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이정(6) 삼총사
우리나라 정치판에서 지역주의는 늘 문제로 제기된다. 전라도니 경상도니 해서 출신지역에 대한 우호적인 정서가 정당의 이념이나 후보의 개인적인 자질 및 능력에 우선하는 것이다. 뽑아놓고 난 후엔 실망스런 행태들을 보고 후회도 하지만 또다시 그런 경향은 재판된다. 이러다보니 정치인들도 지역주의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한 몫 더하여 노골적으로 편승하려하고.
국가적 차원의 지역주의를 장난삼아 내 이웃으로 돌려본다면 나에게 형성된 최초의 지역주의는 홍은동에서 이웃하고 살았던 삼총사에게로 소급된다. 삼총사는 이렇다. 나, 그리고 웃집의 이월세, 골목 건너 아랫집의 고태옥. 동네에는 여러 또래들이 있었지만 우리가 더욱 친해진 이유는 지금 생각하면 단순하다, 꼬맹이들이 무슨 이념이 있고 생각이 있었겠는가. 형편이 비슷한 세대가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것,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친밀도에 기여하는 공로가 컸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선 집에 들어오기 전에 ‘엄마~~~’ 하고 길게 뽑아본다. ‘왜~~’ 하고 답이 있으면 책가방을 멀리서 잘 겨냥하여 마루위에 정확히 꼴인 시킨 다음, 뒤도 안돌아보고 친구들 만나러 뛰어나간다. 그러나 엄마의 대답이 없으면, 동네방네 엄마부터 찾으러 다녔고.
우리 집 아래의 넓은 공터는 삼총사를 위시해서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였다. 대보름이면 쥐불놀이, 그 밖에 당시에 유행했던 말타기, 자치기, 망까기, 다방구, 딱지치기, 구슬치기, 공기놀이, 줄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연날리기 등을 할 수 있는, 산동네여서 비스듬히 경사가 졌고 놀이기구 하나 없었지만, 우리들에겐 최고의 놀이터였다. 겨울이면 친구들 집, 이불 속이 또한 놀이터였고 그 밖의 계절이면 활동무대가 밖으로 넓어졌다.
시간이 넉넉한 일요일이나 공휴일이면 무대는 확대되어 뒷산으로 해서 포방터로 내려온다거나, 옥천암 근처 커다란 바위에 하얗게 그려진 부처님 옆의 미끄럼바위에서 물썰매를 타는 건 양념이었고, 세검정을 지나 구기동까지, 인왕산꼭대기(당시에는 통제구역이 아니었다)는 물론, 멀리는 남산 어린이 놀이터까지 원정을 가서 나와바리를 넓혔다. 모두 걸어 다녔다. 초등학교 때 몇 번 갔었던, 남산에서 걸어 돌아올 때는, 다리가 아플수록 분명히 차비가 남아 있을 것 같은 고태옥의 바지 주머니가 몹시 궁금했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아주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아름다움을 이루는 근저에는 균형이 있다고 말한다. 균형을 갖추어야 아름답다는 것이다. 마이클 겔브의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서라』에서 안내하는 대로, 내가, 아름다움이나 경탄을 느낀 경험 10가지를 그냥 생각나는 대로 순서 없이 즉각즉각 짧게 적어보았다.
1. 자신을 바라보라. 거기에 진리가 있다.
2. 듣고, 보고, 말하는 이런 것들의 주체는 무엇인가?
3. 나는 누구인가?
4.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5. 서양음악
6. 판소리
7. 김성진의 대금정악, 김광복의 피리
8.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성
9. 인간
10.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을 급히 적은 것이니 거기에 대한 설명은 그만 두고, 이런 것들이 가진 특성의 공통분모를 뽑아 한 단어로 말한다면, 내게 다가온 느낌은 완전성이다. 플라톤이 말한 균형과 내가 느낀 완전성은 그러고 보니 서로 통하는 게 있다. 균형이 있을 때 완전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그것은 순수함이다. 균형에서 완전성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순수함에서도 그 자체로 완전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순도가 높다는 게 완전하다는 것 아닌가.
우리 삼총사의 우정이 아름답게 기억되었던 것은 단순한 지리적 요인인 지역정서를 넘어 선 순수함이 있었던 것이다. 한 여름 반바지 차림에 고무신 신고 문화촌을 지나오면서 ‘숙이약국, 희정이네 미장원’(두 집이 연이어 붙어있는 가게였다)을 보며 우리는 나중에 3층 건물을 짓고 쌀가게와 슈퍼와 약국을 하면서 같이 살기로 약속했었다.
순수함 자체 역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긴 하지만, 거기엔 조건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다. 세월이 지나 서로에게 덧붙여진 많은 것들의 간격이 넓어져도, 그러한 간격의 어떤 것도 뛰어넘어서 우선하는 순도 높은 우정이 지금도 끈끈히 우리를 연결하고 있다. 친구를 깡통에 비유했던가, 찌그러질지언정 깨지지는 않는다고. 그 끈끈한 순수함은 결코 깨어지지 않고, 설사 깡통이 찌그러지더라도 언제고 다시 펴서 새로이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힘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 동문의 모임도 지역, 연고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순수함이라는 아름다움이 있다. 친구와 선후배라는 순도 높은 정서가 그 어느 조건보다도 우선하기 때문에. 그래서 만나면 대뜸 말을 놓고 동문이라는 그것 자체로 완전함을 인식하며 정서적으론 포근함을 느낀다.
이런 동문이 없다면 우리는 각자의 처지에 맞고 각자의 기호에 부합되는 끼리끼리의 모임에서 안정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것대로 장점도 있지만, 폐쇄적이고 자신만의 소극적인 만족에 안주하는 닫힌 세계에 갇힐 수 있다는 단점 또한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아무런 공통점도 없이는 관계가 형성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면서도 깊은 유대를 느끼고, 삶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동문 모임에 시간이 나면 참석해서, 그것 자체로 온전하게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간, 즉 좋은 시간을 같이 보내야겠다는 마음이 솟는다. 플라톤은 말했다.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라고.
2006. 7.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