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음공부는29

22-04-08 원정 45

이 마음공부는 평생하는 공부이다.


만약에 내가 견성하였다고 깨달았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뭔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것은 망상이다.

이 공부는 끝이 있을 수 없는 공부이다.

이 공부는 알 수 없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그 자리는 오직 모를 뿐(마음이 저절로 몰라야)이기 때문이다.


말하는 순간 둘이 되기 때문이다.

뭔가 잡는 순간 둘이 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뭔가 상을 잡기 때문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아상이) 존재한다.

나는 깨달았다, 나는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렇게 생각하는 아상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가장 위험하다.


이 공부는 그러한 아상이 없어지는 공부이다.

그러므로 깨달음도 없고, 지혜도 없고, 도도 없고, 나도 없고, 너도 없어지는 공부이다.

부처님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그냥 이렇게 드러나 있을 뿐이다.

이 공부는 끝남이 없다.

그냥 마음이 저절로 모르고 있을 뿐이다.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다는 것도 말(분별)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추구해서는 안된다.

진정으로 침묵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

'공'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 공부는 '공'에 접어 든 순간 비로소 시작된다.

생각이 발동하는 순간 이 공부는 그 순간 그르친 것이다.

생각으로 깨달아야지 하는 순간 깨달을 수 없다.

다만, 아상이 모두 사라져 둘이 아닌 하나가 된 깨달음의 상태(분별심이 없어진 상태, 모르는 마음의 상태)에서는 무슨 생각이 올라와도 다 깨달음(부처)이다.

아상이 모두 없어져 둘이 아닌 하나가 된 깨달음의 상태(분별심이 없어진 상태, 모르는 마음의 상태)에서는 올라오는 생각을 잡는 자도 그 생각에 잡히는 자도 없기 때문이다.

둘이 아니라 하나니까

그 전에는 생각은 모두 망상이다.




***

나는 지금 이 순간 마음공부를 위와 같이 이해하고 있을 뿐이지,

그대로 행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 22-05-07 여원
    이 마음공부는 평생 하는 공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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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깨달음이라는 열쇠 하나면 쥐면 평생 우려먹는 장사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깨달은 자가 된다는 것은 평생 우려먹을 장사거리를 얻은 자일뿐이다. 동시에 착각하지 말아야 될 것은 어느 누가 깨달은 자로 태어난다는 상을 세우면 안된다. 겨우 열쇠하나 가지게 되었고, 실마리 하나 잡았고, 우려먹을 장사거리 가지게 되었을 뿐이다. 나머지는 아무것도 장담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의지해야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자이기도 하므로 할 일과 말도 그리 많지 않다.
    깨달았다고 해봤자,
    밥 먹을 땐 밥 먹을 뿐
    잠 잘 땐 잠잘 뿐
    일할 땐 일할 뿐
    아플 땐 아플 뿐
    죽을 땐 죽을 뿐이다.

    깨달았다고 해봤자 역시,
    밥 먹지 않고 살 수 없고
    잠자지 않고 살 수 없고
    일하지 않고 살 수 없고
    아프지 않고 살 수 없고
    죽지 않고 살 수 없다.
  • 22-05-07 여원
    만약에 내가 견성하였다고 깨달았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뭔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것은 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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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성하였다고 하는 것은 성품을 보는 것이다. 성품이 무엇인지 모르고 성품을 봤다고 할 수는 없다. 본래면목을 목격했다면 본래면목을 본 것이다. 지구가 중력에 의해 태양을 돌고 있다는 것을 봤으면 본 것이지 다른 말이 필요 없다.
  • 22-05-07 여원
    이 공부는 끝이 있을 수 없는 공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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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공부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마음을 보는 것이고 그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아주 명확하다. 어마어마한 빛을 모아서 꿰뚫어보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빛이다. 프로메테우스(가장 먼저 생각하는 자, 선지자)가 인간에게 불을 훔쳐 전해 준 사건과 같이 석가모니가 깨달음의 가르침을 준 것도 또한 불을 훔쳐서 전해 준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빛이기 때문이다. 무명을 밝히는 불이 깨달음이다.
  • 22-05-07 여원
    그 자리는 오직 모를 뿐(마음이 저절로 몰라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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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모를 뿐이었던 것이 실마리를 잡게 되는 순간이 되는 것이 깨달음의 순간이다. 실마리를 잡는 순간 나머지는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된다. 그러므로 설사 모른 다해도 두렵지가 않다. 왜냐하면 실마리를 이미 쥐고 있기 때문이다.
  • 22-05-07 여원
    말하는 순간 둘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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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는 순간’이라는 ‘자성’을 독립시키기 때문에 무자성과 자성, 이렇게 둘로 나뉘는 것이다. ‘말하는 순간’에 ‘자성’을 부여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하면 바로 ‘자성’이 ‘무자성’이 되어 하나로 합쳐진다.
  • 22-05-07 여원
    뭔가 잡는 순간 둘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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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가 잡는 순간’도 ‘무자성’인데, ‘뭔가 잡는 순간’이라는 ‘자성’이라고 착각하지 않으면 간단하다. 바로 ‘무자성’이 되어 ‘자성’은 사라진다.
  • 22-05-07 여원
    그 순간 뭔가 상을 잡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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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성’을 세워 독립시키지 않으면 ‘상’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흘러가버리고 없는 것을, 멈출 수도 없는 것을, 잡을 수도 없는 것을, 착각을 하여 잡았다고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하지 않으면 상은 잡을 수도 없고, 잡히지도 않는다.
  • 22-05-07 여원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아상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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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캄캄한 어둠 속에서 순간적으로 불을 켜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된다. 그럼 내가 안 보이던 것을 보았고, 내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된 것인가. 그냥 불만 켰을 뿐이다. 단지 이것일 뿐이다. 불을 켜야 어둠이 가시는 줄을 모르고, 스위치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어둠 속을 헤매는데, 그것을 아는 이는 전원을 켜서 불을 밝혔을 뿐이다. 밝게 비추어 준 것은 빛이다. 밝음을 있게 한 것은 불을 밝힌 그의 능력이 아니다. 불은 불을 켜는 조건에 합당해서 그저 드러났을 뿐이다.
    수많은 어둠의 공간들은 존재한다. 빛은 시시각각으로 어둠으로 변하기를 반복한다. 그게 본래면목이다. 빛이 강하면 빛을 줄이거나 끄고, 빛이 없으면 빛을 가져오는 것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본성의 세계다.
    항상 어두운 것이 항상 밝게 되는 것이 아니다. 또는 누군가 초능력을 발휘하여 오직 스스로의 능력으로 밝게 하거나 어둡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성(빛)은 나에게 의지하고(불을 밝히는) 나는(전원스위치)는 본성(빛)에 의지하여 삼박자가 맞아야 일어나는 현상임을 아는 것 뿐이다.
  • 22-05-07 여원
    나는 깨달았다, 나는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렇게 생각하는 아상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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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불이 되고, 내가 스스로 빛이 되는 초능력자나 전지전능한 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열쇠를 손에 쥐는 것이다. 자물쇠를 여는 열쇠를 가지고 그 문을 열고 통과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그럼 문을 여는 것과 열리는 그 문과 새롭게 열리는 세계는 각각으로 독립적인가. 그렇지 않다. 열쇠가 자물쇠와 맞지 않으면 문은 열리지 않고 새로운 세상도 열리지 않는다. 모든 것은 동시에 일어나고 동시에 닫힌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떠한 일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이다.
  • 22-05-07 여원
    이게 가장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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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운 길에 불을 밝히지 않고 가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언제 어떤 위험에 직면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자성’을 깨달은 것도 ‘아상’이라고 한다면 답이 없다. 무엇이든 ‘아상’을 세워버리면 어디에서 열쇠를 찾겠는가. ‘아상’이라는 ‘아상’은 원래는 ‘무자성’이다. ‘무자성’인 ‘아상’에게 자꾸만 ‘자성’을 부여하면 ‘아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 22-05-07 여원
    이 공부는 그러한 아상이 없어지는 공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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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깨달음의 종교이다. 깨달음을 얻는 다는 것은 이러한 아상이 없어지는 것이라든지, 저러한 아상이 없어지는 것이라든지 하는 것이 아니다. 무명이 명이 되는 가르침을 준 유전자가 나에게로 이어지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인간이 받았듯이,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내가 받으면 된다. 그 깨달음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그리고 오직 아상이 없다는 것 하나일 뿐이다. 모든 것을 건너뛰어 바로‘아상이 없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만이다. 있지도 않는 아상은 내가 독립시키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떠한 것도 아상이 아닌 ‘무자성’이기 때문이다.
  • 22-05-07 여원
    그러므로 깨달음도 없고, 지혜도 없고, 도도 없고, 나도 없고, 너도 없어지는 공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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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도
    지혜도
    나도
    너도
    없어지는 공부를 하면
    그것들의 아상이 없어지는가.

    말이 있어지고
    말이 없어지고
    문자가 존재하고
    문자가 소멸하면
    또 무슨 소용인가.
    그런다고 해서 그들의 아상이 없어지기라도 하는가.

    그것들은 스스로 그러할 아무런 힘이 없다.
    그것들은 내가 그것들의 ‘아상’만 세우지 않는 순간 없어지는 것일 뿐이지 다른 방법으로는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들이 있다(아상)고 생각하기 때문에
    없다라고 했다, 있다라고 했다가 난리를 피우는 것이 아닌가.
    단지 ‘무자성’으로 패스하면 될 일을.
  • 22-05-07 여원
    부처님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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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를 말하되 부처의 상을 세우지 않으면 부처는 없다.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하면서 ‘아무 것도 없다’라는 것이 ‘있다’라는 것을 없애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면 그는 이미 ‘있다’라는 ‘아상’과 ‘없다’라는 아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 22-05-07 여원
    그냥 이렇게 드러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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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이렇게 드러나 있을 뿐인 그것은 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나의 드러남이 그의 그냥 드러나 있음이다.
    天上天下唯我獨尊
  • 22-05-07 여원
    이 공부는 끝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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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마리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는 방황은 끝이 없다.
    불을 잠시 전해 받아 사용하고 돌려주는 이와 불을 만들 줄 알아 필요할 때마다 사용할 수 있는 이의 길은 다를 것이다.
  • 22-05-07 여원
    그냥 마음이 저절로 모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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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른다는 것은 아는 것을 전제로만 성립하는 개념이다. 아는 게 있어야 모르는 것도 있다. 다짜고짜로 모른다는 것은 없는 것이다. 알게 없으면 모른다고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알고 모르고가 깨달음의 실마리를 잡는 게 아니라, 알아도 상관없고 몰라도 상관없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 22-05-07 여원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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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가 어디일까? 여기는 또 어딘가? 나를 떠난 거기는 도대체 어디일까? 내가 있는 여기는 또 어디인가? 나를 있게 하는 것은 거기의 힘이고, 거기는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거기다. 거기는 지금 여기 이 순간 나에게 생생하게 그의 본성을 드러내고 있는 곳이다. 거기는 나와 함께 여기에서 발현된다. 여기는 거기이고 여기에는 항상 나가 있다.
  • 22-05-07 여원
    아무 것도 없다는 것도 말(분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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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없다. 그런 것은 없다. 없다는 것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성립하는 것인데, 무엇이 없다는 걸까? 공기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공기가 없을 때다. 숨이 막혀올 때, 공기가 늘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아차리게 된다.
    상대적인 개념으로 인해 개념은 존재한다. 그런 속성을 가진 말의 세계는 분별이 아니다. 말은 아무런 원죄가 없다. 말은 말일 뿐이다. 말이 있어도 말에 집착하지 않고, 분별이 있어도 분별에 집착하지 않으면 말도 없고 분별도 없다. 집착하지 않는 것이 관건일 뿐이지, 뭐가 있든지 뭐가 없을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 22-05-07 여원
    아무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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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는 순간,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즉시로 그 순간 ‘있는 것’이 되어 버린다. 언급을 하면 나타나고, 무시해야 사라진다.
  • 22-05-07 여원
    아무 것도 추구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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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것도 추구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순간, ‘아무 것도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을 추구하는 마음’이 된다.
  • 22-05-07 여원
    진정으로 침묵할 수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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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으로 침묵하는 것은 마음에 두지 않으면 침묵할 일도 없다. 개는 하루 종일 짖어대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장마철 번개와 벼락은 요란하지만 그순간이 끝나면 그만이다. 짖을 일이 있으면 짖고, 번개를 번쩍일 일이 있으면 번쩍하고, 벼락 칠 일이 있으면 벼락을 치는 것이 진정으로 침묵하는 것이 아닐까.
  • 22-05-07 여원
    진정으로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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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가 가만히 있을 수 있고, 스스로가 요란스러울 수 있는 법은 없다. 자연은 진정으로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다만 스스로 그러한 존재다.
  • 22-05-07 여원
    '공'으로 존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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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이다.
    ‘空’으로 존재한다고 하면 이미 ‘空’을 벗어난 것이다. ‘공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머물렀으로. 머무는 바 없이 ‘空’에 존재하는 것이 ‘空’에 존재하는 것이다. ‘空’에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공이 존재하면 내가 존재하고, 공이 존재하지 않으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공은 늘 나에게서 발현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 22-05-07 여원
    이 공부는 '공'에 접어 든 순간 비로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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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분별
    에고를
    나무가 알까?
    고양이가 알까?
    공의 나툼이 삼라만상이다. 나의 생생함과 삼라만상이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이미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며, 공이다.
  • 22-05-07 여원
    생각이 발동하는 순간 이 공부는 그 순간 그르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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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조각구름이 일어나고, 한 조각구름이 스러진다.
    한 생각 일어나고, 한 생각 소멸한다.
    자연일 뿐이다.
    ‘생각’에 대하여 이것은 방해꾼이라고 하는 순간 ‘생각’은 방해꾼이 된다. 생각은 그 어떤 자성도 없고, 흘러가는 구름과 요란한 벼락과 다를 바 없다. 생각에 스스로 ‘자성’을 만들어 ‘방해꾼’으로 만들지만 않으면 된다. 應無所主 而生其心, 머무는 바 없이 생각을 내면 생각은 어떤 것도 그르칠 일이 없다.
  • 22-05-07 여원
    생각으로 깨달아야지 하는 순간 깨달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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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닫는 다는 것은 ‘생각의 자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생각으로 깨달았다면, 그는 생각 또한 부처라는 것을 알 것이다. 생각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생각은 여여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이라는 자성도 없을뿐더러 그 무엇을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주체도 사라지고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 공해졌기 때문이다.
  • 22-05-07 여원
    다만, 아상이 모두 사라져 둘이 아닌 하나가 된 깨달음의 상태(분별심이 없어진 상태, 모르는 마음의 상태)에서는 무슨 생각이 올라와도 다 깨달음(부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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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초에 있었던 적 없는 ‘아상’이 사라질 일이 없다. 깨달음의 상태는 ‘아상’이란 본래 없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니 존재한 일도 사라질 일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둘이었던 적도 없었으므로 또다시 하나가 될 일도 없다. 하나였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깨달음의 상태가 ‘분별심이 없어진 상태’라거나 ‘모르는 마음의 상태’라고 한다고 그건 깨달음의 상을 세우는 일이 된다. 그런 상태는 없다. 분별심 또한 분별심이라는 자성이 없었기 때문에 없어진 상태가 만들어질 일이 없고, 모르는 상태도 모르는 일이 라는 자성이 없었기 때문에 아는 상태가 모르는 상태로 만들어질 일이 없다.
    깨달음의 상태는 어떠한 상도 세워지지 않는 상태로 리셋하는 것이다.

    이미 절대적인 어떤 상태가 존재하고 그 상태에 도달하면 그 무엇이 된다는 것은 없다. 최소한 불교에서는 나와 이 자리를 떠난 다른 존재와 그 자리는 없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 이 순간’이 이미 완벽한 그 자리임을 아는 것이다.
  • 22-05-07 여원
    아상이 모두 없어져 둘이 아닌 하나가 된 깨달음의 상태(분별심이 없어진 상태, 모르는 마음의 상태)에서는 올라오는 생각을 잡는 자도 그 생각에 잡히는 자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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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상이 설사 있다 해도 ‘모두 없어지는 일’이 과연 존재할까? 그런 일은 100%는 있을 수 없다. 신이 있다해도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아상’은 존재한 일이 없었기에 없어질 일이 없고, 아상과 깨달음 또한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에 둘이 되어 있던 것이 다시 합쳐질 일도 없다. 아상은 순전한 착각의 세계이며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분별심이 없어진 상태’가 아니라, ‘분별심이 없어진 상태’라는 자성이 ‘분별심이 없어진 상태’라는 무자성이 되는 상태로 리셋하는 것이다.
    ‘모르는 마음의 상태’라는 자성이 아니라, ‘모르는 마음의 상태’라는 자성이 ‘모르는 마음의 상태’라는 무자성이 되는 상태’로 리셋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죽은 망령만이 귀신일까?
    이쯤 되면 생각이 완전 귀신 그 이상이 아닐 수 없다.
    생각이 이렇게 무서워서야 어디 숨이나 쉬겠나?
    우리 몸을 보고 ‘소화를 시키지 말고 잠시 멈추어라’한다고 몸이 말을 들을까?우리 마음을 보고 ‘생각을 쉬어라’고 명령하면 마음이 그 말을 들을까?
    몸도 마음도 멈출 수 없는 시스템은 매 한가지다.
    단지 멈추었다고 착각할 뿐이다.

    그럴 바에야 그저 스스로 그러하게 내버려두고(오든지 가든지 흘려보내고)
    그것들의 자성이 없다는 것만 확실하게 아는 것이 쉬운 게임이다.
    즉, 위조지폐 종류 백날 연구하는 것보다 진짜 지폐 하나 확실히 알아두면 된다. 그러면 어떠한 위조지폐가 온들 다 알아낼 수가 있다.
  • 22-05-07 여원
    그 전에는 생각은 모두 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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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생각은 모두 망상’이라고 하면, ‘생각은 망상’이라는 독립적인 자성이 탄생한다. 하지만 ‘생각’에는 생각의 자성이 없다고 흘러보내 버리면 생각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생각을 쉬거나 끊고
    망상을 쉬거나 끊고
    분별심을 쉬거나 끊고
    번뇌를 쉬거나 끊고
    해서 도착하는 자리가
    깨달음의 자리, 그 자리가 아니다.

    생각은 자성이 없기에 쉬거나 끊을 것도 없고
    망상은 자성이 없기에 쉬거나 끊을 것도 없고
    분별심은 자성이 없기에 쉬거나 끊을 것도 없고
    번뇌는 자성이 없기에 쉬거나 끊을 것도 없고
    도착하는 자리는 자성이 없기에 도착할 일도 없고
    깨달음의 자리는 자성이 없기에 깨달음의 그 자리도 없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자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이미 그 자리에 도착해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자리가 그 자리였다는 것을 안다.
    오직 그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