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왕 행세를 하지 못하는 아그립바를 비웃기라도 하듯 왕이 될 사람은 아그립바가 아니라 안티바라는 소문이 자자했었다.
헤로디아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더라고 했으니 그녀가 퍼트린 소문이 분명했다.
‘안토니아의 집사 노릇이나 하던 사람이 왕이 되다니 웃기는 일 아닙니까? 그가 돌아와서 무엇을 했습니까? 왕은 아무나 하나요?’
그녀가 이토록 무시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게르마니쿠스의 참모였던 남편이 전사했다는 통보를 받기 무섭게 그녀는 안티바와 재혼을 했다. 이때 아그립바가 나서서 적극 반대를 하는 중에 성사된 일이었다. 숙부와 질녀 사이의 결혼은 가당치도 않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때부터 동기간의 우애는 사라지고 절교하다시피 지내오다가 아그립바가 왕 칭호를 받았다고 했으니 헤로디아의 심사가 꼬일 만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헤로디아와 안티바가 왕 칭호를 받을 요량으로 로마를 향해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그립바로써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 칼리굴라 황제가 자신에게 내린 왕 칭호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단지 호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유대에 또 한사람의 왕이 등장하게 될 판이었다. 그는 서둘러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
‘황제 폐하, 안티바의 병기고에는 갑옷과 무기가 쌓여있습니다. 더구나 수도 없이 많은 식객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평화를 구현하려는 팍스 로마나 정책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 ‘
이렇게 시작된 글은 마치 로마에 대항해서 역모라도 꾸미고 있다는 식의 의심을 받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이처럼 안티바에 대해서 과장된 표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전에 사용하던 무기를 여태껏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미망인이 된 헤로디아와 안티바가 드러내 놓고 애정행각을 벌리는 동안 그 꼴을 보다 못한 아래다 공주가 이혼을 결심하고 나바티아로 돌아갔다. 안티바의 장인 되는 아레타스 왕은 크게 화를 내면서 공주의 지참금으로 주었던 마케루스를 돌려달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나 유황온천으로 유명한 마케루스를 돌려주지 않으려 하자 안티바는 나바티아인들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 당시 안티바는 대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밖으로는 나바티아인들의 공격을 막으랴, 안으로는 광야의 수도원 엣세네인들이 헤로디아 문제를 빌미삼아 도전해 왔기 때문이었다.
엣세네인들은 음행, 탐욕, 타락이라는 세 마리 뱀과의 전쟁을 선포한 중에 있었다. 이들은 일부다처제,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재산, 아주머니와 생질의 결혼과 같은 부도덕한 행위를 비난하는 자들로서 두 사람은 그들의 표적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특히 세례요한은 사생결단을 하자고 대들었기 때문에 그를 죽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에 항의가 빗발치자 두 사람은 마케루스를 포기하고 갈릴리 지방의 디베리아로 거처를 옮기고 말았던 것이다.
이처럼 안티바에 대한 정보를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던 아그립바는 그가 왕 칭호를 받으려 로마를 향해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 순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빠른 배를 빌리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보다 먼저 황제를 만나야 해.”
불라스투스에게 편지를 쥐어주면서 이토록 당부까지 했다. 그리고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그가 돌아와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어찌되었나?’
“유배지로 잡혀갔습니다.”
“헤로디아는?”
“로마에 남아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으나 사양을 하더랍니다. 황제시여! 제 남편이 많은 병기와 갑옷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반역을 도모하려는 자들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갈릴리는 본래 그런 곳입니다. 바라옵건대 제가 남편과 함께 노년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는 유배지로 따라 갔다고 합니다.”
- * -
왕 칭호를 욕심내면서 황제를 찾아 나섰던 안티바는 갈리아의 루그두눔(리용)에 유배당하는 신세(A.D39)가 되고, 아그립바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에 대해서도 간섭하기 시작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축제기간 중에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된 마르겔스 총독이 아그립바와 대면한 자리에서 충고 비슷한 말을 했다.
“예루살렘에는 병기를 만드는 철공소나 무기고가 없는 곳입니다.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망루에 세워지는 것마저 싫어하는 곳입니다.”
그리고는 이런 말도 했다.
“왕 행세를 하려는 당신이 예루살렘에 버티고 있으면 싸우려는 자들이 몰려옵니다.”
마침, 바티아국에 속한 아디아베네의 왕자들과 담소를 나누는 자리라서 아그립바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무담당 내시도 함께 있었다. 그동안 귀빈들의 내방을 안티바와 헤로디아가 맞이했으나 그들 내외가 없는 지금에 와서는 아그립바와 부인 키프로스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총독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특히 안티바가 없는 갈릴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싸우려는 자들이 언제 본색을 드러내면서 달려올지 모를 일이었다. 갈릴리는 본래 그런 곳이었다.
갈릴리는 갈릴.하.고임이라고 불렸으며, 이는 이교도의 땅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쪽에서 본다면 사마리아보다도 못한 지역이다. 사마리아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변방 또는 외지로 차별했다. 더구나 가이샤라 항구나 육로의 시돈과 띠로를 거처 외국의 사상과 문화가 밀려오다가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못하고 소용돌이치는 곳이다.
이처럼 경계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던 갈릴리가 예루살렘의 실세와는 무관한 가운데 유대에 합병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왕자의 난이 발생했을 당시 모친과 형에게 불만이 많았던 아리스토불로가 갈릴리의 토착세력 에제키아와 연대하면서 나라를 세우려 했고, 그는 은연중에 왕 행세를 하다가 폼페이우스 장군의 포로가 된 것이다.
장군은 로마에 돌아가면서 아리스토블로를 인질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히루카누스를 대제사장에, 이두메 지역의 통치자 안티파테르에게는 유대의 행정권을 맡겼으며 안티파테르는 자신의 장남 바사엘을 예루살렘에 파견했으며, 차남(헤롯)을 갈릴리 지역의 행정관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안티파테르가 유대인 말라쿠스의 만찬에 초대를 받고 독살을 당하자(B.C43) 헤롯이 달려가 원수를 갚는 동안 안티고누스가 또 다시 갈릴리의 토착 세력들과 연대하면서 예루살렘 공략에 나섰던 것이다.
더구나 바사엘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던 수구세력들이 성문을 열어주는 바람에 안티고누스와 그들 무리는 쉽사리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도 못한 채 바사엘이 죽임을 당했고, 헤롯은 유대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 후, 헤롯은 이집트에 머물면서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주선으로 로마의 실세 마루쿠스 안토니우스와 교분이 두터워지게 되고, 다시 유대로 돌아와 갈릴리지역을 평정하면서 토착세력 에제키아를 죽였던 것이다.
아겔라오 시대에 들어와서도 에제키아의 아들 유다가 대를 이어 도전해왔다(A.D 6). 그들의 세력이 너무 막강해서 시리아 총독 바루스에게 도움을 청했으며, 총독이 시리아 주둔 병력을 보내주어서야 유다와 그 일당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처럼 일련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갈릴리는 이단의 지역이기도 하려니와 반역의 땅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더구나 아겔라오를 유대에서 몰아내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을 때 안나스와 바리새인들은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거짓 내용의 탄원서를 올렸다고 한다. ‘아겔라오는 어찌나 포악한지 그들의 숙적 에제키아 씨를 말려버릴 생각에 유아살해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식솔들은 여전히 갈릴리에 살고 있었으며, 안티바는 그들에게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에제키아 후손에 대해서 안티바와 달리 아그립바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기로 했다. 그래서 은밀히 사람을 풀어 알아본 바로는 유다의 자식으로 야고보와 시므온이라는 자가 있으며 그들 형제는 얼마 전 고향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중에 황당한 보고도 받았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이렇게 외치며 예루살렘에 들어온 무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그립바로서는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언제?”
“빌라도 총독 시절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자들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당시 대제사장 지위에 있었던 가야바를 찾아가 사실을 확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야바는 대제사장 직에서 물러난 다음 원로 사제가 맡게 되는 나시(산헤드린 의장)도 사양한 채 칩거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아그립바가 찾아갔을 때도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만나주지 않으려 했다.
어렵사리 만나보니 사람을 대면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요나단을 위시해서 안나스 쪽 사람들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참으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재차 묻는 말에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기야 성전 경비대 소속의 사제들이 방망이로 무장한 레위인들과 함께 순찰을 돌고, 회당소속의 랍비들은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미를 보이는 자들을 가려내는데 혈안이 되 있을 뿐만 아니라 스테반 사건(A.D 35)과 같이 말 한 번 잘못했다가 린치를 당한 경우도 있으니 유대 왕 어쩌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안토니요새의 로마 병사들은 축제기간이 아니더라도 시가지 전역을 감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가야바가 입을 열었다.
“나귀를 타고 왔다고 하지 않던가요?”
“….”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그립바는 대답을 하면서 공연한 질문을 했다고 후해를 했다.
나귀를 타고 오는 자가 어디 한 둘이며, 성전을 바라보는 순간 덩실덩실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자가 숫한 가운데 호산나 이렇게 소리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실망하면서 돌아가려는 아그립바를 붙잡고 가야바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에서는 그따위 억측이 심심찮게 나돌고 있습니다.”
“억측이라면?”
“만약 그들이 요란스러운 모습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젊은이는 현행범으로 체포되었을 것이고, 일행 중 누군가가 고발하는 번거로운 일 따위는 없었을 것입니다.”
딴은 맞는 말이었다. 그제야 가야바를 통해 빌라도 총독에 의하여 사형판결을 받은 갈릴리 출신 젊은이 사건에 대해서 소상히 알게 되었다.
가야바는 사건 발단에 대한 견해를 나름대로 요약해 들려주었다.
“사제도 아니고 랍비도 아닌 사람이 긍정적이면서도 사려 깊은 이야기를 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유대교 전통에 굳게 발을 딛고 서 있다고 말했을 경우 그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이단과 모반의 땅 갈릴리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던 중에 예루살렘에 와서도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함을 보자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왕 어쩌고저쩌고 합니까?”
“에제키아 망령이 농간을 부린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