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님으로부터 평소에 쓴 글이 있으면 올려달라는 제의를 받고 '더 이상 올릴 만한 글이 없는데...'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최근 초등동문카페에서 써왔던 글이 떠올났다. 얼마전에, 일주일에 한 편씩 올렸었는데 12편을 쓰고나니 동문카페가 곡절 끝에 두 쪽이 났다. 그러니 나도 더 이상 무언가 끄적거릴 에너지가 나질 않아 집어치웠다. 당시 기억이, 글을 올리게 되니 자주 찾게 되고, 또 애정을 가지고 힘쓰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곳에 올리게되면 또 글이 이어질 것 같아 마음을 내 본다.
원형이정(1) 홍은동
내 일가 중에 이문희(李文熙)라고 가까운 형님뻘 되는 글 쓰는 분이 있었다. 술을 좋아해서 간경화인가 간암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그 분이 쓰신 글 중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이란 단편이 있다. 원형이정은 주역의 첫 괘인 건괘(乾卦)를 설명한 것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역은 동양의 고전 중에서도 최고의 경전으로 꼽히는데, 우주론에서부터 인간사의 모든 이치를 담고 있는 주역의 첫 말씀이 원형이정인 셈이다. 이는 계절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서대로 순환하며 반복되듯이 우주에 존재하는 세상의 모든 것도 일정한 법칙으로 순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노인이 되어 결국에는 죽는 인간의 모습도 원형이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문희의 소설 원형이정은 내 아버지의 일생을 단편으로 그린 글이다. 아버지는 원래 충청남도 보령 분이시나 말년을 홍은동에서 보내셨으니 자연스럽게 그 글에는 홍은동이 짧게 언급된다. 우리는 홍제초등학교의 동문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이 아마도 홍은동에 살았을 것이다. 학교의 건물이 행정구역상 홍은동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동네는 홍은동인데 흥은초등학교가 아니고 홍제초등학교일까? 다리건너 홍제동에는 이상하게 홍제초등학교가 없고 인왕초등학교가 있다. 이 번 동문 모임에서 (31)김정웅 후배님의 덕분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오래된 지도를 보았더니 홍은동이 홍제외동으로 표기되었더라는 것이다.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 1동 산 71번지 10××호. 19통 4반. 내가 살았던 곳이다. 뒷번호는 잘 기억이 안 난다. 홍제초등학교에서 북쪽을 보면 북한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시작되는데 그 제법 가파른 산줄기 꼭대기에 물탱크가 있었다. 지금의 풍림아파트 윗쪽 이다. 언젠가 가보았더니 멋진 공원으로 변해있었다. 그 물탱크에서 50여 미터 쯤 북쪽으로 위치한 곳이 우리 집이었다. 산등성을 중심으로 동서로 동네가 구분 되는데 서쪽으로 향한 꼭대기에 있었으니 집에서 앞을 바라보면 서쪽으로 작은 산이 보인다(미미예식장 건너편이 된다). 우리는 그 산을 바로 앞에서 보인다하여 앞산으로 불렀다. 앞산 저 쪽은 채석장으로 당시에 험하게 산이 파여져 있었다. 채석장을 조금 지나 우측으로 돌아 올라가면 맑은 계곡이 있어, 어려서 그곳으로 빨래하시러 가는 어머니를 따라가곤 한 기억이 난다. (26)정명수 후배님에 의하면 그 곳의 이름이 ‘논골’이었다. 논골, 이름은 기억은 나는데 어딘지는 몰랐었다.
유진상가는 맑은 물이 흐르는 개천이었다. 홍제동과 이어주는 다리 밑 근처가 우리들이 노는 무대의 일부였다. 여름에는 발가벗고 물장구치며 놀았고 겨울에는 썰매를 지쳤다. 당시에는 어린아이들도 활동무대가 제법 넓었다. 동서로는 지금의 구기동유원지에서부터 논골까지, 남북으로는 인왕산 꼭대기에서부터 녹번동을 돌아 올라가는 계곡(아마도 독박골이라 불렀지 싶다)까지가 우리들의 무대였다. 사방이 모두 산과 들이었으니 끼리끼리 어울려 돌아다니다 보면 끼니때를 놓치기가 십상이어서, ‘제발 저녁밥 먹을 때까지는 집에 돌아오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자주 들은 기억이 난다.
두 줄로 서있는 코찔찔이 학생들의 이름을 주욱 불러오시던 아리따운 여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네”
하고 대답을 했더니 쳐다보시곤,
“너 말고 네 동생 어딨니?”
내가 원체 어려서부터 키가 커서 초등학교 입학을 위한 예비소집에서 맨 뒷줄에 서있던 나를 보고 아마도 동생을 데리고 온 형쯤으로 아셨던 것 같다. 홍제초등학교의 최초의 기억이다. 당연히 당시는 홍제국민학교였다.
후배님들이 열심히 동문 카페의 활성을 위해 열정을 다하는 걸 보니 나도 삶의 현장에 함께 하고픈 마음이 난다. 장마당을 지나치는 구경꾼에서 좌판을 벌리고 직접 물건을 팔아보긴 아마도 내 인생에 처음이다. 이문희의 단편소설 원형이정이 그의 당숙인 내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 본 이야기라면 내가 쓰는 원형이정은 내가 들여다보는 내 삶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2006.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