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이정(12) 형 3
우리 집 장형의 이름에는 가운데 글자에 돈(敦)자가 들어간다. 따라서 난 가끔 아버지가 왜 그런 이름을 지으셨을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흔하지 않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돈(敦)자는 두텁다는 의미이다. 그 이름대로 살라는 뜻이 있다면 장형의 이름은 정을 두텁게 하고 살라는 의미를 지닌 셈이다.
형님은 나와는 18살 차이이다. 나는 다른 두 형들은 형으로 호칭하지만 이 장형만은 형님으로 호칭하였다. 이 형님은 얼마 전에 형제들 중에서 제일 먼저 돌아가셨다.
내가 어려서 영보암에서 살게 되었을 때 잠시 동안 고모가 와서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간 적이 있다. 아버지에게 형제라곤 오직 누님이 한 분 있었다. 아버지는 이 누님을 오랜만에 볼 때 꼭 예의를 갖춰 절을 하셨다. 두 분은 사이가 정말 각별하셨다. 고모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먼저 고모의 시댁인 충청남도 서천의 문장리였고, 그 다음 간 곳이 보령군 주산면 동오리, 바로 형님이 묻힌 곳이다.
그 곳에는 나이 드신 여인이 한 분 있었는데 고모는 나에게 그 분을 큰어머니라고 부르라면서 절을 시켰다. 나중에 커가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선 자연스럽게 이 분을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 분이 아버지의 첫째 부인이었다. 나는 방학 중에 영보암에 가면, 올 때는 꼭 보령에 들러 큰어머니를 뵙고 오는 것이 순서였다. 아버지는 홍은동이 본가가 아니고, 아버지의 본가는 사실 충청남도 보령인 셈이다. 형님과 밑의 동생 셋은 그래서 어머니가 다르다. 아버지는 홍은동에 둘째부인을 두고 아들 셋을 더 낳은 것이다. 형님은 나의 친어머니를 작은 어머니라 불렀다.
형님은 작은어머니 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지금 서울시립대학교의 전신인 서울농업대학을 1년을 다니다 중도에 자퇴를 하고 시골로 내려갔는데, 뒤에 아버지의 주선으로 중앙정보부에 취직을 했다가, 스스로 못 다니겠다고 그만두고는 다시 시골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평생 보령을 떠나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나는 방학이면 시골을 찾았고, 서울의 형제들은 명절과 제사 때가 되면 시골에 함께 모였다. 형님은 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때 모두 가질 못하고 한 명만 가게 되어도 “대표로 한 명이라도 오면 된다.”라며 술상을 차렸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주 찾은 시골집에 갈 때는 늘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술을 삼갔을 때에도 이 날 만큼은 참지를 못하고 형님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형제들이 모두 모이는 날은 둘째 형은 두 세잔으로 잔을 비우고 앉아있지만 나머지 형제들은 대취해서 밤이 늦도록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4형제가 모이면 대화는 늘 형님이 주도하는데 이야기가 길고 끝이 없어서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어도 대화에 별로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술을 그야말로 가리지 않고 두주불사여서 형님은 막걸리든 양주든 일단 병뚜껑이 열리면 먹다가 힘들어서 남기는 일은 없었다.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져서 가끔은 형수님의 잔소리와 함께 마무리가 되기도 하였다.
형님은 농협의 단위조합인가에서 부장 직을 맡고 있다가 좀 이른 나이인 47세에 직장을 그만 두었다. 자신이 굳이 책임지지 않아도 될 일을 스스로 도의적 책임을 안고 그만두었다고 본인이 토로한 바 있는데, 그 뒤로 농사일에는 별 취미를 못 붙인 것 같다. 농사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형수님의 불평을 심심치 않게 들었다. 형수님은 이래저래 형님께 불만이 많았는데 가장 큰 불만은 술을 매일 먹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얼핏 보아도 형님은 알콜중독이 심한 상태였다.
형님은 어느 좌중에서든 언제나 대화를 주도하였다. 주로 정치이야기가 단골 메뉴였고 지극히 보수적이었으며, 간혹 지난 과거를 물으면 세세한 부분에 하찮은 이름까지 끄집어내는 등 특히 기억력이 좋아보였다. 문제는 이런 이야기들이 늘 술에 취에 술술 나온다는 것이었다. 둘째 형이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형은 정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살다 갔어, 직장 그만 두고 싶으면 그만두고, 술 마시고 싶은 대로 평생 마셔보고, 자기도 한번은 그런 말 한 적이 있어, 평생 원 없이 술 먹고 살았다고. 어떤 때는 나도 그 형처럼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형님의 이런 평생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마셔대는 술은 급기야 모처럼 추석에 모인 동생들 앞에서 정치이야기를 하다가도, “으이구, 정치는 무슨 정치, 집안 정치나 제대로 하고 정치, 정치 혀.”라는 분노 섞인 형수님의 핀잔을 들어야 했으며, 평소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기로 단호히 작심한 듯한 형님의 장남과 부딪힐 때는 모처럼 대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밥상이 뒤엎어지기도 하였다.
형님은 동생들에게는 정이 많고 귀 기울이는 편이었으나 자식들에겐 엄한 게 지나쳐 특히 큰 아들하고는 눈에 띄게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집안일보다는 종중(宗中) 일이 더 우선이었고. 이런 저런 이유로 형님은 소위 바깥에서는 덕망과 인품 있고 문중 일을 수완 있게 처리하는 똑똑한 사람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집안에서는 성실치 못한, 책임감 없는 가장으로 전락되어 있었다.
형님의 주량은 세월이 가도 줄질 않았고 거기에 따라 주변의 돌아가는 상황도 무언가 균형감이 심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거의 명절이나 제사 때만 뵙게 되는 형님은 어떤 때는 자전거를 타고가다 논두렁으로 굴러 떨어져 얼굴에 상처가 나 있거나, 가족들과 부딪히다 보면 멀리 포항에서 온 둘째 아들까지 "아버지.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라며 절을 하고 일어나 제사도 지내지 않았는데 늦은 밤 떠나버린다거나, 제사 시간이 거의 다 임박해서까지 술을 먹다 막상 제사를 지내면서는 제례 순서까지 헷갈린다거나 등등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형님 혼자의 술자리에서의 독백에 어느 때부터인가 나도 ‘아, 식구들이 질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은 건강이 참 좋아보였다. 가끔 내가, 그리 술이 들어가며 담배를 피워대는데 혹시 속이 쓰리다거나 피곤한 감이 있지 않을까 해서 물으면 “아니, 아무 이상 없어.”하는데 나로서는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나 역시 술 담배를 즐겼지만 타고난 약골이어선지 겨우 30대 말에 몸이 형편없이 망가져 절제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술 담배를 끊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형님도 결국 술과 담배에는 장사가 없었던가. 갑자기 식도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수개월이 지나자 세상을 뜨셨다.
이런 형님이 생전에 자신의 뜻을 펼친 일이 있다. 형님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흩어져 있던 할아버지 할머니와 둘째 증조할머니를 한 장소에 이장하였다. 우리는 둘째 증조할머니의 자손이었다. 그리고 서울 변두리의 용미리 공동묘지에 모셨던 작은어머니를 아버지 옆으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후에 큰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역시 아버지 옆으로 모셨다. 형님의 고상한 용어로는 합폄(合窆)이라고 하는데, 소위 봉분은 하나만 만들고 그 속에 왼쪽과 오른쪽으로 각각 큰어머니와 작은어머니를 함께 모셨던 것이다. 형님은 이후 아버지 아래쪽으로 네 곳의 묘 터를 더 마련하였다. 왼쪽으로부터 순서대로 4형제가 그리 묻히자고. 자신의 당대에 이 일을 끝내야 한다며 형제들이 죽은 후에 묻힐 곳을 미리 마련한 것이다.
형님이 돌아가신 후 첫 추석을 맞아 벌초를 위해 모인 자리에서 형수님은 회상하듯 말했다.
“새벽마다 일어나서 유언장을 쓰더니 종중일이고 뭐고 아주 깨끗이 뒤끝 하나 남지 않게 처리하고 갔어. 그렇게 사람을 질리게 하더니 없으니까 집안 여기저기 허전한 구석만 남네......”
그토록 아버지를 싫어하던, 그리고 앞으로 집안 제사 모시길 거부할 듯하던 형님의 장남이 아버지의 재산은 한 푼도 상속 받지 않고 모두 공동명의로 하여, 종중재산으로 만들어, 조상의 제사를 모시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이튿날, 벌초하러 산으로 올라가는 형님의 세 아들을 우리 남은 삼형제가 뒤따르고 있었다. 형님은 돈(敦)자가 들어있는, 그 이름대로 살아생전 형제들의 정을 두텁게 한 것이다. 장례를 모두 치르고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입이 무거운 둘째 형이 “아버지가 큰 별이었다면, 형은 작은 별이었다고 나는 생각해.”라며 그 속정을 표현한 바 있다.
형님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형님의 동서가 전했다. 꿈속에 형님이 나타나더니 “나 먼저 갈께.”라고 했다고. 형님은 엑스레이를 찍고 나오다 사진기사로부터 힘들겠다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퇴원하여 2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병원에서 마지막 형님을 만난 그 동서는 그 때의 정황도 함께 전했다. 형님이 “나 무서워.”라고 했다고. 내가 면회 갔을 때 형님은 늘 의연한 자세를 보였었다.
“형님,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의식이 있다면 모두 사람 사는 세상일거에요. 부디 평안한 마음 가지시고 편히 쉬셔요.”
2006. 9.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