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정상의 아고라 지역 헤롯궁을 나서서 한 참을 내려가다 보면 하스몬궁을 지나치기 마련이고, 하스몬궁은 여전히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서 성전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그러니까 두 궁전이 있는 산과 성전 산 사이에는 두로베온 골짜기가 남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 골짜기를 가로질러 크시스뚜스 다리를 건너야 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다리 위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볼라치면 경관이 좋아 항시 사람들이 붐볐다.
다리를 통과하고 성문을 들어서자 맞은편에는 우중충한 석재 담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백성의 뜰과 이방인 뜰을 구별하는 담장이었다. 그곳에는 그리스, 로마, 아람 문자로 새겨진 경고문이 매달려 있었다.
‘이곳을 넘을 경우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방인들을 겨냥한 경고성 문구였다. 순례자 외에도 예루살렘을 찾는 이방인들이 많은 터라 방망이로 무장한 레위인 순찰조가 영내를 돌았으며, 망루에서도 감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비가 삼엄했다. 그러니 이방인들은 성전 외벽을 따라 길게 늘어선 주랑을 구경하거나 3엘레(약1.575m) 높이의 석재 담에 붙어 서서 키 작은 사람은 발뒤꿈치를 세워야 백성의 뜰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백성의 뜰에 들어서려면 금으로 장식한 포도나무 형태의 아취 터널을 통과하기 마련이고, 그 모양새가 아름다워 미문이라 불렀다. 그 미문은 여러 층의 계단 위에 있는 관계로 계단 주변에서 탐꾸이이와 꾸빠 행사가 열리곤 했다. 탐쿠이는 가난한 자의 주발, 꾸빠는 가난한 자의 광주리라는 뜻으로 바리새인들이 주관하는 일종의 자선 행사였다. 그들은 자선행사를 위해 뜰 곳곳에 모금함을 설치하고 자금을 거두어들였다.
순례자들도 인색하지 않았다. 손을 벌리는 자들에게 동전을 던져 주거나 빵이나 과일 따위의 먹을거리를 마련해서 주었다. 따라서 미문 주변에는 거지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아그립바도 동전을 던져주고 백성의 뜰에 들어섰다. 백성의 뜰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었다. 유대 백성이라면 누구든지 이곳까지 들어 올 수 있었다. 아녀자들에게도 허락된 지역이라 미문 가까운 지역을 여인의 뜰이라 부르기도 했다.
여인의 뜰 한 편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무대가 쓸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그립바는 무대로 다가갔다. 무대는 한 눈에 뜰을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높았다. 무대는 오랜 세월 방치 된 흔적이 역역했다. 할아버지 헤롯이 대관식을 가진 이후, 그 누구도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니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철거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버려져 있었다.
무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왕관을 쓰고 오색실로 수놓은 의상을 갖춘 할아버지 헤롯의 모습이 떠올랐다. 환호하는 백성의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아그립바는 귀국하기 무섭게 헤롯궁에 보관 중이던 왕관과 오색 실로 수놓은 의상을 찾아 입고 거울 앞에서 기뻐한 일이 있었다. 그 시간 이후, 대관식을 가질 날만 고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대 바로 옆에는 독수리 석상이 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겔라오를 통해 독수리 석상사건(B.C 4)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마음이 잡착했다.
독수리 석상이 세워지게 된 동기는 유대와 로마가 선린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부정이나 하듯, 석상을 부순 자가 있었다. 할아버지 가 노환으로 고생하던 집권 말기였다.
범인을 잡고 보니 어이없게도 맛디아스 문하의 어린 학생이었다. 학생을 잘못 가르친 죄로 맛디아스가 잡혀 왔다. 그 자는 되레 큰 소리를 치더라는 것이었다.
‘모세가 야훼께 배우고 자신이 깨달은 그 율법을 우리가 존중하고 모세가 써서 후손들에게 넘겨준 그 율법을 우리가 당신 명령보다 더 중요하게 준수하였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당신이 우리에게 괴롭힐 수 있는 모든 형벌을 기쁨으로 받겠습니다.’
그 자는 로마와의 선린 관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자였다. 오히려 허망한 소리를 늘어놓는 바람에 화형을 당했으며, 그 후에도 독수리 석상이 세워지지 않아 지금에 와서는 로마와 대적해서 승리한 자로 칭송이 자자하다는 것이었다. 민심의 향방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 가는 대목이었다.
다시 백성의 뜰과 사제의 뜰을 구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1엘레(0.525m) 높이의 석재난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무릎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지막한 난간이었다.
‘지팡이, 전대 그리고 먼지가 묻은 발로 들어가지 못한다.’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표시가 띄엄띄엄 매달려 있었다.
표시가 없다하더라도 애써 성력 화 된 지역으로 들어가려는 자가 없었다. 당직 사제들도 주어진 시간 외에는 계단을 오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성전 본당이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폼페이우스 장군은 예외였다. 그는 이방인이면서도 거침없이 성소 안으로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휘장을 제치고 지성소까지 살펴본 다음, 아무도 없더라는 말을 했다. 아마도 그때의 부끄러운 기억을 지워버릴 수 없었던 사제들은 성전을 헐고 새 성전을 세우자는 할아버지 헤롯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모양이었다.
당시(B.C 64) 폼페이우스 장군은 극동 지역을 속주 화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통과하게 되었다. 이때 하스몬가문의 형제들이 패를 갈라 신정 체제를 왕정 체제로 바꾸려 한다면서 진정서를 올린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사실 확인을 위해 폼페이우스 장군이 하스몬가문의 형제들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히루카누스와 아리스토블로 두 사람은 제사장의 후손이긴 하지만 백성을 노예처럼 부리기 위해 왕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발의 사유를 말하자 히루카누스는
“제가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동생 아리스토블로는 대제사장 직을 빼앗았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세력을 끌어들여 이 같은 짓을 했습니다. 그가 폭력과 무질서의 장본인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반역을 일으켰겠습니까? 이 사실을 말해 줄 증인은 천명이 넘습니다. 제 말이 의심쩍으시면 안티파테르에게 물어보십시오.”
여기에서 천명의 증인은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이두메 지역의 행정장관으로 있던 안티파테르를 증인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아리스토블로도 가만있지 않았다.
“히루카누스가 밀려난 것은 자신의 성격 때문입니다. 그는 활동적인 인물이 못되기 때문에 백성으로부터 경멸을 받곤 합니다.”
그리고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면서
“더구나 저기 모여 있는 자들의 사주를 받거나 안티파테르와 같은 이방인을 가까이 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 유대가 이방인의 손에 넘어갈지 모른다고 근심하는 백성이 저를 왕으로 추대하게 된 것이랍니다. 게다가 왕 칭호는 부친께서 이미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폼페이우스 장군은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자주색 옷에 화려한 장식품들을 치렁치렁 걸치고 나온 아리스토블로를 꾸짖고 형과 화목 하라는 말을 남기고 나바테아로 떠났다.
그러나 아리스토블로는 모친과 형을 옥에 가두고 바리새인들 중 몇 명을 죽이기까지 했으며, 나바테아에서 돌아오는 장군을 마중 나가 500달란트 상당의 뇌물을 주려다가 이를 수상쩍게 여긴 장군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려 하자 놀란 자들이 성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아리스토블로는 포로 신세가 되고, 예루살렘은 로마군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이었다.
폼페이우스 장군은 공성 망치와 막강한 병력을 동원해서 성벽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을 점거(B.C 63)한 다음 주동자들을 죽였다. 이때 사제들은 번제단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으며 자신들은 그 일과 무관하다는 뜻에서 그리하더라는 것이었다.
장군은 본당에 들어가서 다량의 금과 거룩한 등대와 고귀한 그릇과 향료, 그리고 2,000달란트에 달하는 돈을 보았으면서도 빼앗지 않았으며 휘장을 들추고 지성소까지 살펴보게 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참으로 놀랍고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광야의 수도원 엣세네인들마저 성전에 대해서 비방을 하면서도 그 일만은 입에 담으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후 굴욕을 당한 날, 키케로가 집정관 재직 당시의 제179올림피아드 3월 어느 날을 대 속죄일로 정하고 금식과 함께 부정을 제거하기 위한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그 후로, 재앙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이 등장하면서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처럼 경고성 발언을 하면서 야훼의 진노가 당장에라도 임할 것처럼 과장해서 말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어리석은 일부 백성은 가뭄이 들거나 이상한 소문을 듣기만 해도 최후의 심판, 세상의 종말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전개되는 줄 알고 불안해 할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의욕마저 읽게 되었다.
이에 반사적으로 등장하게 된 인물이 있었으니 그를 일러 구원을 선포한 예언자라 했다. 베드로가 배신하는 바람에 빌라도 총독(A.D26~37)에게 사형판결을 받은 갈릴리 출신 젊은이가 바로 그런 케이스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아그립바는 유대교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로마에서처럼 색깔이 다른 이야기를 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들을 통해 국정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얻으려 했다. 따라서 두 그룹의 예언자, 재앙을 선포하는 예언자와 구원을 선포하는 예언자는 교리에서부터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재앙을 선포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장자로 선택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조건적인 야훼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주인과 종의 관계로 백성을 구속하려 들었으나, 구원을 선포한 예언자는 야훼와 백성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 설명하면서 아들에 관한 비유의 이야기를 남겼다는 것이었다.
이는 백성으로 하여금 긍정적 사고, 윤택한 삶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하기 위한 그 나름대로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일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