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이야기

(소설) 유대 왕 아그립바 - 1장.귀국(1)2

07-02-23 김춘봉 1,373
 

(부제) 서기 40년대 예루살렘 이야기





1장, 귀국


2장, 왕과 총독


3장, 유피테르 신상


4장, 성전 수난사


5장, 재회


6장, 황제의 죽음


7장, 유대통일


8장, 에필로그








1장, 귀국


(1)


 갈릴리 호반의 도시 율리아스로 가려면 가이사라 항에서 내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그립바는 선상에 우뚝 선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부인 키프로스와 아들(10살), 베레니케(7살), 두르실라(5살) 자매는 항해 중에 사귄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서풍이 부는 계절이라서 하역작업을 끝낸 배는 닻을 올리기 무섭게 시원스레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해안을 따라 줄줄이 늘어선 민둥산을 바라보면서 아그립바(45세)는 눈시울마저 붉히고 있었다.


  유대뿐만 아니라 동방의 속주 권세가들은 자녀를 유학 보내는 관습이 있었다. 이는 로마의 실력자와 어린 시절부터 친교를 맺어두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10살이 되던 해에 아그립바는 유학을 가게 되었으며, 어린 아들의 유학길에 따라 나섰던 아겔라오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영문도 모르는 채 갈리아의 골 지방으로 귀양살이 떠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AD 6).


  그 후, 자식을 낳지 못해 양자를 들어야 했던 아겔라오는 아들에게 왕자의 품위를 잃지 말라는 당부의 말과 함께 네 이름은 아그립바 이렇게 말해주었던 것이다.


  마르쿠스 아그립바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위였을 뿐만 아니라 유명한 장수였다. 그는 황제 특사 자격으로 예루살렘 성전 본당 준공식(BC15)에 참석하여 100마리 황소를 제물로 바쳐 고기를 배불리 먹게 해준 인물이라 그의 이름을 빌리면 백성으로부터 호감을 받으리라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할아버지 헤롯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왔다.


  할아버지 헤롯은 대제사장 권세를 100여 년 동안이나 누리면서도 세상 물정에 어두울 뿐만 아니라 세력 다툼이나 하던 하스몬 가문의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개혁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처음부터 그들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위 왕자의 난이 발생하기 전만 하더라도 친분이 두터웠다. 알렉산드로 야네누스의 증손녀이기도 한 마리암메와 혼사를 맺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런데 허약한 장남 히루카누스에 대항하여 차남 아리스토불로가 대권에 도전하기 시작하면서 이 때 헤롯은 히루카누스 쪽 사람이었고, 마리암메는 아리스토불로 편을 들고 있었다.


  때 마침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통과하게 된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이 사실을 고자질한 자들이 있었고, 장군은 두 사람을 불러놓고 형제간에 화목 하라는 당부의 말을 남기고 나바테아로 떠난 사이 아리스토불로는 갈릴리 토착 세력 에제키아를 등에 업고 예루살렘을 차지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는 원정길에서 돌아오는 폼페이우스 장군을 마중 나가 거짓을 고하다가 이를 수상히 여긴 장군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려하자 이를 막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장군은 갈릴리 반군을 소탕한 다음, 이두메 지역의 행정장관 안티파테르에게 유대 전권을 맡기고 로마로 돌아갔다. 이때 아리스토불로를 인질로 데리고 갔던 것이다. 그가 말년에 쇠약한 몸을 이끌고 돌아왔으나 헤롯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에 심사가 꼬인 마리암메가 드러내놓고 대들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음식을 거절하며 굶어죽었다.


  그녀와의 악연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 헤롯이 노환으로 고생할 당시(BC4) 마리암메의 아들이며 아그립바의 생부이기도 한 아리스토불로2세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에 와서, 아비가 아들을 죽음의 자리에 내줄 수밖에 없었던 기막힌 사연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아마도 마리암메와의 불화 때문에 왕권을 계승할 수 없었던 왕자를 바리새인들이 내세우면서 어찌해보려다가 들통이 난 사건이 있었고, 연이어 독수리 석상 파괴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왕권이 심각한 도전을 받는 가운데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위급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 후, 헤롯이 죽고(BC4) 예루살렘과 이두메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은 아겔라오 몫으로, 베레아와 갈릴리 지역은 안티바에게, 유대 북부 지역은 빌립에게 돌아갔으나 유독 아겔라오와 예루살렘의 실세들 사이에 갈등이 끝이지 않다가 때 마침 아겔라오가 로마에 간 사이 그를 모함하는 진정서가 황제에게 전달되면서 유배지로 쫓겨 가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었다. 그 다음부터 예루살렘과 이두메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을 로마인 총독이 맡게 되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장성한 아그립바가 고국에 돌아가 왕 되길 청했으나 티베리우스 황제는 들어주지 않았으나 새 황제의 지위에 오른 칼리굴라는 왕 칭호를 내리며 가라고 했던  것이다(AD37). 그런데 정작 가서 있어야 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빌립이 죽고(AD34) 공석중인 유대 북부지역이었다. 


  왕이 되었으면 할아버지 헤롯의 유산을 상속 받아야 했다. 궁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키프로스의 구리광산이나 시돈, 띠로와 같은 타 지역의 토지와 건물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어야 했다. 


  인두세 경합을 주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제사장 임명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아그립바는 예루살렘과 이두메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마르겔스 총독과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안티바가 버티고 있는 유대로 선 듯 돌아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고민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촌 형 되는 칼기스 헤롯을 율리아스에 보내 대권을 행사케 했으며, 마르겔스 총독과 안티바에게는 심복 블라스투스를 통해 자신이 황제로부터 왕 칭호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석연치 않았다. 마르겔스 총독은 고개만 끄덕이는 정도의 관심을 보였을 뿐이고, 헤로디아는 안티바를 가리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더라는 것이었다.


“왕이라니요?” 


“빌립의 영토를 주면서 왕이라 했나봅니다.”


안티바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헤로디아는


“왕 되실 분은 여기계십니다.”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귀국 길에 오른 이상 그들을 무시하기로 했다. 안티바는 늙었고, 마르겔스 총독은 녹이나 받아먹으면서 편하게 지내다가 임기가 끝나면 훌쩍 떠날 사람이니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대제사장 예복을 돌려받고(AD36) 기뻐한다는 안나스 세력을 몰아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이는 아겔라오의 원수를 갚는 일이기도 하려니와 그들을 제압하지 않고서는 왕 행세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가야바로부터 대제사장 직을 물러 받은 요나단은 50일 만에 동생 데오필로에게 넘겨주고 다시 성전 경비대장 지위에 있다고 했으니 이처럼 요직을 두루 차지하고 있는 안나스가문의 형제와 맞서려면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권세가 필요했다.


마르겔스 총독이 이 일에 나서주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고, 기존의 어떤 세력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집권초기 할아버지 헤롯은 광야의 수도원 엣세네인들도 예루살렘에 불러들였다고 했다. 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방법인들 쓰지 못할까 싶었으나, 바리새인들을 포함해서 엣세네인들과 손잡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들의 행적을 소상히 알고 있는 터라 경계의 대상 제1호로 여기고 있었다.


  블라스투스의 보고에 의하면, 그리스도교도라 불리는 신흥세력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그들의 대표자와 만날 생각을 은연중 하고 있었다. 





(참고) 


*헤롯왕의 가계





                      안티파테르(이두메인) 유대 행정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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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엘                 헤롯                 요셉                  페로라스              살로메


                 유대 왕(BC37~BC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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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마리암네1)          (살레오파트라)           (말타케)                (마리암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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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파테르2세 알렉산더  아리스토블로2세    빌립           아겔라오        안티바         빌립(?) 


(BC4사망)     (BC7숙청)   (BC4숙청)     (BC4~AD34)    (BC4~AD?)   (BC4~AD39)  헤로디아와 결혼  


                                        ⇩                                              헤로디아와 재혼                  


           ⇩                    ⇩————————⇩                                                      ⇩        


      칼기스 헤롯        아그립바1세        헤로디아                                            살로메        


      (BC3~AD50)        (BC4~AD44)                                                                     


         칼기스 왕             유대 왕                                                                    


        (AD41~48)          (AD4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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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그립바2세          베니게           드루실라                                                   


          (AD27~?)         (AD29~?)        (AD34~?)                                                   


          칼기스 왕                                                                                      


          (AD50~53)








*중요인물





헤롯 - BC73?~BC4


마르쿠스 아그립바 - BC62~BC12


아우구스투스 황제 - BC63~AD14


알렉산드로 야네누스 -BC103~76


폼페이우스 - BC106~BC48


티베리우스 황제 - BC42~AD37, 제위기간(AD14~37)


칼리굴라 - AD12~41, 제위기간(AD37~41)


안나스 - 대제사장 재임기간(AD6~15), 사망(AD36)




  • 07-02-23 원정
    가게도가 있으니 훨씬 이해하기 좋네요.
  • 07-02-25 김춘봉
    알버트 슈바이처는 그의 저서 예수 연구사에서 ‘근대 기독교는 예수의 역사성을 포기해야할 지도 모른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말에 공감하면서,
    기존의 예수 상과 역사 속의 인물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드리기 위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서기 30년대 예루살렘 이야기는 졸작 ‘총독 빌라도’를 통해 이미 시중에 나와 있고,
    40년대 이야기는 ‘유대 왕 아그립바’ 입장에서 낱낱이 파헤쳐질 것입니다.

    원정님,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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