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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마지막 글>
1
05-12-24
원정
1,435
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마지막 글>
name : 지나다가 수정 삭제
지난 글에 이어서 쓴다.
'평상시 마음이 드러난 의식상태로 있다'는 것을 혹 오해가 있을까 싶어 좀 더 부연하고 싶다. 이것은 그야말로 잠자는 시간 외에는 늘 의식이 드러나 있다는, 그런 말은 아니다. 전에 바라보기를 할 때는 먼저 바라보기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바라보아야겠다는 의지가 일어나면서 그 다음에 바라보는 행위로 이어지곤 했다.
그러나 바라보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고 바로 의지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 역시 '바라보기를 실행에 옮겨야지'라는 생각이 일어나야 가능한 것이었다. 가령 사람들과 바라보기에 대하여 몇 시간을 이야기하면서도 한 순간도 바라보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보게 되었다고 해도 불과 몇 초 후면 잡념이 들어와 바라보기를 잊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 바라보는 시야가 좁아서 생각이면 생각, 마음이면 마음 한 곳에, 그것도 내 자신의 안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란 궁금함과 '바라보는 자'가 사라지고 난 후에는 의식이 아무 때나 불쑥 불쑥 드러나는 데, 그 시야도 넓어져 '주변과 내'가 전체적으로 한꺼번에 드러나는 것이다.
가만히 있을 때는 거의 틀림없이 드러나고, 책 같은 걸 집중적으로 볼 때나 또는 일을 집중적으로 할 때가 아니라면 대화중이 건, TV를 보건, 운전을 하건, 세수를 하건, 그야말로 아무 때나 수시로,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전에 열심히 바라보기를 하려고 노력하던 때보다 몇 십 배 더 많이 드러나게 되는 정도라고 생각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몇 가지 있다.
우선 편해진 것이, 수행에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에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부러 신경을 전혀 쓰지 않아도 저절로 수행이 더욱 더 잘되고 있으니, 더 이상 수행이 필요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무위의 상태, 더 이상 잡을 것이 없는 놓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나는 앞서 인용했던 육조단경의 스님 이야기(밥 먹고, 잠자고, 똥쌀 뿐이라는)를 읽고 '아하! 이 무엇일까 그저 그렇게 챙기고 있는 것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무위 즉, 아무것도 할 것이 더 이상 없는, 걸림이 없는 상태란 것이 짐작될 것이다.
돈오점수에 대하여 잠깐 짚어보기로 한다.
이미 수행이 필요 없어졌다는 점에서 나는 돈오돈수가 이해가 간다. 하지만 한가지 간과되어선 안될 것은 놓아버려도 자연스럽게 화두가 잡히는 단계(오매일여, 몽중일여, 입태일여 출태일여, 이들은 뒤에 다시 설명될 것이다)를 말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무언가를 잡고 있는 상태이어서 완전히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무위의 상태와는 다르다. 화두(궁금함) 자체도 사라져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상태, 즉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게 되는 경계를 돈오돈수의 상태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 돈오점수도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궁극적인 궁금함에서 해방되고 가득 찬 평화의 느낌으로 고(苦, 번뇌)는 해결되었지만 나는 지금도 과거의 습관이 남아, 무슨 일을 하려면 쉽게 바로 그 일에 달려들지를 못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론 삶의 에너지가 꾸준히 활성 되고, 과거의 습관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이것은 지금도 내가 수행 중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수행과는 개념 자체가 다르지만, 이러한 수행의 과정은 끝이 없을 것이다. 누군가 '깨달음이란 원습의 완전한 제거에 있다'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이런 의미에서 돈오점수도 이해가 가는 것이다. 마하리쉬가 이야기했다는 '전원이 꺼진 선풍기'의 비유도 돈오점수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에 안주하려는 것에 대한 경계의 의미로서도 돈오점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돈·점의 논쟁은 사실 같은 경지의 다른 설명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돈오점수에 대해선 도올 김용옥선생(나는 도올을 선생이라고 부르고 싶다. 성질은 좀 고약^-^~~~ 하지만 그런 점도 좀 포용할 줄 아는 문화적 풍토가 아쉽다)의 재미있는 절충적 견해가 있다. 도올은 돈오점수를 주장한다. 그는 점진적인 수행(점수) 없이 도약적 발전(돈오) 없고, 도약적 발전(돈오) 없이는 점진적인 수행(점수)도 있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돈오점수 이다.
도올은 깨달음에 끝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이는 완전한 깨달음이 없다는 의미에서 어떤 의미에선 깨달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깨달음은 성장을 위한 과정일 뿐임으로 중간에 수행의 발전적 도약이 무수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도약(돈오)은 점진적인 수행(점수) 없이는 체험될 수 없는 것이며, 또 수행 중에 맛보게 되는 도약(돈오) 없이는, 자극이 없어, 점진적인 수행(점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수행 과정은 도올의 주장대로 돈오·점수의 과정이 될 것이다.
평상시 의식이 자연히 드러난다는 것(바라보기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따라서 '바라보는 자'가 수행을 이끌어 주는 효과적인 안내자이긴 하지만 강을 건너면 버려야 할 뗏목에 불과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의식이 스스로 드러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바라보는 자'를 버려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버려지게 되겠지만 화두선을 하는 경우엔 약간의 위험이 있을 것도 같다. 화두선을 하다가 큰 의심이 깨지면 그 다음은 의심이 약화되는 것이 당연하다(한꺼번에 모든 의심이 깨지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도 억지로 의심을 크게 내려고 하면 은은히 바라보고 있어야 할 시점에 억지로 힘을 쓰고 있는 것이므로 오히려 마음을 긴장시켜, 그 즈음이 되면 저절로 내부에서 솟아오를 평화의 느낌을 안타깝게도 억제하는 형국이 될 것 같다.
화두선에서는 소위 오매일여(寤寐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심지어는 입태일여(入胎一如), 출태일여(出胎一如)를 말한다. 잠이 들고 깰 때도, 잠은 물론 꿈을 꾸는 과정에서도, 다시 태어나려고 자궁으로 뛰어들 때도, 세상에 나올 때도 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무얼 잡고 있다는 것은 미세하지만 아직도 힘을 쓰고 있는 단계로서 결국 무엇에 얽매여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경지가 되면 궁금함을 놓아(억지로 의심을 만들지 말고) 스스로 의식이 드러나게 해야할 것이란 생각이다.
덧붙여 의식의 스스로 드러남이란 갑자기 그런 상태가 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숙성의 결과일 것이란 추측이다.
얼마 전 SBS의 프로에서 수푼을 절단시키는 초능력이 사실은 이미 수없이 손으로 구부려 거의 조금만 흔들면 잘려 떨어질 순간까지 조작해 놓은 것이란 것이 방영되었다.
의식의 드러남도 그러하다는 생각이다. 바라보기에 의해 마음의 온갖 감정이 순화되어(이걸 업장을 녹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면의 평화가 완전히 드러났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도 모르게 어느 날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내 경우 의식이 드러나기 전 몇 년, 조용히 산책을 할 때면 마음이 왜 그리 평안한지 스스로도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나 주변의 동료 중에, 대면하면 심기가 불편한 사람이 몇 있었다(완전히 내 주변을 포진하고 있었다). 당시 떠오른 생각은 '이 사람들만 사랑스럽게(여유 있게) 볼 수 있다면 정말로 더 이상 걸릴게 없는 평화일텐데'라는 것이었다(당시엔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아침마다 수련 시에 한사람, 한사람 얼굴을 떠올리며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감싸고 답답한 마음을 사랑의 마음으로 변화시키려 노력하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말 잘 되지 않았다. 이윽고 내 마음에서 답답함의 느낌이 사라지고, 그들이 편해졌을 때, 그리고서 한참 후에야 의식이 스스로 드러났지 싶다.
이것은 의식의 드러남 자체가 바로 무한한 평화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내면의 지극한 평화는 보통 복잡한 감정들에 억눌려 드러나질 못하고 있다가 마음의 정화가 이루어져 씻겨나갈 때, 의식과 함께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낮에는 그저 평안으로 느껴지지만 새벽에 잠이 깨어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상태에서는 의식은 성성하게 살아있으면서 내면에 넘치는 평화로, 온 우주에 오로지 평화만 존재하는 듯 지복의 상태(이것을 삼매라고 불러도 무방하다는 생각이다)로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쯤에는 평소에도, 복잡한 감정이 일어나려고 할 때(거의 드물지만), 자신을 바라보게 되면 스르르 그런 감정들이 녹아 내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의 궁금함 즉 '내가 누구인지 바라보고 있는 자'는 궁극적 자유로 인도하는 안내자이고, 내면의 평화는 자신을 이끌어 주는 진정한 스승이 아닌가 싶다.
궁금하지 않고서는 사람은 해방을 욕망하지 않는다. 궁극적인 궁금함이 나를 부자유하게 만들고, 그 궁금함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궁금함에 집중하고 있으면) 내면의 평화를 만난다. 그 내면의 평화는 나를 인도하는 스승으로, 그리고 종국에는 용광로처럼 에고를 녹이고 지복과 함께 의식만 존재하는 근원 자체로 자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바라보는 자'(혹은 궁금해하는 자)는 근원적인 본래의 나(진아, 절대적 진리, 불성)로 인도하는 출입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라보는 자' 역시 우리가 주시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의식의 일부이다. 하지만 그것은, 붙잡고 있으면 여전히 우리를 구속하는 에고의 영역도 동시에 가지고 있음으로서, 강을 건널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면서, 동시에 건너고 나면 버려야 할 뗏목으로 존재한다 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는 궁극적인 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일으키며,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게 하여(업장을 녹여), 내면의 평화를 드러나게 하는 아주 이상적인 질문이다.
반면에 '이 무엇고?'는 궁금함에 집중하게 한다. 궁금함에 일방적으로 집중하다 보면 다른 것(마음을 들여다 볼 여유)은 놓치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집중은 밀도 있는 에너지(힘)를 요구한다. 처음에 입문과정에서, 그리고 궁금함(의정)을 의단(궁금함의 덩어리)으로 만들어 그것을 깨뜨리는 단계까지는 화두는 강렬하게 관심을 끌어 수행을 돕지만 적절한 때가 되면 그 궁금함을 은은히 바라보는 쪽으로 인도하여 평화가 드러나게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 무엇고?' 화두 역시 '바라보는 자'(나는 누구인가? 질문도 포함하여)와 마찬가지로 때가 되면 버려야 할 뗏목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이것이 무엇일까 하고 '궁금해하는 자'와 '바라보는 자'는 같은 것(에고)이다. 둘은 의식을 집중하게 하여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이지만 놓아야 할 때가 되어도 놓지 못하면 그 역시 나를 구속하는 족쇄로 작용하는 것이다.
나는 전에 화두 자체에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닌지, 진리에로 가는 길이 각기 다르다지만 그래도 숨겨진 지름 길이 있는 것은 아닌지, 무척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 하다.
모든 것은 마음의 정화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궁극적인 의문이 해소되고 근원적인 평화가 드러난 상태에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무위의 마음으로 자신에게 부여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한다.
초능력에 대한 나의 견해를 잠깐 밝히기로 한다. 내 인생의 목적은 이 삶에서 정하면 된다는 즉, 태어난 이유에 대한 궁금함에서 벗어난 후에는 어느 정도 내면의 평안이 드러나 몸은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자연히 몸이 무너져도 관심을 두지 않아서 건강은 극도로 무너져 위험수위에 이르렀고, 그러한 상태에서의 위기의식은 나를 다시 추스르게 하여 단전호흡을 하게 되었다.
또 단전호흡(선도)은 깨달음으로 가는 또 하나의 다른 길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그리고 수련이 되어가며 실제로 몸이 좋아지자 혼동이 되기 시작했다. 전에는 술 담배를 무자비하게(?) 끊는 친구들을 보면 '뭐 그리 오래 살려고 그러나?'라며 각박하다고 느껴졌는데 몸이 청정해지면서 몸과 마음이 따로 가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선도(仙道)야말로 몸과 마음이 함께(대개 마음을 말하지 몸과 마음이 동시에 영원히 존재한다는 개념은 선도 이외에는 들은 바가 없다) 영원히 존재하는 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마하리쉬를 알고서도 그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오히려 마하리쉬가 한쪽(몸)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초능력에 대한 아무런 미련이 없다. 이 세상에서 어떤 능력을 얻더라도 결국 '나는 누구인가?'의 궁극적인 물음이 남아있다면 그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물질적인 풍요나 초능력이 마음의 깊은 평화를 끌어내는데 한계가 있다는 점에선 하등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질 세상에서 누구는 의학에 깊은 조예가 있고, 누구는 예술에 깊은 조예가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전문적인 분야로 인정해 줄 뿐이다. 영적인 능력(초능력을 포함한 모든 보통 이상의 능력)도 범위만 영적인 범위로 넓어졌다 뿐이지 부자유한 것은 똑같다. 타고난 재능이 모두 달라서(아무리 노력해도 둔한 부분이 누구나 있다) 각기 다른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 혹은 재능을 구비하듯이 영적인 능력도 그런 타고난 재능(물론 노력에 의해 얻어진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이 있는 것 정도로 생각하면 어떨까 싶다.
그런 능력들을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든가, 무언가 깨달음이 다가오려는 징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이어서, 또는 부(富)가 어느 정도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듯이 유용하다는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불교 전공자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참고가 될 듯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부처는 아라한에 이른 제자들이 신통력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육신통(六神通) 중 그 중에 다른 것들은 없어도 무방하나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신통력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누진통(漏盡通)이라는 것이다. 누진통이 되지 않고서는 아라한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다. 누진통은 번뇌를 끊는 능력을 말한다. 육신통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천안통(天眼通):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신통
2. 천이통(天耳通): 보통 귀로는 듣지 못할 음성을 듣는 신통
3. 타심통(他心通): 다른 사람의 의사를 자재하게 아는 신통
4. 숙명통(宿命通): 지나간 세상의 생사를 자재하게 아는 신통
5. 신족통(神足通): 여의통(如意通)이라고도 한다. 부사의하게 경계를 변하여 나타내기도 하고 마음대로 날아다니기도 하는 신통
6. 누진통(漏盡通) : 자재하게 번뇌를 끊는 힘
간단히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하고자 한 것이 처음생각과는 달리 엄청나게 길어져 버렸다. 처음부터 이렇게 길게 될 줄 알았다면 아마 시도해 보려는 마음이 일어났을까 의문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수행을 좀 하고 살았다고 읽는 분들이 오해할지 모르나 기실 나는 수행하고 살았다는 개념이 없다. 그저 남들처럼 살아왔다고 생각한 일상 생활이 어느 날 보니까 수행과 관련이 있었다는 것 정도이다.
그동안 적지 않은 시간을 부평초처럼 떠돌며 살아온 생애를 뒤로하고, 이제야 삶 속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남은 생을 보낼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이 글이 읽는 분들의 에고를 자극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연필을 놓으며 바래는 마음이다. 작으나마 나눔이 되었으면 한다.
변혁의 시대에 영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고 하니 사실 여부를 떠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 나름대로의 수행에 간단없이 정진하는 계기가 되어 누구나의 마음에 평안이 깃들기를 기원한다.
추신: 장휘용 교수님께
그저 지나치는 것으로 만족하다가 불연 듯 에고가 솟아 길게 쓰게 되었습니다. 무엇하나 제가 스스로 하는 것이 있겠나 싶은 마음에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실명을 쓰지 않았음을 헤아려 주시옵고, 허락되신다면 이 글(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을 풀향기에 실어 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교수님의 사명이 세상에 올곳게 펼쳐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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