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에서 바라본 세상

흑사병과 유럽의 성장2

07-02-12 나나 2,266

최근에 케이블 TV에서 우연히 14세기에 발생한 유럽의 흑사병에 관한 방송을 보게 되었다.

이 방송을 본 후 만약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에서 발생하지 않았다면, 유럽의 발전은 몇 백 년 또는 거의 일천년 이상 더 지연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흑사병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불행한 일이었지만, 그후 이 흑사병은 유럽인들에게 축복이 되었다. 즉, 흑사병 이전 거의 1000년 동안,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 등에 의해서) 유럽인들은 모든 것들을 신(God)으로만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성직자들이 자신들과 똑같이 흑사병에 걸려서 죽는 것(성직자들이 자신들을 보호할 수 없음)을 체험하게 되면서 일부 사람들의 생각이 신에게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들은 신(God) 대신 인간과 자연에 좀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흑사병은 1334년 중앙아시아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그 이후 1350년까지 약 16년 동안 중국에서 아시아, 인도, 유럽으로 퍼졌다. 1346~1350년 동안 유럽에서 흑사병(pest)으로 죽은 사람은 그 당시 전체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할 만큼 많았다.

흑사병이 본격적으로 유럽에 퍼지게 된 까닭은 1346년경 카파 성(오늘날 러시아 남부의 페오도이야)을 공격하던 몽골군이 페스트에 걸려 죽은 시체들을 투척기로 카파 성 안으로 날려 보내고 철수했기 때문이다. 이후 항해를 통해서 흑사병균은 유럽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흑사병은 유럽을 중세에서 근대로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흑사병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심각한 노동력의 부족은 노동자(농노)들의 상황을 그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바꾸어 놓았다. 즉, 노동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노동에 대해서 어떠한 가격도 요구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상품가치를 지니게 되었고, 이 때문에 노동 집약적이던 봉건체제는 자연스럽게 붕괴했다.

또한 흑사병은 유럽에서 그 이전 약 1000년 동안 이어온 종교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줄여주었으며 이전과 달리 종교가 개인화되었다. 또한 이것은 신(God)에 대한 관심이 다소 줄어들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인간과 자연에 대해서 관심을 돌릴 수 있도록 생각의 여유를 가져다 주었다.

이 때문에 흑사병 이후에 인간다움을 중시하는 휴머니즘(인문주의)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14세기 이탈리아에서 비로소 ‘부흥’을 뜻하는 르네상스가 시작됐다. (1)

스위스의 역사학자인 부르크하르트(J. Burckhardt, 1818~1897)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는 책에서 르네상스를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 그리고 합리적인 사고의 길을 열어 준 근대문화의 선구로 보았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심은 아래와 같은 많은 결과들을 잉태했다.

즉, 1350년의 흑사병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노동력의 심각한 부족은 기계화를 촉진하였다. 또한 이 노동력의 부족은 1445년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7~1468)가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을 발명할 수 있도록 사회적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인쇄술의 보급이후 이 인쇄술이 다시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을 촉진시켰다. 즉, 1517년 마틴 루터는 당시 교회 관습인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 발표하여 종교개혁의 시초를 제공하였다.

유럽인들의 생각이 신(God)에게서 풀려난 후, 이성에 기초한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게 되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1543년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1604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가속도의 운동에 관해서’, 그리고 1609년 케플러는 ‘신천문학’ 등을 출판했다. 결국 이런 사회적 환경 속에서, 1687년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발표했다.

또한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는 1400년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와 1588년 몽테뉴의 ‘수상록’과 1603년 셰익스피어의 ‘햄릿’, 그리고 1615년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과 같이 라틴어가 아닌 개별 국가의 언어로 쓰여진 국민문학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흑사병과 더불어 유럽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1453년 이슬람국가인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동로마(또는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사건이었다.

즉, 콘스탄티노플(현재 터키의 이스탄불)이 오스만튀르크 제국에 의해서 점령된 이후 유럽과 아시아의 교역로는 거의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이것 또한 그 이후 유럽인들에 축복을 안겨주었다.

즉, 1453년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동로마 제국의 많은 학자들이 유럽으로 옮겨왔으며, 이때 르네상스를 거치고 있던 유럽인들은 이들이 전해준 고대 그리스 학문에 열광했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그 이전에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유럽과 아시아의 교역이 완전히 차단되어 그동안 번성했던 지중해 국가들은 모두 쇠퇴했다. 그리고 지중해 국가들을 대신하여 아시아와 교역을 간절히 원했던 (많은 상품을 아시아에 의존했던) 이베리아 반도와 서유럽 국가들이 중국과 인도와의 무역로를 찾기 위해 배를 타고 아프리카를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즉,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바스코다가마가 인도 항로를 찾아 나서도록 만들었고, 결국 그가 1497년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발견했다. 또한 이것은 1492년 콜럼버스가 스페인에서 첫 번째 항해를 하도록 했다. 이것이 1495년 콜럼버스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그 이후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에 동참하여 대항해 시대가 시작됐다.


이제 시각을 좀 달리 하여 13~14세기 몽골제국 시기에 유럽인들은 다시 접한 고대 그리스의 학문들에 열광했지만, 중국인들은 왜 그렇지 못했는가를 살펴보자.

유럽은 고대 그리스의 사상을 그 기초에 가지고 있었지만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거의 1000년 동안 신(God)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은 종교의 영향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 때문에 고대 그리스의 학문을 대부분 잊어버렸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11C~13C)과 동로마 제국의 멸망(1453년) 이후에 유럽 사람들은 이슬람 세계에서 다시 접한 고대 그리스의 학문에 크게 열광했다.

하지만, 13세기의 중국인들은 동시대 유럽인들과 달리, 몽골제국이 이슬람 국가들을 지배할 동안에도 고대 그리스의 학문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 단지 중국인들은 이슬람인들의 천문학 등과 관련된 기술들만을 주로 흡수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수학책인 유클리드의 ‘원론’이 중국어로 최초로 번역된 것은 원나라가 망한 후인 명나라 말기 또는 청나라 때 예수회에 의해서였다.

이와 같이 유럽과 중국에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 것은 유럽과 중국이 가진 기본 사상의 차이 때문이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유럽 사상은 그 근본에 서로 융합할 수 없는 엄격한 대립개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중국의 음양사상은 상보적이고 상대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플라톤은 ‘세상 만물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진정한 실체는 따로 있으며 이것은 이데아(idea)이고, 우리 눈에 보이는 형상은 모두 이데아가 만들어 낸 그림자에 불과하다.’라고 했다. 이와 비슷하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을 질료와 형상으로 설명했다. (2)

이런 플라톤의 사상을 받아들여 2세기에 시작된 유럽의 교부철학은 영원하고 불변한 하나님의 세계(이데아)와 변화하는 사람의 세계(형상)로 세상을 구분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상을 가진 유럽은 11세기 십자군 전쟁 이후 다시 접한 고대 그리스의 학문들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럽인들과 달리 몽골제국 당시의 중국인들은 고대 그리스 학문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 그 대신 중국인들은 AD 67년경 후한 시대에 처음으로 접한 인도의 불교를 열광적으로 흡수하여 크게 발전시켰다.

당시의 중국인들이 인도의 불교 사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중국의 노자와 장자 사상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즉,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은 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연기론(緣起論)과 서로 깊은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3~6)

즉, 13~14세기 당시 유럽인들과 중국인들이 가진 기본적인 사고방식의 차이로 인해서 유럽인은 이슬람인들에게서 고대 그리스 학문을 흡수할 수 있었지만, 중국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1) 휴머니즘: http://100.naver.com/100.nhn?docid=174923
(2) 플라톤의 이데아론: 사람은 이데아를 직접 볼 수 없고 단지 형상을 통해 이데아를 인식한다. 즉 이데아는 형상을 존재하게 하는 실체이며, 형상은 이데아를 인식하게 해주는 창문이다.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1861~1947)는 ‘유럽의 철학사는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3)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인위적인 가식과 위선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기(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4) 장자의 제물(齊物): 글자의 뜻은 ‘사물을 가지런히 한다.’이고, 모든 사건이나 사물을 차별화하지 않는 정신적인 절대 자유의 경지를 말한다. 이를 추구하는 방법인 좌망(坐忘)은 조용히 앉아서 우리를 구속하는 일체의 것들을 잊어버리는 것이고, 심재(心齋)는 마음을 비워서 깨끗이 하는 것이다.
(5) 불교의 공(空): 집착과 탐욕에서 벗어나 너와 나 그리고 만물이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 것.
(6) 연기설(緣起說): 우주 만물은 서로 불가피한 인과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상호 의존성을 깨닫는 것.

  • 07-02-14 원정
    "흑사병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불행한 일이었지만 이후 유럽인들에게 축복이 된다. 즉, 흑사병 이후 유럽은 신(God) 대신 인간과 자연으로 관심을 돌리면서 학문이 발전한다."

    전 이부분에 대하여서는 처음 접하는 지식입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저도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 07-02-16 바람
    한 부분이 망하거나 막히거나 하는 그러한 것이 당하는 사람들로서는 불행한 일로 보이겠지만, 그 모든 자연섭리는 오히려 그러하기에, 그로인하여 더욱 올바른 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니가 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이 결코 형통의 길일 수 없습니다.

    불가능일때, 그 모든 막힘일때, 도무지 뜻밖의 것으로 그 길이 열리게 되는 자연이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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