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자 바라보기

원형이정(3) 영보암1

07-01-22 지나다가 1,381

원형이정(3) 영보암





‘다행히 홍은동 산번지(山番地) 철거민촌에서 집터 한자리를 얻는 데 성공했다. 터 한귀퉁이에 천막을 쳐서 식구들을 기거케 하고 종조와 당숙과 목공 아저씨는 곧 공사에 착수했다. 엄동을 무릅쓰고 공사는 강행되었다. 급한 대로 방 한간과 부엌을 만들었다. 건넌방에 구들이 놓인 것은 훗날의 일이고, 두 방 사이에 마루가 놓인 것은 더욱 훗날의 일이었으나, 신문지로 초배를 한, 간반짜리 안방에 식구들을 몰아넣던 그날로써 당숙은 오랜 셋방살이에 종지부를 찍었다.’





문희 형님이 「원형이정」에서 기술한 홍은동의 우리 집의 모습이다. 단칸방이었을 때, 어느 비 오는 날, 세숫대야를 비롯하여 양재기들을 여기저기 펼쳐놓고 천정에서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비 갠 뒤 구멍이 난 루핑 지붕을 메우는 데는 타마귀라는 시커먼 접착성 물질을 덧칠하는 데, 무게가 있는 어른이 올라가면 무너질 위험이 있어서 어린아이였던 내가 올라가 시키는 대로 비새는 곳에 발랐던 것도 기억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1-2년 쯤 전이었던 것 같다. 집에 웬 스님이 한 분 찾아오셨다. 그리고 나와 내 바로 위의 셋째 형(다섯 살 차이가 난다)이 그 스님을 따라 충청남도 광천에 있는 영보암이라는 암자로 갔다. 나는 그때부터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 암자에서 살았다. 집에서는 그 스님을 할머니라고 불렀는데 암자에서는 스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코치를 받았다. 그 스님은 사실 내 증조할머니였다. 법명은 자호(慈毫). 충북 진천분이라 진천할머니라 불렀다.





증조할아버지는 당대에 거금을 모으셨고, 충청남도 보령, 서천, 부여의 3개 군을 아우르는 큰 지주였다는데 다섯 분의 부인이 계셨다. 진천할머니는 그 중 막내 부인으로, 슬하에 자식이 없어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유산 받은 걸로 광천에 암자를 지어 그 곳의 주지로 말년을 보내셨던 것이다.





나는 내가 왜 어려서 그 멀리 떨어진 암자에서 살았는지 이유를 몰랐다. 처음에는 멀리 간다는 것에 좋았고, 살면서는 마침 그곳에 비슷한 또래의 계집아이가 하나 있어서 좋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방학을 으레 광천의 암자로 가서 보냈다. 스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엔 암자는 조계종에 헌납되었고, 나도 할머니가 안 계신 고로 자연 발이 끊어지게 되었다.





훗날 스스로 판단하게 되었지만 내가 초등학교 입학 전 집에서 그토록 멀리 떨어진 암자로 내려간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집이 너무도 가난해서 밥 식구를 줄였던 것이다. 모처럼 서울로 나들이 나선 출가하신 증조할머니가 손자가 사는 모습이 하도 딱하여 끼니를 줄여주려고 증손자를 자신의 암자로 데려갔던 것이다.





광천의 영보암은 나에게 아득한 향수가 깃들은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암자 뒤를 주산이 포근히 감싸고 있는 앞마당에 서서 전방을 바라보면, 저 멀리 개천 넘어 기차선로가 보이고, 그 뒤로 구비구비 산자락이 펼쳐지며 그 산자락위로 벌겋고 둥근 해가 솟아오르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장관이다. 어쩌다 장항선 열차를 타고 오르내릴 때면, 꼭 열차 안에서 향수에 젖어 창 밖으로 저 멀리 제법 웅장한 산 속에 묻혀있는 영보암을 찾느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을 채우는 이런 아리한 추억들 중에서, 잠깐 번개처럼 오직 단 한번 스쳤으면서도 무언가 이러한 추억들과 궤를 달리하며 뇌리에 깊숙이 남아있는 독특한 추억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내 자신에 대한 최초의 자각이었다. 어느 날 암자 옆 마당에 서서, 축대 밑에 뿌리를 두고 눈앞에 높이 우뚝 버티고 선 백일홍을 쳐다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던 것이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어린 가슴에, 그 날 짧게 스쳤던 이 궁금함은, 먼 훗날에 다시 찾아와 나로 하여금 정처 없이 세상을 헤매는 방황의 강으로, 고되게 자아를 단련시키려는 양 끝도 없이 넘실대는 파도가 넘치는 바다로, 마침내는 평안의 정착지로 안내하는 뗏목이 된다.








2006. 6. 24

  • 07-01-22 원정
    광천에 오서산이라고 있지요.
    산에 오르다보면 절이 있는데... 장항선 기차선로가 보인다고 하시니 그 절은 아닌 것 같고...

    오서산 정상의 가을은 갈대로 아름다운데....

    제 고향 집은 충남 서산입니다.
    그래서 광천이 그리 멀지 않지요.
    언제 광천을 들리면 한 번 가고 싶군요.
    영보암에....
    그 곳에서 백일홍을 한 번 보고 싶군요.
  • 07-02-12 나나 수학과 러시아21,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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