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필요했다. 그러나 마땅한 땔감이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나무를 발견하고 화로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불은 살아나지 않고 연기만 요란스러웠다.
나무는 물에 젖은 것들이라 부채질 해 보지만 살아나지 않았다.
화가 나서 나무를 꺼내 던져버렸다. 나무는 흩어지면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가야바는 그간의 일을 돌이켜 보면서 자신이 마치 화부인 양 이런 생각을 하면서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자칭 젊은이 제자들이 미문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가야바는 은연중 반겼다. 지난번에는 사마리아인들도 우리의 형제요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젊은이가 죽임을 당했으나 일행이 나타났으니 풍요로운 삶을 이끌어 내는 데 그들이 한 몫 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병자를 고치면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건강하게 되었습니다.’말하더라는 것이었다. 조금은 이상한 생각이 들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분명 그들의 언행 속에 젊은이 가르침이 녹아 있으리라 보았다.
참, 그들은 젊은이를 예수라고 불렀다. 그래서 젊은이가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 때서야 알게 되었다. 대사제 안나스의 형 되는 사람의 이름이 예수이고 보면, 참으로 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예수( ~A.D 6)는 안나스(A.D 6~15)에게 대제사장 지위를 물려주고 노환으로 죽었다. 그런데 젊은이를 예수라고 하다니!
가야바는 스스로 합리주의자, 경우에 밝은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그래서 젊은이 시신이 없어진 다음에도 범인 체포에 적극 나서지 않은 이유를 밝힌 바 있거니와 아마도 젊은이 일행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시신이라도 가져갈 요량으로 그런 짓을 하였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비록 재판 당시 겁에 질려 도망을 갔으나 대제사장 가야바 자신이 젊은이에게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면 숨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미문에 다시금 모습을 나타낸 것만 보더라도 알만 했다.
어찌되었거나 젊은이 사건이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어질 만 할 때, 제자들이 나타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이상한 말을 했다.
‘야훼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이 말은 광야의 수도원 사람들이 주장하는 말세론과 유사한 내용이었다.
또 이런 말도 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야훼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그 일에 증인이로다.’이것은 부활론자들이 기뻐할 말이었다.
그들의 언행이 이 지경에 이르자 경건한 유대인들이 저들을 고발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급기야 대제사장 가야바는 베드로를 불러들여 더 이상 젊은이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훈계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가야바는 또 다시 황당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들이 무리를 지어 행동을 하다 보면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그런 가운데에서 협박성 발언이 나왔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고, 판 후에도 네 임으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너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요 야훼께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 말을 하기가 무섭게 남자가 죽었다. 그의 아내도 남자에게 생긴 일을 모르고 들어왔다가 똑 같은 일을 당하고 그 여자도 죽었다.’
이것은 분명 협박성 발언이었다. 심약한 사람이 들으면 오금이 저려 땅에 주저앉을 내용이었다. 더구나 야훼를 빙자해서 그 따위 말을 하다니!
가야바는 협박성 발언을 한 자를 잡아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가야바는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젊은이와 제자들의 관계를 알아보았다. 그들 중에는 누가 더 높은가 서열이나 따지지 않으면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묻기 예사였으며, 젊은이가 내 가르침은 선생과 제자가 따로 없는 삶 그 자체다.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라 등을 떠밀면, 주님! 하면서 매달리던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을 향해 ‘이 한 몸 머리 둘 곳도 없다’고 젊은이는 탄식했다는 것이었다.
더욱 기가 막힌 이야기는 젊은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베드로란 자는 하늘에 맹세코 젊은이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정하면서 도망을 갔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다른 생각을 하면서 젊은이 주변에 머물러 있던 것은 아닐까?
이토록 자문을 반복하던 가야바는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그러면 그렇지!”
자칭 제자들은 광야의 수도원 분위기에 흠뻑 젖은 자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선생을 두고 제자란 자가 도망을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꾀나 어수선했다.
무식하고 가난한 자들 중에서 광야의 엣세네인들 그물에 걸려들지 않은 자가 없다고 하더니 그들도 별 수 없었을 것이다.
가야바는 더 이상 그들에게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 * -
재판이 열리자 구경꾼들이 몰려왔다. 살인, 강도, 절도, 상해와 같이 피해 당사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의외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가말리엘을 위시해서 회당소속 사람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젊은이 사건이 다시금 떠올랐다.
누가 보더라도 본 사건은 젊은이 사건 연장선상에서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저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특히 회당소속 랍비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맛디아스 보고에 따르면, 랍비들이 젊은이를 질투한 나머지 대사제 안나스가 민족의 기강을 문란케 하는 자를 엄히 다스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젊은이 일행 중 누군가를 매수하여 고발케 했다는 것이다. 이런 소문이 난 이상 어떤 식으로든 아니라고 해명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가야바가 베드로를 잡아들이도록 명령을 내린 이유는 그들이 젊은이 가르침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에 이상한 도가 뿌리내리기 못하게 사전에 차단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가야바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한 가말리엘은 재판 도중에 엉뚱한 말을 했다.
“여러분 들으시오.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십시다. 이전에 드다란 자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 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해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습니다. 그 후에는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여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내버려두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 말과 소행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스스로 무너질 것이고, 주께서 나왔으면 우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대적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이 말을 통해 자신들은 젊은이 사건과 무관하다는 뜻에서 그런 말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효과는 이내 나타났다. 구경꾼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고, 사두개파 의원들마저 동조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가야바는 탄식을 했다.
‘어찌 저리도 상황판단에 어두울까?’
그리고는 가말리엘을 향해 ‘당신 큰 실수를 하는 줄이나 아시오.’이렇게 면박을 주고 싶었으나 참았다. 바리새파 총수격인 가말리엘과 논쟁을 벌려 판도를 바꿀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가야바가 시작한 법정은 가말리엘이 나서는 바람에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 후, 베드로는 아무데서나 사람을 불러 모아놓고 설교를 했다. 회량에서도 랍비들 눈치를 살피지 않았다. 가말리엘이 ‘주께서 나왔으면 우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선언한 마당에 두려울 것이 없어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