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도착한 사람들은 자기 구역에 양이나 염소를 가두어 놓고 있었다. 고기를 익혀 먹을 때 쓰려고 무화과나무, 개암나무, 소나무의 마른 장작도 수북이 쌓아 놓고 있었다. 번제단에서 벌레 먹은 나무를 가려내면 그것을 자기 구역으로 옮기는 자도 있었다.
순례의 길에 나선 사람들은 니산월 10일 이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희생제물을 10일에 택해서 14일까지 따로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물용 가축을 다른 것들과 섞이지 않도록 격리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병들거나 눈멀거나 다리를 절거나 고환의 상태를 살필 필요가 있었다. 제물용 가축으로 쓰일 놈은 일 년 된 것. 아직 교배의 경험이 없는 순결한 놈, 거기에다 살찐 놈을 최상품으로 쳤다. 그러니 시장에서 구입하기보다는 집에서 키운 놈을 가지고 오는 게 상책이었다.
4일 동안이나 곁에 두고 지켜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애절한 마음이 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속죄를 위해 죽여야 할 놈이니 일말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켜야 효험이 크다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젊은이가 죽임을 당한 다음 날, 그러니까 니산월 14일 정오가 되면서 유월절 축제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울타리 속에 가두어 두었던 양이나 염소를 몰고 번제단 앞으로 모여들었다. 한꺼번에 입장할 수 없어 순번을 기다리며 길게 늘어섰다. 양을 어깨에 메거나 염소 고삐를 잡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자도 있었다. 가슴에 비둘기를 품은 자도 있었다.
차례가 된 사내가 도살장 앞으로 다가서자 보조원들이 달려들며 양의 다리를 잡고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버둥거리던 양은 예리한 칼로 급소를 찔리는 순간 잠잠해진다. 그러나 울컥울컥 피를 토해낸다.
다른 사제가 재빨리 성찬 그릇에 피를 받는다. 아직 죽지 않고 꿈틀거리는 양의 몸에서 가죽을 벗겨내는 손놀림이 정확하고 신속하다.
다시 예리한 칼이 배를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낸다. 보조원이 거대한 수조에서 흐르는 물로 대강 씻는다. 칼을 쥔 사제가 심장을 도려내서 약간의 살점과 함께 쟁반에 담는다. 또 다른 사제가 쟁반을 가지고 계단을 오른다. 번제단에서는 신성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사제는 예물을 불 속에 밀어 넣는다. 예물은 화염에 싸이면서 이내 사라진다. 인간의 죄를 속죄할 요량으로 치러지는 의식치고는 너무도 빨리 끝나는 작업이다.
애처롭게 죽어간 양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사내가 자기를 위한 의식이 끝났음에도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사내는 자기 몫의 고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보조원이 사제의 몫으로 양털을 챙긴 다음에야 주인에게 고기를 넘겨준다.
다음 사람이 염소를 몰고 탁자 앞에 다가선다. 탁자에 오르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염소. 똑같은 작업이 반복되는 가운데 도살장 바닥은 피로 저벅거린다. 물을 뿌릴 때마다 피와 오물이 수로를 따라 키드론 골짜기로 흘러내린다.
백성의 뜰은 시끌벅적 요란스럽다. 번제단에서 돌아 온 사내와 가족이 굵직한 석류나무 막대에 고기를 매달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비슷한 일을 하기에 모두들 여념이 없다.
서쪽 하늘에 노을이 들면서 일몰 시각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려온다. 종일토록 기다리던 사람들은 서둘러 화로에 불을 지핀다. 바싹 마른 장작이라서 불꽃은 쉽게 살아나고, 훌륭한 바비큐 요리를 위해 석류나무 막대를 돌린다.
달이 중천에 떠오르자 화로의 불이 시들해지면서 고기가 알맞게 익었다. 또 다시 나팔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십계명 낭독과 기도를 합창한다. 목청껏 내지르는 소리 때문에 귀가 멍멍할 지경이다.
그룹으로 편성된 구역마다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연장자가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떡을 높이 들면서 다음과 같이 소리친다.
“보라! 이것은 고난의 떡이다. 우리의 조상이 애급에서 나올 때 먹던 떡이다.”
연장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들 화로에 달려들며 구운 고기와 떡을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한다. 쓴 나물도 함께 먹는다. 고기는 새벽이 되기 전에 모두 먹어치워야 한다. 체면치레나 사양할 필요가 없다. 뼈를 꺾거나 부수는 사람도 없다. 머리뿐 아니라 정강이와 내장까지도 남김없이 구어 먹는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리에 띠를 두르고, 신발을 단단히 붙들어 맺다. 먼저 식사를 끝낸 사람들은 지팡이를 들고 백성의 뜰을 돌기 시작한다. 이내 긴 행렬이 만들어지면서 장관을 이룬다.
성전소속 사제들도 예외가 아니다. 대제사장 가야바 차림도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다. 단지 행렬의 앞에 섰을 뿐이다.
- * -
유월절 의식이 끝난 다음 날, 하늘 높이 둥근 달이 뜬 시각에 순례자들이 성전 뜰에 다시 모였다.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마차라는 떡을 나누어 먹으면서 구전 설화집 하가다를 낭송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기도를 암송했다.
“우리는 파라오 노예였으나, 주께서 권능의 손을 펴 이끌어 내셨습니다. 찬양 받으소서. 주께서 우리를 애급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영영 파라오의 노예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지혜가 많고, 아무리 전통에 충실하다 할지라도 이 사건은 언제 어디서나 강조되고, 반복되어야합니다.”
이처럼 기도를 끝낸 사람들은 노래를 합창하며 거처로 돌아갔다.
16일 아침, 다시 성전 뜰에 모였다. 21일까지 무교절 관습에 따라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무교절 행사는 애급에서 고통 받으며 지낸 조상을 기억하기 위한 모임이라 노역에 시달리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돈을 받지 않고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성전 뜰에 다시 모인 것이다.
성전 본당건물은 헤롯 당시 완공(기원전15년)을 보았다. 그러나 성전 산은 본래 가파르고 정상이 좁기 때문에 본당건물을 세우고 계단 아래에 사제의 뜰과 백성의 뜰이 만들어졌다. 그리고도 좁아서 다시 계단을 만들어 그 아래에 여인의 뜰이 조성되었다. 또 그 아래로 이방인 뜰을 만들다 보니 산 정상을 깎아 내리고 키드론, 두로베온 두 골짜기 낮은 곳에서부터 석축을 올려 흙을 채워나갔다. 무교절 행사기간 중에 이 일을 했다.
축제기간 중에 하는 일이라 마냥 즐거워하며 일을 했다. 이처럼 성전 뜰을 넓히는 공사가 끝나야 성전봉헌식을 올린다고 했으니 언제 올려 질지 아무도 몰랐다. 그토록 일이 많았다. 더구나 일 자체가 축제행사의 일부가 되고 보니 불평할 수도 없었다.
행사 마지막 날, 사람들은 다시 성전 뜰에 모여 민수기의 기록에 따라 흠 없는 수송아지 둘, 수양 하나, 일 년 된 수양 일곱을 가지고 번제, 소제, 속죄제 3제를 드렸다. 그런데 행사기간 중에 황당한 이야기가 나돌았다. 동굴무덤에 있어야 할 젊은이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이처럼 궁금해 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왜 십자가상에서 죽어야 했는지 묻지도 않았다. 빌라도 총독에 의하여 판결을 받았으니 시카리당원이려니 지레짐작하는 모양이었다.
간혹 랍비들에게 물어볼라치면 강도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으니 한통속의 범죄자가 아니겠느냐고 대답했다. 따라서 그들의 관심사는, 대제사장이 하인들을 보내 무덤을 지키게 했는데 어떻게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십자가 형틀에 매달린 죄수는 방치해 두는 게 관례다. 흉악범일 경우 까마귀에게 살점을 뜯겨 뼈가 앙상하게 드러날 때까지 내버려두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당돌하게도 아리마대 요셉이란 자가 총독을 찾아가 시신을 달라고 청했으며, 총독은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청을 들어 주었고, 현장까지 따라 간 로마 병사는 두 강도의 다리는 꺾어 사망 확인을 하면서도 유독 젊은이에게는 그와 같은 잔인한 검증을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더욱 수상쩍은 일은 그 다음이었다. 요셉이란 자가 시신을 동굴무덤에 옮기면서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다루더라는 것이었다.
본래 유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가매장해 두었다가 1년이 지난 다음 시신을 꺼내 화장하면서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이 행사를 탈관식이라고 하는데 사제가문과 경건한 백성이 선호했다. 헤롯 가문의 사람들은 별도의 왕실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주변을 치장했으며, 동굴무덤에 시신을 모셔놓고 부활의 때를 기다리는 자들도 있었다.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자들이 이 짓을 했다. 그들은 성전 산 동쪽 키드론 골짜기에 시신을 묻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엣세네인들보다 마음이 더 급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 생전에 부활이 있을 것이라 믿고 시신에 향유를 바르며 요상한 짓을 했지만 아직까지 살아난 사람이 없었다.
가야바는 고발사건 당시 젊은이 신상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젊은이는 그 많은 여관이나 민박에 들지 못하고, 천막마저 빌릴 돈이 없어서 감란산에서 노숙하며 지냈다. 그런 사람에게 편한 잠자리하나 마련해 주지 않던 자들이 이제 와서 시신을 세마포로 곱게 싸서 동굴무덤에 모셔 놓았다고 한다면 누가 보아도 수상쩍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가사상태에 있다가 살아나기라도 한다면 ….’ 은근히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 없지 않았으나 부활론자들이 먼저 발견 할까 근심이 되여 무덤을 지키게 했던 것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회당장 가말리엘이 요셉과 니고데모를 불러 크게 꾸짖더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젊은이 생전에 그의 주변을 맴돌던 자들이야 요상한 짓을 하고도 남을 일이지만, 대다수 회당 사람들은 젊은이를 눈에 가시처럼 여겼을 것이니 화를 낼만 했던 것이다.
그 후, 요셉과 니고데모는 무덤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따라서 무덤을 지키던 하인들도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았을 것이고, 이런 와중에서 시신이 없어진 것이다.
가야바는 하인들을 꾸짖지 않았다. 시신을 찾아 나서지도 않았다. 축제기간 중에 생긴 일이라 경황이 없기도 하려니와 부활론자들 기세도 한풀 꺾였을 것이니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보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