 그런 분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색을 놓고 공이라고 깨달았다고 해도 분별이다.
색이니 공이니 하는 것은 방편으로 세운 이름이다.
색이 따로 있고, 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색을 잘 관해서 공인 줄 알았다고 해도 망상이다.
색이니 공이니 하는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 공부다.
그러면 비로소 진짜 지혜가 나온다.
이 자리는 중생, 부처의 분별이 없다.
고요함과 시끄러움의 분별이 없다.
공이라는 것도 분별이고, 부처라고 해도 분별이며,
깨달음이라고 해도 분별이다.
공, 부처, 깨달음은 방편으로 말하는 것이지, 그게 그렇게 실재한다고 분별을 하는 한 그 또한 망상이다.
여여하다 또는 밝다는 말도 방편이다. 이를 사실로 여기면 안 된다.
밝음을 구하고 여여함을 구하는 자체가 분별이다.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자는 생각도 또 하나의 분별이다.
어떤 것이다 하고 생각하면 모두 분별이다.
그 자리에 통해야 하는데, 통한다는 말도 방편으로 하는 말이다.
어떠한 분별도 없는 것을 방편으로 반야라고 하는 것인데, 반야라는 것도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분별이다. 금강경에서 어떠한 모습으로도 여래를 볼 수 없다, 즉 어떠한 모습으로도 분별해 버리면 그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분별이 없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생각도 분별이다. 이게 ‘분별없음을 가지고 여래를 보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분별이 있다거나 없다는 것도 모두 방편의 말이다.
뭔가가 있기만 하면 모두 분별이다.
분별을 벗어나면 법이라고 할 것도 없고, 깨달음이라고 할 것도 없다.
다 방편이다.
번뇌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은 이름이 있을 뿐이요, 실제로는 둘이 아니고 다름이 없으며, 실제로는 분별할 수 없다.
생과 멸도 분별이다. 생과 멸을 상대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생과 멸도 방편이다. 생의 반대가 불생이라는 것, 멸의 반대가 불멸이라는 것은 분별이다.
생이 없는데 어떻게 불생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밝다거나 밝지 않다는 것도 분별이다. 분별하지 않아도 햇볕에 내리쬐는 곳은 밝고, 그늘은 어둡지 않으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늘이 스스로 어둡다고 말하지 않고, 햇볕이 스스로 밝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 분별할 뿐이다. 하늘이(땅이) 스스로 하늘이라(땅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분별하여 따로 있는 것처럼 말한다. 자기 스스로가 분별해 놓고, 원래 그런 것이 있다고 착각한다.
밝다거나 밝지 않다는 분별하는 마음 자체는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다. 그래서 자성(본성)이라고 방편으로 말하지만 그 것도 붙잡고 있으면 안 된다. 그 것은 또 하나의 분별을 만드는 것이므로. 자성(본성)이라는 뭔가가 있어서 본다고 하면 그게 바로 분별이다. 자성(본성)은 분별되지 않는 것이므로, 굳이 자성(본성)이라고 이름 붙일 필요도 없다. 방편의 이름이고 버려야 할 것이다. 이 자리는 분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생불멸 자체가 방편의 말이다. 불생불멸인 뭔가가 있다고 하면 그 것도 분별이다. 진여도 방편의 말이다. 여여부동하고 진여불성인 진여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 또한 분별이다. 번뇌로부터 해탈한다거나 고요한 선정으로 들어간다는 말도 모두 분별이다.
말과 문자로 표현된 모든 것은 분별이다.
여기에는 어떤 방법도 없다.
이렇게 하면 될 것이다, 저렇게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도 정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분별을 극복해야 하는데 자꾸만 분별 쪽으로만 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그 자리를 체험하는 방법밖에 없다.
방편의 말이라는 것은 항상 부작용이 있다.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듯이, 분별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위하여 분별에서 벗어나는 방편의 말을 약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그 분별(방편)의 말에 사로잡혀 다시 분별하면 분별에 빠지는 부작용이 있다. 분별되는 말을 가지고 투약하다 보니까 그 말을 또 분별해 버리게 되는 부작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방편의 말은 모두 헛소리이다. 경전은 중생의 분별심을 부수기 위한 방편의 말이다. 외도가 내 마음은 불생이고 불멸이라고 말한다면, 부처는 ‘무슨 말이냐 마음은 생기고 사라지지’ 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 불생불멸이라는 망상하는 사람에게는 생멸이라는 약을 쓰고, 생멸이라고 망상하는 사람에게는 불생불멸이라는 약을 쓸 뿐이다. 이게 방편이다. 방편은 진실의 말이 아니다.
이 자리는(이 것은) 버릴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고,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알 수도 없고, 모를 수도 없다. 얻는 것도 아니고 잃는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 자리는 편안함이나 불편함과 관계없다. 그 자리는 망상도, 지혜도 없고, 실상과 허상도 없고, 번뇌도 보리도 없으며, 색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공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도를 방해하는 장애물은 도를 구하는(분별하는) 그놈이다.
깨달음을 기다리는 자에게는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
수행은 항상 뭔가 대상을 놓고 추구하는 것이다. 모두 분별이다. 분별하는 것은 모두 오염된 것이다.
중생의 문제는 망상심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분별하는 분별심이 문제이다.
그 자리는 내 마음 네 마음이 없다. 안팎이 따로 없기에. 그렇게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망상이다.
분별심을 조복시키는 것이, 불이중도에 계합하는 깨달음이다.
분별심이 극복된(조복된) 마음이 우리 마음의 실상이다.
그 자리를 계합하는 체험을 하면 그 때서야 분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참고
이 글은 무심선원 김태완 선원장님의 육조단경 강의를 듣고 내 마음대로 정리한 글입니다.
불이중도에 대하여서는 이 분이 가장 잘 설명하시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