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자 바라보기

원형이정(11) 형 21

07-02-03 지나다가 1,350
 

원형이정(11) 형 2





 ‘스타벅스 커피를 매일 한 잔씩 마시던 사람이 마음을 고쳐먹었다. 직접 커피를 끓여먹으며 생긴 하루 3000원씩의 여윳돈을 은행 통장에 차곡차곡 쌓기로 했다. 30년 뒤면 얼마나 모일까. 이자까지 5500만원이나 된다고 한다. 이 책은 삶을 바꾸는 작은 돈의 기적을 얘기한다. 아무리 벌어도 돈을 모을 수 없다고들 하소연하지만, 마음만 고쳐먹으면 길은 얼마든지 있다고 강조한다. 사실 이 책이 제시한 세부 실천 항목을 들여다보면 특별하달 게 없다. 담배 끊기, 커피 한 잔 덜 마시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은행수수료 아끼기 등이다.’ 이상은 장순욱의『푼돈의 경제학』에 대한 어느 조간신문의 해설이다.





 내 둘째 형은 나와는 띠 동갑, 같은 말띠로 12살 위다. 위에서 소개한 책을 안 봐서 모르겠지만 아마도 검소와 절약 그리고 부지런함에 대해서는 우리 둘째형을 따라갈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고 감히 자부한다.





 아주 어려서 둘째 형이 동생 둘, 즉 셋째 형과 나를 데리고 다니며 수박을 한 덩어리 사서는 홍제천 다리 난간에 앉아 깨어주던 기억이 아스라이 있다. 둘째 형이 다리 난간에 걸터앉은 모습이 신기하게 보여 나도 따라하려다가 “야, 너는 따라하지 마.”라고 제지당했었다. 이 형이 무언가를 사 준, 이런 유쾌한 기억은 그 뒤로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형은 인창중학교 3학년 때 졸업을 몇 달 남겨두고 퇴학당했다. 등록금을 내지 못해서였다. 어려운 비상시마다 해결사였던 유일한 재산목록인 재봉틀 대가리가 그 때는 아마 전당포에서 이미 영어의 신세가 되어 신통력을 발휘할 수 없었나보다. 형은 누군가의 소개로 이용기술을 배워 동네 이발소에 근무하게 됨으로써 일찍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연탄 한 장을 새끼에 꿰어 들고, 쌀 한 되박씩이라도 안정감 있게 매일 산동네로 들어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이 형이 가장역할을 돕고서부터일 것이다. 형은 그 후 집안의, 농협에 있던 고위직인사의 도움으로 농협의 구내이발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내 머리는 아버지와 이 형이 깎았는데, 아버지가 깎는 머리는 몹시 아팠고 형은 정말 부드럽게 잘 깎았다.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말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형은 머리 깎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집에서 깎을 때나, 내가 홍은동에 있었던 이발소나 나중의 서대문에 있었던 농협의 구내이발소엘 갔을 때나, 형은 늘 시큰둥해했고, 불친절하게 느껴졌다. 집에서 쉬는 날 아버지가 “자, 이제 이발 좀 하자.”라고 하시면 형은 아주 싫다는 표정으로 묵묵히 식구들의 머리를 깎았던 것 같다. 형은 결국 이발을 그만두고 아버지를 통해 다시 그 농협의 인사에게 부탁을 해서, 스스로 농협의 안내원으로 정년까지 보냈다. 형은 이 은행의 안내직에는 만족을 했던 것 같다. 그 후로는 집에서 가끔 자청하여 머리를 깎아주기도 했었다.





 형은 농협에 근무 한 시간 전에 출근을 했고 저녁 9시 전에는 틀림없이 잠을 잤다. 술과 담배는 안하는데 먹어도 꼭 몇 잔에 불과했다. 어쩌다 제삿날이 되어 셋째 형과 내가 옛이야기를 하며 분위기가 고조되어 대취해도 형은 손을 저으면서 두 세잔이면 고만이라고 거부한다. 셋째 형과 나는 가끔 술에 취해 헷소리를 하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편이지만 이 둘째 형은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 형의 평소의 움직임을 볼라치면 늘 빈틈이 없고 언제고 편안히 쉬는 모습이 없다. 종일 쉬지 않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 어쩌다 시골에 내려가면 집 주변을 돌아다니며 먹을 나물을 캔다거나 집에다 옮겨 심을 묘목을 다듬고, 심심풀이로라도 냇가로 고기를 잡으러 나간다. 나는 이 형이 낮잠을 잔다거나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 팔베게를 하고 쉬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다.





 나는 일을 하기 싫어하고 게으른 편이라 대체로 남들도 그런 성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형을 보면 내 생각이 잘 못된 것이 아닌가 잠시 의혹이 들 때도 있다. 어쩌다 같이 잠을 잘 때면 형은 아침에, 뒤척인다거나 졸린 몸을 억지로 일으킨다거나 그런 느낌이 전혀 없다. 그저 시간되면 새벽같이 스르르 일어나 자연스럽게 아침 활동을 시작한다. 형의 규칙적인 생활과 흐트러짐 없는 생활태도 및 평소의 자세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강인한 정신력이 요구되는 것들이지만, 형은 아주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그런 행동들을 물 흐르듯이 구사한다.





 형은 평소에 말이 없음만큼이나 표정이 없다. 돌덩이처럼 단단하다는 느낌이다. 냉정하다는 느낌도 있다. 어려서 나는 형에게 나이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말을 놓았다. 형이 결혼을 하자 나 스스로 존대를 하였는데 그 후로 형은 더 냉랭하게 느껴졌다. 형이 돈에 대한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서는 나는 하나도 아는 사실이 없다. 형은 절대로 그런 걸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러나 대충 내 느낌으로 형은 정말 동전 한 푼이라도 헛되이 쓰지 않는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고 쓸데없는 물건은 절대로 사는 법이 없다. 홍은동 산동네의 집이 철거를 당하자 당시 녹신아파트라는 허름하고 조그만 아파트로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형의 알뜰한 저축 때문이었다.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나오자 형은 홍은동 미미예식장 뒤 쪽에 번듯한 연립주택을 하나 마련해 있었다. 나는 그 집이 참 자랑스러웠다. 이제야 집다운 집이 마련된 것이다. 집에는  가구며, 냉장고도 제법 큰 것이 새것으로 들어와 있었다. 내가 제대 후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하여 번 돈으로 냉장고를 채운다고 사 온 것이, 콜라 한 박스였다. 그러나 그 콜라는 한동안,어린 조카들도 있었지만, 누구도 손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형도 형수님도 그 콜라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형은, 현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콜라를 한 박스 사들고 온 철없는 동생이 어이없을 정도로 한심했을 것이다. 나는 그 콜라를 생각할 때마다 한없이 부끄럽다.


 


 형은 지금 강원도 홍천에서 펜션을 운영하고 있다. 주변의 땅을 그대로 놀리지 않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텃밭을 일구어 적은 곡물이라도 거둔다. 형은 그리 검소하면서도 집안의 대소사를 막론하고 경조사에는 빠지는 일이 없다. 햇볕에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형을 마주하면 그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형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존경하고 있었다. 올해도 형이 택배로 부쳐준 옥수수와 감자를 보는 순간 마음이 황송해진다. 그리고 그 택배 값이 적지 않은 비중으로 마음에 다가온다. 작년에는 형의 처제가 차로 우리 집을 지나면서 전해주었었다.

 

 없을 때 한 푼을 저축하고 있을 때는 여유 있게 저축하라는 퇴계선생의 말은 현실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시대를 초월한 삶의 지혜인 셈이다.


 


 관절염으로 키가 작은 형을 기우뚱하게 만든 형의 왼쪽 다리가, 언제까지고 형을 든든히 지탱해주길 간절히 기원한다. 





   2006. 9. 4

  • 07-02-04 원정
    제가 요즘 돈을 쉽게 쓰면서 마음이 가는대로 돈을 쓴다며 자위했는데....
    한 번 제 돈 씀씀이를 점검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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