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참에, 아그립바(헤롯의 손자)는 대제사장 예복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오랜 기간 대제사장 지위에 있었던 가야바(A.D18~37)를 찾아 나섰다.
이미 두 사람은 친밀한 사이로 발전했기 때문에 못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예복에 대해서 묻자 가야바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으려 했다. 한동안 고민의 기색이 역역하더니만 그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대제사장 예복은 지성소에 들어가 야훼의 계시를 받기 위해 갖추어야 할 의상이다. 세마포의 겉옷에 바지, 허리에 두루는 띠와 터번은 기본이고 그 위에 긴 앞치마처럼 생긴 에봇을 어깨에 걸치고, 푸른색 초록색 진홍색의 가는 베실로 짠 띠를 다시 매고, 가슴에는 12지파를 상징하는 각종 보석의 흉패를 달고, 머리에는 청색 실에 금패가 달린 성관을 쓰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가야바는 이처럼 정장을 하기 전에 지켜야 할 수순도 들려주었다. 우선 대제사장은 백성의 뜰과 이방인의 뜰 선상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화해일 이전 7일 동안 홀로 있어야 한다. 이처럼 대제사장이 유폐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은 혹시 부인이 동침을 요구해오거나 갑작스럽게 가족 중 누군가가 상을 당할 경우 시체를 보게 됨으로 부정을 범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함이란다.
평상시 초상을 당하더라도 대제사장은 상중임을 알리기 위해 머리를 풀어헤치거나 옷을 찢거나 시체를 돌보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 다고 했다. 이처럼 일주일을 무사히 넘기고 해가 질 무렵이면, 대제사장은 목욕을 마친 다음 예복을 차려입고 성전을 향해 사제의 뜰을 가로지르기 마련인데, 이때도 수행 사제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따라온다는 것이다. 이는 카미토스의 아들 시므온(A.D17~18)이 어느 사제가 무심히 뱉은 침이 예복에 묻어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일과 무관하지 않았다.
현관을 지나 성소에 들어서면 일곱 촛대가 불을 밝혀주는 가운데 당직 사제가 건네주는 호롱을 들고 폭 20엘레, 길이 40엘레의 천으로 만들어진 어마어마한 두 개의 휘장 앞에 당도하게 되는 데 이 때 아무리 강심장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긴장하기 마련이고, 지성소는 야훼께서 현존하시는 곳이라 알려졌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규칙을 위반할 경우 야훼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당직 사제들은 물론이거니와 가야바 자신도 초임 당시 벌벌 떨면서 직무를 수행했다는 말을 하면서 야릇한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지성소에 들어서면 창문이 하나도 없는데다가 벽마저 우중충한 색상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소와의 유일한 통로에 예의 두꺼운 휘장이 드리워 있기 때문에 캄캄함에 압도당하면서 감히 호롱불에 의지하여 주변을 살필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 했다. 따라서 지성소에 들어서는 순간 무릎을 꿇기 마련이고, 이렇게 시작되는 기도 시간 중에 특별한 계시와 요한 히루카누스가 들었다는 천상의 소리, 이스마엘 1세(A.D15~16)가 보았다는 환상이 나타나 주길 기대해 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몰 시간과 다음 날 아침, 그리고 일몰 전 세 번의 지성소 출입을 마치고 현관 앞 계단에 서서 사제들에게 의미 있는 말을 들려주어야 대제사장은 자신의 소임에 충실했다는 평을 받았다.
아그립바는 실없는 질문을 하고야 말았다.
“몇 번이나 천상의 소리와 환상을 보셨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가야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성전 앞뜰은 지방에서 올라온 사제들 때문에 발을 들여놓을 자리가 없을 지경이라면서, 이는 지성소에서 방금 나온 대제사장의 예복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들의 죄와 부정을 속죄 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환상이나 계시를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꾸며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제사장의 모자에 해당하는 성관을 보는 순간 거만의 죄와 금 머리띠는 제물을 바칠 때 제물의 피가 사제의 몸에 묻기 마련인데, 이로 인한 부정이 제거된다는 식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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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립바는 여인의 뜰과 사제의 뜰을 구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1엘레(0.525m) 높이의 석재난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난간에는 지팡이, 전대 그리고 먼지가 묻은 발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경고문이 매달려 있었다.
경고문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당직 사제 외에는 성전의 계단을 오르려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폼페이우스 장군은 예외였다. 그는 이방인이면서도 거침없이 성전 안으로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휘장을 제치고 지성소 안을 살펴본 다음, 아무도 없더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때의 부끄러운 기억을 지워버릴 수 없었던 사제들은 성전을 헐고 새 성전을 세우자는 할아버지 헤롯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모양이었다.
당시(B.C64) 폼페이우스 장군은 극동 지역을 순시 중이었으며 예루살렘을 통과하게 되었다. 이때 하스몬가문의 형제들이 패를 갈라 신정 체제를 왕정 체제로 바꾸려 한다면서 진정서를 올린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히루카누스와 아리스토블로 두 사람은 제사장의 후손이긴 하지만 백성을 노예처럼 부리기 위해 서로 왕 행세를 하려고합니다.”
이처럼 고발의 사유를 말하자 히루카누스는
“제가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동생 아리스토블로는 대제사장 직을 빼앗았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세력을 끌어들여 이 같은 짓을 했습니다. 그가 폭력과 무질서의 장본인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반역을 일으켰겠습니까? 이 사실을 말해 줄 증인은 천명이 넘습니다. 제 말이 의심쩍으시면 안티파테르에게 물어보십시오.”
여기에서 천명의 증인은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이두메 지역의 행정장관으로 있던 안티파테르를 증인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아리스토블로도 가만있지 않았다.
“히루카누스가 밀려난 것은 자신의 성격 때문입니다. 그는 활동적인 인물이 못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경멸을 받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면서
“더구나 저기 모여 있는 자들의 사주를 받거나 안티파테르와 같은 이방인을 가까이 하고 있으니 언제 유대가 이방인의 손에 넘어갈지 모른다고 근심하는 백성이 저를 왕으로 추대하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왕 칭호는 부친께서 이미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폼페이우스 장군은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자주색 옷에 화려한 장식품들을 치렁치렁 걸치고 나온 아리스토블로를 꾸짖고 형과 화목 하라는 말을 남기고 나바테아로 떠났다. 그러나 아리스토블로는 모친과 형을 옥에 가두고 바리새인들 중 몇 명을 죽이기까지 했으며, 나바테아에서 돌아오는 장군을 마중 나가 500달란트 상당의 뇌물을 주려다가 이를 수상하게 여긴 장군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려 하자 놀란 자들이 성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아리스토블로는 포로 신세가 되고, 예루살렘은 로마군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폼페이우스 장군은 공성 망치와 막강한 병력을 동원해서 성벽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을 점거(B.C.63)한 다음 주동자들을 죽였다. 이때 사제들은 번제단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으며 자신들은 그 일과 무관하다는 뜻에서 그리하더라는 것이었다.
장군은 본당에 들어가서 다량의 금과 거룩한 등대와 고귀한 그릇과 향료, 그리고 2,000달란트에 달하는 돈을 보았으면서도 빼앗지 않았으며 휘장을 들추고 지성소까지 살펴보게 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참으로 놀랍고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광야의 수도원 엣세네인들마저도 성전 무용론을 주장하면서 그 일만은 차마 입에 담으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후 굴욕을 당한 날, 키케로가 집정관 재직 당시의 제179올림피아드 3월 어느 날을 대 속죄일로 정하고 금식과 함께 부정을 제거하기 위한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 재앙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이 나타나면서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등의 경고성 발언을 하면서 야훼의 진노가 당장에라도 임할 것처럼 과장해서 말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어리석은 일부 백성은 가뭄이 들거나 이상한 소문을 듣기만 해도 최후의 심판, 세상의 종말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전개되는 줄 알고 불안해 할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의욕마저 읽게 되었다.
이에 반사적으로 등장하게 된 인물들이 있었으니 그를 일러 구원을 선포한 예언자들이라 했다. 베드로가 배신하는 바람에 빌라도 총독(A.D26~37)에게 사형판결을 받은 갈릴리 출신 젊은이도 그런 케이스의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소설 ‘유대 왕 아그립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