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마르겔스 총독의 귀국은 얌니아 사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 나머지 궁여지책으로 자진 귀국을 원했거나 황제로부터 문책성 소환을 당한 경우일 것이다.
총독의 경질에 대해서 마케도니아, 아시아와 같은 원로원 속주는 의회의 심의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시일이 걸렸다. 그러나 히스파니아, 시리아, 유대와 같은 황제 소유 속주는 총독이 수시로 바뀌곤 했다. 그러니 그동안 왕 행세를 하지 못하던 아그립바로서는 기대를 걸만 했던 것이다.
‘이 참에, 유대 전역을 차지해야지.’
빌립은 얼마 전에 죽었고(A.D34), 안티바는 유배당했으며(A.D39), 총독마저 귀국한 마당에 호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당신이 예루살렘에 버티고 있으면 싸우려는 자들이 몰려옵니다.’ 하던 총독의 말이 생각나서 유대 전역을 맡긴다는 황제의 윤허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마르겔스 총독은 퇴임 인사차 예루살렘을 방문한 자리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로마의 통치는 대부분 현명하고 공평한 것이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로마의 실책에만 반응하고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를 파멸의 구덩이에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역사를 치명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는 3년여 재임기간 동안 나름대로 연구한 모양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로마군 지휘관들은 안식일 문제로 말썽부리는 유대 젊은이들을 징집 대상에서 제외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군 대부분이 무식한 용병임에도 불구하고 유대 여인을 겁탈하거나 양민을 괴롭히는 일 따위가 없도록 군율을 엄하게 적용시켰던 것이다.
더구나 로마제국은 갈리아,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와 같이 북방 정책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동방의 예하 군단은 아르메니아, 파르티아왕국의 견제세력으로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었을 뿐 선제공격을 한다거나 유대와 같이 소수민족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총독의 재량에 맡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B.C63)한 경우를 보더라도 장군이 나바테아를 다녀오는 길에 거짓을 고하는 자들을 응징하려는 의도에서 그리 하였을 뿐 유대를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성소에 보관 중이던 다량의 금과 거룩한 등대와 고귀한 그릇과 향료, 그리고 2,000달란트에 달하는 돈을 보았으면서도 전리품으로 빼앗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로마의 통치는 현명하고 공평한 것이오. 하던 총독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마르겔스 총독은 이런 말도 했다.
“로마의 보호를 받고 있으면서,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를 망각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상상이나 해 보셨습니까?”
그리고는 유대인들에게 따라붙는 수식어, ‘무절제한 상상력과 분별없는 머리를 가진 자들’이라는 야유 성 발언을 해가면서 현실을 직시하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얌니아 사건 때문에 조기귀국을 해야 하는 총독 입장에서는 그 정도로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돌아갔지만, 그의 말마따나 로마정세에 어두운 일부 유대인들은 유피테르 신상 앞에서의 난동을 대단한 일이나 되는 것처럼 선전하면서 맛디아스 사건(B.C4)을 들먹이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린학생이 여인의 뜰에 세워져 있던 독수리 석상을 부서뜨리자 학생을 잘못 가르친 죄로 맛디아스가 잡혀왔고, 그는 모세가 야훼께 배우고 자신이 깨달은 그 율법을 우리가 존중하고 모세가 써서 후손들에게 넘겨준 그 율법을 우리가 당신 명령보다 더 중요하게 준수하였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당신이 우리에게 괴롭힐 수 있는 모든 형벌을 기쁨으로 받겠습니다. 이렇게 항변하다가 화형 당한 이후, 독수리 석상이 다시 세워지지 않아 적과 싸워 승리한 자로 선전하기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속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 헤롯이 여인의 뜰에 독수리 석상을 다시 세우려 하자 성전 쪽 사제들, 보에뚜스 시몬의 후임으로 대제사장 지위에 오르게 된 셋의 아들 예수와 안나스 계열의 사제들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해왔다.
“황제를 위해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망루에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펄럭이게 한다거나, 독수리 석상을 세워 속주로써의 예를 갖추어야 하는데 사제들은 깃발이나 석상 대신 조석으로 황제를 위한 제사를 드리겠다는 제안을 해 온 것이었다.
할아버지 입장에서도 독수리 석상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자가 다시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번제단은 성역 안에 있기 때문에 제사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 때 사제들은 서쪽 시온 산을 가리키면서 ‘하스몬 궁전이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 감시원을 두십시오.’ 하더라는 것이었다.
딴은 맞는 말이었다. 하스몬 사람들은 번제단을 위시해서 성전 뜰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띠로페온 골짜기 건너 시온 산 중턱에 궁전을 세워 사제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왔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13명씩 조를 편성해 번갈아 시중드는 상번제 시간에 사제들은 황제를 위한 별도의 의식을 치르게 되었으며, 이러한 의식은 40여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아침에도 예외 없이 행해졌을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