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이정(7) 홍제천변의 두 기억
홍제천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시절은 아주 맑은 물이었다. 얕은 게 흠이었지 훌훌 벗고 멱 감기에는 손색이 없었다. 다만 다리 밑은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엔 이상하게 똥이 많았다. 나중에 유사한 몇 군데를 둘러보게 되면서 얻은 결론이지만, 당시는 전국 어디나 다리 밑에는 똥이 많았다. 그늘져 시원하고, 무엇보다도 은밀한 곳이라 일보기에 편했을 것이다.
이 홍제천이 평소에 물 적은 게 불만이었나 욕심을 부려 입을 한껏 벌리다 주둥이가 헐어진 적이 있다. 그 해에 특히 장마가 심했던 것 같다. 황토색 흙탕물이 넘실대는 걸 문화촌 쪽에서, 우르르 나와 있는 사람들과 함께 구경하는데, 개천변이 서서히 뚝 뚝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참 대단한 홍수였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게다. 맑은 날씨에 어쩌다 살갗에 닿는 바람의 감촉이 포근한 늦봄 쯤 되었을까. 무슨 일인지 심사가 뒤틀려 학교엘 가고 싶지가 않았다. 아마도 등교길에 집에서 꾸지람 정도 들었지 싶다. 나는 또래의 학생들이 교실에 앉아 있을 시간에 홍제천변 모래사장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할 일을 찾고 있었다.
'왜 이렇게 지루하고 할 것이 없지?'
혼자 개천가를 서성이면서 마음이 점점 답답해지자, 나는 처음으로 시간이 참으로 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곳으로 가기 전에는, 거기에 가면 무언가 꾸지람 받은 것에 대한 기분풀이도 되고, 할일이 기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던가. 그러나 내 인생에서 최초로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그 후로 나는, 몹시 아파서 거동이 힘들지 않는 한 학교를 결석한 적이 없다.
학교에서부터 다리까지의 홍제천 뚝방에는 가게들이 즐비했고, 길바닥에는 마치 시골 장날처럼 노점상들이 연이어 좌판을 벌리고 있었다. 당시에 아마 장날이 따로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뚝방 안쪽의 큰 길은 유리공장을 시작으로 연탄공장, 길 건너 목욕탕, 그리고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제법 번화가였다. 아주 어릴 때 형을 따라 구경 간 유리공장에선 기다란 쇠막대 끝에 매달린 벌건 쇳물이 신기하게도 유리로 변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근처에서 호떡을 사먹었던 기억이 있다. 어찌나 크던지 얼굴만 했다. 큰 호떡에 대한 향수는 늘 작은 호떡에 비교되어 내 기억에 오래 동안 남아있다. 왜 그리 작아져, 하나만 먹으면 충분했는데, 꼭 몇 개를 먹어야 될까라고. 이것은 연이어 라면과 함께 연상되었다. 처음 먹었던 라면의 기억은 기름기 자르르하게 때깔도 좋았고, 맛도 기가 막혔으며, 무엇보다도 양적으로 훌륭하게 한 끼를 때울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후로 점점 크기와 맛이 정비례해서 떨어졌다. 새로운 라면이 등장할 때마다, 그 맛이라도 재현 된 것일까 혹시 하는 마음에, 늘 삼양라면을 고르지만, 역시 늘 아니다.
이것도 2학년쯤으로 기억된다. 어느 날 어머니가 부업으로, 시래기를 삶아, 그 홍제천 뚝방에서 좌판을 벌린다기에 따라나선 적이 있다. 어머니를 도와드려야지 하는 신통한 마음에서였다. 엄마를 따라도 가고 싶었고. 사람들이 북적댔다. 어머니 근처를 서성이는데 바로 앞에 담임선생님이 지나가시는 것이었다. 인사를 드려야한다고 마음은 앞서는데 행동은 이미 뒤로 피하고 있었다.
기억에는 감정도 같이 묻어있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지나가버린 이 장면은, 그 뒤 참으로 오래 동안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은은히 돌덩이처럼 박혀있었다.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가슴으로 실감하게 된 최초의 기억이고, 마음속에서는 떠올라도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던 기억이었다. 내가 명상을 알고 삶속에서 실행하기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어느 날 우연히 그 돌덩이가 사라진 걸 알 수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기억을 떠올려 보라고 주문 받았을 때, 다른 걸 모두 제치고 선명하게 떠올랐던 기억이지만, 그제야 가슴이 아닌 머릿속에서만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