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자 바라보기

원형이정(8) 까불이1

07-01-29 지나다가 1,325


원형이정(8) 까불이



 


 광천의 영보암은 고향 같은 아련함으로 늘 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청주에서 광천까지는 시외버스가 직통이 없어서 천안에서 갈아타야하고, 따라서 편도만 4시간 이상이 걸린다. 나이 40이 훨씬 넘은 어느 날 그 향수를 억제하지 못하고, 혼자서 청주에서 무작정 광천의 영보암을 향하여 출발한 적이 있다. 광천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예상치 않던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토록 찾고 싶었던 영보암을 지척에 두고서는, 우산을 사서 빗속을 헤치고 암자로 달려가 그리웠던 마음을 시원히 달래는 대신에, 나는 먼저 터미널 근처의 허름한 음식점을 찾아 막걸리를 시켰다. 그리곤 거기서 옛 생각을 하며 한 잔 두 잔 향수를 음미하다 막걸리에 취해서 그냥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웬지 영보암과 가까운 데서 마음속의 애잔함을 더 붙들고 싶어 하다 취해버린 것이다.

 

 그것으로, 영보암에 대한 포근한 향수를 몇 년 더 간직할 수 있었다. 그 뒤로 보령을 다녀오는 길에 들렀던 영보암은 진입로가 암자까지 포장되어있어서 찾기는 편해졌으나, 개축되고, 스님들도 비구니에서 비구로 바뀌어 그 옛날의 정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음속의 고향을 애써 찾아서는 잃어버린 셈이다.





 어려서 영보암에서나 친척들 간에 나는 까불이로 통했다. 내가 등장하면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어 우당탕탕 정신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비슷한 또래들과 놀다보면 문짝이 넘어진다거나 무엇이 깨진다거나, 심지어는 천장에 달린 전등까지도 베게나 방석에 맞아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자기네끼리 조용히 잘 놀다가도 아저씨(또래 중에서는 내가 항렬이 높았다)만 오면 정신이 없어진다는 말은 내가 친척집에서 자주 듣는 메뉴였다.





 영보암의 우물 위에 모셔져있는 작은 미륵부처는 내가 수시로 깔고 앉는 방석이었고, 법당 안을 들쑤시고 다니다보면 무엇이든 깨져나가는 것이 있기 마련일 터, 심지어는 모셔놓은 부처님도 나 때문에 많이 시달렸을 것이다. 주지스님의 증손자였으니 아무도 내놓고 혼내질 못하였을 것인데, 결국에는 증조할머니인 주지스님이 몸소 빗자루를 들고 궁둥이를 타작하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암자의 비구니들이 어린 내 눈에는 도무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되질 않는 것이었다. 특히나 주지스님의 상좌 중에서 한 어린스님이 영 궁금하던 차, 어느 날 해우소를 가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내 무르익은 장난끼와 호기심이 결탁을 했다. 암자의 해우소는 넓었다. 판자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대 여섯 발자국 뒤로 변을 보는 널빤지가 있었고, 그 뒤로는 장작을 때고 난 시꺼먼 재가 내 키의 몇 곱으로 쌓여있었다. 그 스님이 일을 볼 때쯤을 계산해서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가 스님이 쪼그리고 앉아있는 모습을 나도 같이 쪼그리고 앉아 마주보며, 평소 궁금하던 곳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스님의 연배가 그리 많지 않아 화가 나서 쫓아오는 걸 나는 냅다 도망 다닐 수 있었고, 급기야 어린스님이 울면서 주지스님께 일러바쳤던 것이다. 나는 영악스럽게 맞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주지스님도 결국엔 궁둥이 타작을 멈추고 빗자루를 손에 쥔 채 웃고 말았다.





 어느 날 암자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나이 든 스님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나를 보고 가부좌를 틀고 30분을 앉아 있으면 자신이 삼배를 올리겠다고, 그리 해보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서 늘 양반다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뭐 힘든 것도 아니란 생각에 30분을 꼼짝 않고  앉아있었다. 그 스님은 약속대로 내게 삼배를 하며 '부처님 나셨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고. 아마 한 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이리저리 강아지처럼 촐랑거리며 사고치고 다니는 내 버릇을 고치려 했는지는 몰라도, 약효는 없었다.





 나의 이 까부는 습관은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갑자기 칼로 자르듯 멈추어져 버렸다. 사실은 내가, 언제 이 습관을 멈출 것인지 계기를 찾고 있었고, 중학교에 입학을 하였으니 이제는 멈추어도 자연스러우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언젠가 청주 KBS TV 방송 프로그램에 초대를 받고 출연한 적이 있다. 녹화된 내 모습을 보며 어찌나 말과 동작이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느린지, 스스로 무척 놀랐다. 나는 이런 느린 습관이 성인이 되어서 몸에 밴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얼마 전에 만난 삼총사였던 월세에게, 그에게 새겨진 나의 어린 모습에 대해 의외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너는 우리들이 별명으로 ‘영감’이라고 불렀어.  네가 나타나면, 저기 영감 온다. 그랬지.”




 


 언젠가 큰 집 장조카가 나에게 물은 적이 있다. 아저씨는 어려서 그렇게 까불더니 어느 날 갑자기 점잖아져서 그것이 참 궁금했다고. 나는 광천의 영보암과, 잘사는 친척집에서만 그토록 까불었던 것이다. 영보암에서는 엄마와 떨어져 혼자 있는 나를 불쌍히 여길까 봐, 잘사는 친척들의 집에서는 가난하다고 불쌍히 여길까 봐. 그것이 내가 그토록 까불었던 이유였다.


 


 까불다보니, 가만히 있으면 이상하게 볼 것 같고, 시간이 가다보니, 그것 자체로 재미가 붙어서 즐기게도 됐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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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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