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이야기

유대 왕 아그립바와 그리스도교.1

06-09-14 김춘봉 1,178
 

 


  티베리아로 가려면 가이사라 배편을 이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욥바행 배에 올랐다. 파도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갑판에 서서 넘실거리는 파도를 바라보는 아그립바. 45세가 되고서야 귀국 길에 오른 그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유대뿐만 아니라 동방의 속주 권세가들은 자녀를 유학 보내는 관습이 있었다. 이는 로마의 실력자와 어린 시절부터 친교를 맺어두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아그립바 나이 10살이 되던 해(A.D 6)에 아겔라오는 안나스 세력에 밀려 갈리아의 골 지방으로 귀양살이 떠나면서 자식이 없어 조카를 양자로 삼아야 했던 그는 어린 것을 로마에 남겨두면서 왕자의 품위를 지키라는 당부의 말과 함께 ‘네 이름은 아그립바’ 이렇게 말해주었던 것이다.


  마르쿠스 아그립바(B.C62~B.C12)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위였을 뿐만 아니라 유명한 장수였다. 그는 황제의 특사 자격으로 유월절 행사(B.C15)에 참석하여 100마리 황소를 제물로 바쳐 고기를 배불리 먹게 해준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이름을 빌리면 장성한 다음 백성으로부터 호감을 받으리라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  *  -



  아그립바는 수차에 걸쳐 고국에 돌아가 왕 되기를 청했으나 티베리우스 황제(A.D14~37)로부터 거절당해 실의에 빠져 있었다. 이런 와중에 칼리굴라가 새 황제(A.D 37) 지위에 오르면서 왕 칭호를 내린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가 가서 있어야 할 곳은 빌립이 죽고(A.D 34) 공석중인 유대 북부지역이었다. 유대 속주는 분할 통치한다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정책이 유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그립바의 생각은 달랐다. 왕이 되었으면 할아버지 헤롯의 유산을 상속 받아야 했다. 궁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키프로스의 구리광산이나 시돈, 띠로와 같은 타 지역의 토지와 건물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어야 했다. 세리들의 인두세 경합을 주관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제사장 임명권도 행사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아그립바는 예루살렘과 이두메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마르겔스 총독과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안티바가 버티고 있는 유대로 선 듯 돌아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고민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촌형 되는 칼기스 헤롯에게 자기 구역의 대권을 행사케 했으며 마르겔스 총독과 안티바에게는 심복 블라스투스를 보내, 왕 칭호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석연치 않았다. 마르겔스 총독은 고개만 끄덕이는 정도의 관심을 보였을 뿐이고, 헤로디아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더라는 것이었다.

“왕이라니요?” 

“빌립의 영토를 주면서 왕이라 했나봅니다.”

안티바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집사 노릇이나 하던 주제에 가당키나 합니까? 왕 되실 분은 여기계십니다.”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귀국 길에 오른 이상 그들을 무시하기로 했다. 늙은 안티바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마르겔스 총독은 녹이나 받아먹으면서 편하게 지내다가 임기가 끝나면 훌쩍 떠날 사람이니 문제 될 것이 없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 보다 먼저 해결할 과제가 있었다. 대제사장 예복을 돌려받고 기뻐한다는 안나스 세력을 몰아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이는 아겔라오의 원수를 갚는 일이기도 하려니와 그들을 제압하지 않고서는 왕 행세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가야바(A.D18~37)로부터 대제사장 직을 물러 받은 요나단은 50일 만에 동생 데오필로에게 넘겨주고 다시 성전 경비대장 지위에 있다고 했으니 이처럼 요직을 두루 차지하고 있는 안나스가문의 형제를 제압하려면 그들을 능가하는 힘이 필요했다. 마르겔스 총독이 이 일에 나서주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고, 안티바는 누이 헤로디아와 재혼할 당시 아그립바가 적극 반대를 하고 나섰기 때문에 소원한 관계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집권초기 할아버지 헤롯은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광야의 엣세네인들도 불러들였다고 했다. 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인들 못하랴 싶었으나 생부가 그들의 꼬임에 빠져  죽었기 때문에 그들과 머리를 맞대고 국정을 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처럼 고민하는 가운데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는 자가 있었다.

“새롭게 등장한 무리가 있습니다.”

“무엇하는 자들인가?”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그렇다면 유대교의 분파에 속한 자들이었다.

‘옳거니!’ 

아그립바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  *  -



  욥바에 도착하면서 환영 나온 인파가 많은 것에 놀랐다. 칼기스 헤롯과 블라스투스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헤롯궁과 하스몬궁의 식솔이려니 짐작이 갔지만, 별도로 모인 무리가 손을 흔들고 있었으니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부인과 세 자녀를 앞세우고 배에서 내리는 동안 그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이었다.

  사마리아 장로는 왕에 대한 예우를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 때서야 양부 아겔라오가 사마리아의 말타케 출신 여자 소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환대에 감격한 아그립바는 사마리아 장로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세바스테 방문 길에 나섰다.  

  할아버지 헤롯은 아우구스투스(BC63~AD14) 황제를 기리는 뜻에서 사마리아를 세바스테라 부르게 했다. 이는 영예로운 자라는 의미의 그리스어로 사마리아를 유대의 행정수도로 승격시키기 위한 조처였다. 따라서 사마리아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세계화의 추세에 따라 이동과 거주는 자유로울 수밖에 없었다. 로마제정 이후 세계의 3대 도시로 꼽히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에도 유대인 블록이 형성 된 다음이고 보면, 그리스나 로마인들이 유대에 와서 살겠다고 했을 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따라서 가이사라, 율리아스, 얌니아와 같은 도시가 생겨났으며 이처럼 발 빠른 대응을 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그나마 성도 특유의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장로는 가장 큰 건물로 일행을 안내 했다. 그곳에서 며칠을 묵는 동안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이곳 사람들은 자신을 왕으로 대접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안나스 세력을 물리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이런저런 구상을 하는 중에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자들이 생각났다. 그래서 은연중 그 이야기를 하는 중에 장로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경멸에 가까울 정도의 냉소를 보이는 것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믿을 사람들이 못됩니다.”

“어째서요?” 

“제가 빌라도 총독 주선으로 대제사장 가야바를 만날 때였습니다. 갈릴리 출신 어느 젊은이가 일행과 함께 사마리아를 통과하면서 언쟁이 있었나 봅니다. 빌라도 총독에 의하여 화해분위기가 조성된 다음이라고는 하나, 해묵은 감정을 말끔히 지워버리지 못한 상태라서 아마도 무시를 당한 모양이었습니다. 그 때 젊은이가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여러분, 그리심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요?”

아그립바가 관심을 보이자

“그 젊은이는 예루살렘에 가서도 비슷한 말을 하더랍니다. 그리고는 여러분! 강도를 만나 다 죽게 된 사람을 보고 어느 사마리아인은 상처를 싸매고 나귀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 돈을 주며 부비가 더 들면 돌아갈 때 갚겠다고 했답니다.”

“… ”

“그런데 다음 말이 참으로 흥미로웠습니다. 만약에 대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그 자리를 피해갔다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습니까? 묻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장로의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 젊은이는 사람에게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더구나 그리심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섬겨야 할 대상이 따로 있다는 말 중에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면, 무슨 의도로 그와 같은 말을 하게 되었는지 짐작이 갔다. 

  콧대 높은 유대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것이 궁금했다. 더구나 존경 받기를 좋아하는 대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을 사마리아인 보다 못한 존재로 비하하는 발언을 했으니 그러고도 온전했을까 근심스럽기도 했다.

“젊은이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무심중에 나온 말이었다.

“죽었습니다.”

죽었다는 데야 할 말이 없었다.

애석한 마음에   

“제자라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들이 배신하는 바람에 죽었습니다.”

  그 순간, 아그립바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현기증과 함께 시야가 흐려지는 것이었다. 한동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뒤에야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쇼킹한 이야기를 들을라치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이었다. 이런 증상이 나타날 때면 으레 소심한 탓에 그러려니 하면서도 이 때문에 죽으면 어쩌나 겁을 먹기도 했었다. 

  이처럼 아그립바가 과민반응을 보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배신행위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로마에 거주할 당시 아그립바는 안토니아 집에서 살고 있었다. 안토니아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동생 드루수스 부인이기도 하려니와 차분한 성품에다가 자녀양육에 지대한 관심을 쏟는 여인이라서 속주 왕이나 실력자들은 그녀에게 자녀를 맡기고 싶어 했다.

  아그립바도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장성한 다음에도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된 안토니아를 도우며 그녀의 소개로 키프로스와 결혼을 했고, 자녀도 낳았다. 이런 와중에 아그리피나(B.C14~A.D33)가 국가반역죄로 폰티아 섬에 유배되었고, 그녀의 셋째 아들 칼리굴라(A.D12~41)가 17세 나이로 할머니 안토니아를 찾아왔던 것이다.

  칼리굴라는 손위 형이나 누이와는 달리 부친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B.C15~A.D19)를 따라 갈리아와 시리아 등지를 거치며 성장했기 때문에 의지할 곳은 할머니 밖에 없었다.

당시 아그립바는 38세였으며 칼리굴라와는 나이 차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아그립바는 헤롯의 혈통을 이어받은 장손임을 내세우면서 유대로 돌아가 왕 되기를 청했으나 황제로부터 거절당해 불만이 많았고, 칼리굴라 또한 아우구스투스와 게르마니쿠스에 이어 자신이 황제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고 믿는 가운데 모친과 두 형이 반역죄로 죽임을 당한 직후라 통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그립바는 이런 말을 하고야 말았다.

“티베리우스 시대가 끝나고 자네가 황제의 지위에 오르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네. 무엇으로 보나 자네가 후계자야.”

  이 말은 티베리우스 황제가 자신의 손자이며 드루수스의 아들 게멜루스를 후계자로 내정한 상태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 때 유티쿠스란 자가 옆에 있었다. 그 자는 아그립바가 부리는 해방노예였다. 그래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난 다음, 유티쿠스가 옷 몇 벌을 훔치다 발각되면서 주인으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다. 유티쿠스는 잘못을 뉘우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앙심을 품고 미세눔에 달려가 황제에게 아그립바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말을 했다. 졸지에 반역자로 몰리게 된 아그립바는 미세눔에 불려가 심문을 받게 되었다.

대질 심문하는 자리에서, 

“고소할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황제의 물음에 유티쿠스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렇게 꾸며댔다. 

“늙은이가 죽고, 그대가 황제의 지위에 오르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네. 그리고는 때 마침 정원에서 놀고 있는 어린 게멜루스를 가리키면서 방해가 될 것이니 저 놈부터 해치우세.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그립바는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말밖에 하지 못했다.

“저는 고인이 되신 황제의 아드님과 친한 사이였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게다가 게멜루스와는 한 집에 살면서 제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 자는 도적의 주제에 잘못을 뉘우칠 생각은 하지 않고 거짓을 고합니다.”

이처럼 애원해 보았지만 황제는 아그립바를 감옥에 가두고 말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안토니아가 찾아가 아그립바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해명을 하려 했으나 만나주지 않았다. 오히려 게멜루스가 후계자임을 세상에 알릴 기회로 삼았다. 

  아그립바는 6개월 동안이나 감옥에 있다가 황제가 죽은 다음에서야 풀려났다. 하마터면 티베리우스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던 것이다.

  왕 칭호를 받게 된 이면에는 이처럼 비애와 고통이 숨겨져 있었다. 배신자 소리만 들어도 화가 치밀 만 했던 것이다. 

  사마리아 장로에 의하여 저들이 배신자임을 알게 된 아그립바는 그들의 힘을 빌려 보겠다던 당초의 생각과는 달리 증오했다.

“내가 용서치 않으리라.”

 

(참고)

그 때에 헤롯(아그립바)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 새 때는 무교절이라.  (사도행전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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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6-09-15 원정
    선생님 요즘 좋은 일 많으신 것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바뀐 내용을 수정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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