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굴라 등극 이후, 황제의 환심을 사려는 자들에 의하여 도시마다 유피테르 신상이 세워지고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얌니아(야브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시기에, 칼리굴라 황제가 병석에 누워 7개월 동안이나 고생을 했다. 이 때 얌니아의 그리스인들이 신상 앞에 모여 쾌유를 비는 의식을 치르는 가운데 일단의 유대인들이 달려가 소란을 피웠다(AD39).
이 사건은 바리새인들 본고장이기도 한 얌니아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그들의 내분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했다.
바리새인들은 성전보다는 경전을 내세우는 입장이고,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와 같은 5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낱권으로 된 또 다른 책을 포함시켜 도합 39권의 경전(70인역)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이것으로 사두개파 사람들과 차별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중에는 히브리어로 되여 있는 책자에 방언에 불과한 아람어로 내용을 추가한 책자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다니엘서의 느부갓네살 왕 꿈 이야기가 그것에 해당된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진술 하리이다.
왕이여, 왕은 열 왕의 왕이시라 … 곧 그 금 머리입니다.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셋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철 같으리니 철은 모든 물건을 부서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철이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서뜨리고 빻을 것이며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을 보셨으니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 이 열 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나이다. … ’
그런데 이와 유사한 내용이 그리스의 신화 속에도 있었다. 헤시오도스의 시집에 볼 것 같으면 ‘인간의 5세대’라 하여 신들은 먼저 황금의 종족을 만들었고, 이어 백은의 종족, 청동의 종족, 영웅들, 철의 종족 등을 차례로 만들었으며, 지금은 철의 종족의 세대로, 노동과 괴로움으로 차 있어 마침내 화와 자멸의 길을 가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그리스 신화에서 인용한 대목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힐렐파 사람들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으니 그대로 수용하자는 입장이고, 비록 힐렐의 문하에서 학습을 받았으나 반론을 제기하게 된 샤마이(BC50~AD30?)는 그 책자를 제외시켜야 한다면서 더 나아가 헬라어 번역본 자체를 폐기 처분해서 사람들이 경전을 함부로 해석하지 못하게 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본래 바리새파 출현은 이스라엘의 부흥이 성전 재건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5경을 면밀히 살피고, 기도나 금식 등의 새로운 방법을 동원해서 성취하자는 하시딤 운동의 시작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성의 뜻에서 동참하려 했으나 바벨론 출신 힐렐과 같은 사람이 예루살렘에 유학 오면서 하시딤 운동은 본래의 취지에서 어긋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구나 학문에 일가견을 이루게 된 시점(BC 40경)에서 힐렐은 다음과 같은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공부하는 것이 사실상 예배하는 방식이다. 배우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라.”
그리고는 시중에 나돌고 있는 구전이나 설화집에 관심을 가지면서 39권(구약)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던 샤마이는 성전에서의 의식을 어떻게 학습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했던 것이다.
성전은 다윗 이후 유대인들의 삶과 사상의 중심 역할을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지성소는 야훼께서 현존하시는 곳이기 때문에 율법의 규례에 따라 정결의식을 치룬 대제사장이 예복을 차려입고 조심스럽게 들어가는 곳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폼페이우스 장군의 지성소 유린사건(BC63) 이후 성전에 대한 기대심리가 무너지면서 허탈감에 빠지게 되자 바리새인들이 경전 쪽으로 관심을 쏠리게 했던 것이다.
특히 힐렐은 이 일에 주도적 역할을 해 왔으며 율법에 무지한 사람은 깊은 신앙심을 가질 수 없다는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하면, 성전 건물을 바라보면서 만족해하던 표적 신앙이 어느 때부턴가 학습을 통해 지식을 숭상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고, 지식이나 학문을 이야기한다면 그리스인들을 따라잡을 수 없으니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샤마이파 사람들에 의하여 얌니아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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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에는 사소한 일도 악재로 작용하기 마련인데 얌니아 사건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도처에서, 유대인들이 그리스인들로부터 보복성 공격을 받았으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폭도들이 상점에 들어가 물건을 약탈하거나 부두에 정박 중인 상선에 불을 지르고 유대인 거주지에 몰려가 이집트를 떠나라는 구호를 외쳐대기까지 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아그립바는 블라스투스를 보내 현지 사정을 알아보도록 지시를 내렸다.
블라스투스 보고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 거주 유대인들과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해묵은 감정싸움으로 갈등의 골이 깊었으며, 얌니아 사건은 빌미에 지나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프톨레미 왕조가 퇴조기에 접어들면서 디아스포라들이 자치권을 행사하게 되고, 리시마쿠스와 같은 거부가 생겨나면서 유대인들이 부를 독식한다는 원성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레온토폴리스 성전 쪽에서는 대제사장 오니아스를 내세우며 전통성을 주장했으나 회당 쪽에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전 쪽 사람들이 회당에 몰려가 회당장 필로(BC10~AD45)를 성토하는 바람에 조용할 날이 없다는 것이다.
아그립바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가야바와 상의하는 입장이라서 필로에 대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가야바는 바리새인들의 파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힐렐와 샤마이 외에도 필로를 중심으로 하는 헬라파가 또 있습니다. 그들은 빌라도 총독 시절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필로는 그리스학문 특히 플라톤 철학에 조예가 깊은 자로써 유학은커녕 단 한 번도 순례의 행렬에 끼여 예루살렘을 방문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도 모르는 주제에 헬라어 번역본만 가지고 제멋대로 경전을 해석하려 든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육체와 영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감각과 이성 등으로 구분하면서 후자를 더 가치 있게 여기는 플라톤 철학의 시각에서 유대교에 접근하기 때문에 인간 창조의 단계에서도 육체가 있기 이전부터 보이지 않는 영혼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유대교의 본질과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배교 행위라면서
“영혼이 무엇입니까? 육체에 깃들어 있으면서 마음의 작용을 관장하고 생명을 부여한다는 비물질적 실체를 뜻하는 말 아닙니까?”하고 묻기도 했다.
듣고 보니 이상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로마인들은 천지간의 모든 사물이나 장소에는 그것에 내재하는 비인격적인 신 또는 영, 누멘이 있다고 여겼는데 그 누멘을 은연중에 받아들인 꼴이 되고 만 것이었다.
가야바는 또 다시 갈릴리 출신 젊은이 예를 들면서, 유대교의 정수에 해당하는 생명사상을 고취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학설을 끌어들여 유대교와 접목시키려 하기 때문에 이단의 시비가 발생한다면서
“이제 그들은 시체를 숨기지 않고도 부활을 선전하게 되었습니다.” 했다.
영혼 이야기는 부활론자들에게 활로를 열어 준 셈이라는 것이었다.
어찌되었거나 알렉산드리아의 사건은 그곳 주둔 로마군의 간섭으로 수습되긴 했으나 아피온이란 자가 유피테르 신상을 제작하여 회당에 세우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또 다시 문제가 발생했으며, 이 때 유대인들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던 아빌라우스 플라쿠스 이집트 총독이 아피온 편을 들어주는 바람에 회당에 신상이 세워지고 말았다.
이에 그곳 유대인들이 신상 철거를 위한 탄원서를 마련하여 황제를 찾아 나서자 아피온이 한 발 앞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올렸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로마제국에 속한 도시마다 유피테르 신상을 세우며 예물을 드리고 있으나 유대인들은 황제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신상 앞에서 기도하는 것 자체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자들입니다.’
이런 내막을 알 턱이 없는 필로는 사절단을 이끌고 황제를 찾아 나섰으며, 불라스투스도 동행한 가운데 황제를 배알한 자리에서
‘저 자들이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는 그 누군가를 위하여 나를 신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냐?’ 트집을 잡는 바람에 70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먼 길 마다않고 달려왔던 필로는 유피테르 신상 이야기를 꺼내보지도 못한 채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밖에 나와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황제가 우리에게 나쁜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이 확실하나 이는 야훼를 자기 적으로 삼은 것이나 마찬가지니 걱정할 것 없네. 우리 다 같이 용기를 내도록 합시다.”
그러나 아무리 속이 상하더라도 쉽게 내뱉을 말은 아니었다.
만에 하나, 황제가 이 말을 전해 듣기라도 한다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