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에서 바라본 세상

호랑이 벨트와 종교9

06-09-21 나나 1,542

오마이뉴스에서 ‘전 강남대 교수는 불상에 절을 했다는 이유로 사실상 재임용에서 거부됐다.’는 기사를 읽었다.

관련기사: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61033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60809


이전에 근본주의 성향의 종교들이 세계에서 가장 번성한 곳이 우리나라라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놀란 적이 있다.

이런 근본주의는 성경의 원문을 중요시하고 그 이외의 것과는 비타협적인 성향을 지닌다.
 
하지만, 외국학자들이 볼 때 특히 우리나라에서 이런 근본주의적 시각을 가진 다양한 종교들이 크게 번성했지만 다른 지역들과 달리 이들 사이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란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이유를 유교가 이런 갈등을 완화해 주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째든 특히 한국이란 나라에서 근본주의 성향을 가진 수많은 종교들이 번성할 수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 현상을 설명한 것 중에서 내게 설득력이 있었는 설명은 도올 김용옥 선생님이 이야기한 ‘호랑이 벨트’이다.

이 설명은 호랑이 벨트와 샤머니즘 벨트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 호랑이 벨트는 한반도부터 시베리아까지 걸쳐있는 지역이며, 이곳에 대부분의 시베리아 호랑이가 서식하고 있던 곳이다. 옛날 사람들은 산과 가까운 곳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농사를 지었는데, 이때 아이가 혼자 놀다가 호랑이에게 잡혀서 죽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에게 호랑이에 대한 공포는 실로 엄청났다. 이런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보다 센 종교에 매달리려는 성향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은 이것이 이 지역의 종교성향을 결정했다고 설명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인식을 못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근본주의 성향이 대부분 이다. 미국의 경우 전체 기독교인 중에서 근본주의 성향을 가진 복음주의가 20~30% 정도를 차지한다. 부시 대통령도 복음주의 교회를 다니고 있다. 이 복음주의는 일반적으로 근본주의와 보수주의적인 색체를 띠고 있다.

이제, 종교가 탄생했던 시대상황을 보자.
대표적인 종교들이 탄생했던 때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부분 사람들이 가장 살기 어려운 시대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일반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울수록 그 종교들이 전파되는 폭발력이 더 커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의 종교는 핍박받는 사람들의 편이며, 기득권자들로부터 약자들을 보호할려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이와 정반대로 대부분의 종교들은 기득권자를 위한 보수주의를 표방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현재의 기독교인들은 너무 성경을 단지 '문자'만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울 때가 있다. 즉, 초기 종교시대와 현재의 사회 상황이 너무 변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종교인들은 진리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이 계절에 따라서 옷을 바꿔서 입듯이 이 진리도 시대에 따라서 다른 겉모습을 지녀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초기 종교가 발생한 시대와 현대는 역사적인 상황들이 너무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진리가 변질된 것은 아니다. 단지, 시대에 따라서 그 시대 사람들이 경험하고 보는 방식, 즉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변했다.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성경구절 중 하나는 창세기의 ‘하나님이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시니라."이다. 우주 안에 있는 수없이 많은 천체들은 질서와 조화를 가진다. 또한 지구 위에 있는 수많은 동물들, 식물들, 바다의 고기들와 나무들이 있으며,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이들을 복을 주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고 명령했다. 하나님은 이들을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한다.

즉,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법칙은 다양성 안에 있는 하나됨을 통한 풍성함과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물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수소(H)와 산소(O)가 서로의 전자를 나누어줌으로서 공유결합하여 아주 다른 성질의 물(2H+O = H2O)을 만들듯이, 자연이란 자신을 나누어줌으로 다양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다.

우주 전체에는 수소(H)와 헬륨(He)이 3:1의 비율로 존재하고 나머지 원소들은 1% 미만이 존재한다.(1) 태양은 92.1%의 수소와 7.8%의 헬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지구는 규소(Si), 산소(O), 알루미늄(Al), 철(Fe)이 전체 물질 중 90% 정도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수소와 헬륨보다 더 높은 원자번호를 가진 물질들은 어떻게 생성되었을까? 이 원소들은 모두 별이 죽을 때 만들어진 것이다. 즉, 이들은 모두 별이 폭발할 때 발생된 높은 온도에 의해서 핵반응이 일어나면서 생성된 물질들이다. 이와 같이 별의 생애의 끝이라고 생각한 폭발 속에서 새로운 물질들이 만들어지고 이들이 모여서 지구라는 행성을 만든 것이다.

개인적으로 성경 중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부은 향유에 관한 부분을 좋아했었다.
 
향유의 속성은

 1. 향기가 있다. 그것과 접촉하는 모든 것이 이 향유로 인하여 향기를 발산한다.
 2. 딱딱함이 없다. 예수님의 몸을 모두 적실만큼 유연하다.
 3. 깨끗하다. 자신만이 가진 순결이 있다. 
 4.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향기로 남을 이롭게 한다.
 
 
******
(1) 지구의 대기는 77%의 질소와 21%의 산소로 이루어져 있다. 지구의 대기 중에 우주에서 가장 풍부한 수소와 헬륨이 없는 것은 지구의 중력이 너무 작아서 수소와 헬륨과 같이 분자량이 작은 원소를 지구가 붙잡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력이 강한 목성의 경우 60%의 수소와 36%의 헬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06-09-21 원정
    저는 어쨌든 서로를 인정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내가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인과 이슬람교인들은 이러한 점을 깨닫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것입니다.
    같은 시공간에 서로 존재하길 거부하니 전쟁밖에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이는 예수님의 뜻도 마호메트의 뜻도 아닌데 말입니다.
  • 06-09-21 나나
    북한의 소위 '우상화'에서 이런 종교성의 느낌을 느끼게 된다.
    이런 북한의 모습을 보면 한민족으로서의 동질성을 어느정도 느낀다고 하면 본인의 오해일까?

    북한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남한노래는 한돌 작사의 '홀로아리랑'이라고 한다. 오랫만에 이 노래를 들으면 제 눈에서는 원인을 모르는 눈물이 몇번 조금 나온다. 그런데 TV에서 어느 새터민(탈북주민)이 자신도 이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난다는 말을 하면서 한돌 선생님을 찾아뵙는 장면을 보면서 '북한사람도 밑바탕에는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졌구나!'라고 느낀 적이 있다.

    또한 개인 생각으로는 '2002년 월드컵의 열기 또한 이런 종교성과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 06-09-21 원정
    저는 종교성하면 두가지 의미가 떠오릅니다.
    하나는 우주의 본질 또는 근원, 나의 근원..... 부처, 하느님....
    다른 하나는 집단, 조직, 집단주관주의....

    집단주관주의를 종교성으로 볼 때, 저는 2002년 월드컵 열기나 홀로아리랑에 대한 한민족의 반응은 모두 종교성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06-09-22 나나
    저는 종교는 죽음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성의 근원은 죽음이고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종교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먼 옛날 어느날 유인원(인간)의 뇌가 점점 발달을 하여 자아을 조금씩 인식하게 되었을 때 험악한 자연현상 앞에서 신체적으로 너무나 허약한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동물들이나 자연적인 원인들로 죽었을 때 그들에게 일어났을 엄청난 공포를 생각해보면 그들의 종교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종교는 자아의 인식과 이로부터 생긴 공포가 그 원인로 부터 생긴 것으로 보인다.

    즉, 종교란 신체적인 발달이 정신적인 발달을 따라오지 못해서 생기는, 즉 정신과 신체 능력의 불일치를 자각함으로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다시 달하면 초기 인류가 살았던 환경은 지금과 같이 인간이 쉽게 조절할 수 없는 외부의 요인들에 의해서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었으며 이런 상황에 대한 인간의 대응이 종교성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이것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합리화 과정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우리가 어떤 잘못을 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려고 한다. 즉, 자신의 잘잘못과 관계없이 상대방이 나쁜사람이니 내가 이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할려고 하기도 하고 모든 사람이 다 하는 것인데 뭐가 중요해라고 자신을 합리화한다. 이 합리화 작용이 없다면 아마 사람은 심한 정신병에 시달릴 것이다. 이것이 개체(자신)를 안정화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도 자연현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합리화 작용의 하나가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초기 고대국가들은 모두 종교가 지배하는 강력한 신정국가라는 점에서 이것이 간접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이 환경을 잘 조절할 수 있게 된 이후 역사는 조금씩 종교성보다 합리성이 중요한 사회가 변한 것 같다.

    한때, TV에서 다중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알게 되었을 참 놀랐다. 사람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이를 피하기 위해서 다중인격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즉 자신의 스트레스가 극단적으로 커지면 성격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어 행동을 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 행동할 때 이를 자신이 인식하는 경우도 있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것을 보고 '현재의 내 성격이란 안정된 것인가? 또는 의식적으로 다른 인격이 될 수도 있을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 06-10-04 바람
    죽음과 불안을 극복하고자 하는 방편의 일환으로서 종교가 생겨나게 된 것이니, 죽음과 불안을 극복하고자 하는 그 모든 시도들은 다 나름대로의 진리이고, 철학이고, 종교다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오해하여, 한 종교에서 나온 것만만이 전부 다라고 우기게 되면, 그로 인하여 오히려 집착을 낳을 수도 있는 것인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일부 종교인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돈(물질)에 대한 집착은 그래도 어느 정도 용서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라고 저는 봅니다.(물론 이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일시적인 것이기에) 그러나 종교(진리)에 대한 집착은 용서의 가능성이 오히려 더 희박해 질 수 있다.(?)라고 봅니다.(영원한 것을 오해하기에)

    그렇기 때문에 진리는 바르게 이해해서 봐야지, 바르게 이해가 안된 상태에서 함부로 애기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똑같은 성경말씀이라고 해도, 그것을 바르게 이해해서 애기하는 것과, 그냥 생각으로서 '그렇다'라고 보고 애기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자신의 성격 어떻게 결정되는지의 여부는, 그러한 성격들을 담아내고 있는 그 구조가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일치하게도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구조가 더 작아지기도 하고, 더 커지기도 하면 기존의 그 성격의 결정구조가 없어지면서, 다른 성격(?)으로 변화하게 되지만, 그러한 구조의 변화를 거부하고 현재에만 머물러 있으려고만 하게 되면, 스스로 그러한 성격으로 결정이 되어지게 된다. 이렇게 봅니다.

    즉, 어떤 그 누군가가 그렇게 성격을 결정짖게 해서 그러한 성격으로 결정이 되어지는 것이 라기 보다는, 본인 스스로 그러한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인 스스로 그러한 성격으로서 결정이 되어지지 아니하도록, 자기를 날마다 부인하게 되면, 그로 인하여 다른 성격과도 교통할 수 있는, 그 길이 열릴 수도 있다. 이렇게 봅니다.

    님의 글 잘 읽어보았고요. 여러모로 참고가 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 06-10-14 나나
    어느 면에서 현재 종교는 문화현상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현재의 종교인들은 이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여러 문화현상들 중에서 종교가 가장 강하게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 또는 다른 국가에 강요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문화란 다름의 존중을 그 아래에 놓고 다양성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종교들이 자신 속에 있는 이 문화적인 면들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 때문에 많은 갈등들이 나타나는 것 같다.

    물론 종교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할 것이다.
    종교의 필요성은 이 기간들이 웅변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 06-10-20 나나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목은 '성경 왜곡의 역사'라는 책이다. 책 전체를 읽지는 못했지만 책의 앞 부분에 나오는 내용을 조금 정리했다.

    저자는 약 30년동안 신약성서를 연구한 학자이며 청소년기에 '거듭남'을 경험하고 복음주의적 종교관을 가진 정통 기독교인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성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으며(축자영감설), 절대적으로 무오하다(성서무오설).'의 신념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것이 그를 성서학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성서관은 성서의 원문을 작성한 저자들에 한정한 것이며, 이를 필사한 저자에게는 이것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 때 문뜩 깨닫게 된다. 이 필사본들 사이에는 신약성서의 원문보다 많은 서로 다른 문장(이문)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실수들은 주로 사소한 것들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모두 필사본에 의한 것이며 그것도 원본의 것보다 수백년 후에 쓰여진 것이라는 사실과, 또한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설에 강한 집착을 가졌던 필자는 결국 '성경 원본의 중요성'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저자는 성경 원본만이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구를 할수록 성서에 대한 그의 믿음은 필사본들의 많은 이문들과 그리스어 성경과 번역본들의 의미 차이 등으로 흔들리게 된다. 결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마가복음을 수강하던 중에 학기말 논문을 쓰면서 성서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저자의 생각이 바꾸게 된 것은 마가복음 2장의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가면서 낟알을 따먹은 일로 예수가 바라새인들과 논쟁하는 부분에 대한 숙제를 할 때였다.
    책 중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왕이 굶주렸을 때 부하들과 함께 행했던 일, 즉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그들이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제단 빵을 먹었던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 시켜줍니다. 하지만 이 구절의 문제점은 예수가 인용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말씀(사무엘상 21:1-6)을 보면, 다윗이 이 일을 한 때는 아비아달의 아버지인 아히멜렉 때라는 것이다."

    이때 저자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이것이 마가의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스어 단어의 의미를 근거로 아주 복잡하고 길게 정리하여 숙제를 제출했다. 그리고 그는 담당 교수가 그의 주장을 아주 높이 평가할 것을 굳게 확신했다고 한다.

    하지만, 담당교수는 숙제의 끝에 간단한 한 줄 평을 써놓았고 이것이 저자의 생각을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마가가 그냥 실수한 것이겠지.'

    그 후 필자는 심한 혼란을 겪지만 결국,
    '음... 그래. 아마 마가가 실수를 한게 맞을 거야.'
    라고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되었고
    결국 저자는 그 이후 더욱 많은 성경 속의 오류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어쨋든, 책의 내용이 한쪽으로 치우친 것 같지는 않고, 글도 쉽게 쓰여 있어서 소개한다.
  • 06-10-20 바람
    실수를 알아차리게 되면, 더 이상 실수가 아니다. 따라서 성서에 어떠한 실수가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수(허구)를 바르게 깨달아 알아차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의 그 모든 이치를 바르게 깨닫게 되면 그 모든 것들이 성경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일부 기독교인들은 성경만이 성경인줄로 착각하게 될때에, 스스로 성경의 맹신에 빠질수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게 된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장에 보게 되면 예수족보가 나오는데 그 기록에는 족보가 총 42대로 기록이 되여 있지만, 그것을 자세하게 살펴보게 되면 42대가 아니고, 14+14+13
    =41로서, 즉 41대로 기록이 되어져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실제로 세어보면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이 성경의 기록의 실수인가? 오류인가? 저는 그렇게 보지를 않습니다.

    그것을 실수라고 보기 보다는, '아하! 42대라고 하는 진정한 의미는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져 있는 것만으로 뭔가 아닐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나를 포함해서 같이 보게 될때 더불어 같이 42대로 완성이 되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달리 보게 된다면, 그러한 실수(?)가 오히려 깨달음의 기회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러니 성경무오설를 주장하는 것도 이미 아니지만, 실수를 실수라고만 보는 것도 또한 아닐 수 있는 것이다.
  • 06-10-20 원정
    좋은 책 소개시켜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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