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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
떠남에 대하여
4
05-07-13
바람
1,092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머물려고 해야 머물곳도 없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려고 해도 떠날 곳도 없는 영원한 나그네와도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 그것이 인생의 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찬란한 모습으로 변화되였을 때, 베드로서는 그것이 너무나 좋게 보였던 지라 하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거기서 초막을 짓고 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에 대하여는 일언반구도 안하시고 도리어 엘리야가 먼저 와서 이 모든 일을 회복하여야 하리라 말씀하시면서 그 엘리야가 잠시 세례요한의 모습으로 이미 와 있음을 증거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기억할 만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서게 되었을 때에 홀연히 찬란한 모습으로 갑자기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안에 있는 그 나라는 머물려고 해야 머물곳도 없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려고 해도 떠날 곳도 없는, 이미 태초로부터 영원무궁히 빛의 세계로 충만한 그것이기에 때가 임하기만 하면 그 즉시 그 모든 그 이전의 나라와 더불어 온전히 변화되는 그 세계의 것, 밸개의 것, 별세계의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는 감히 어떻게 상상할 수도, 측량할 수도, 저울질 할 수도 없는, 이 세상과는 별도로 되어져 있는 듯한 그 이전의 것이 비로서 임해져야만 알 수 있는, 오리무중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세계의 것, 별개의 것, 별세계의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너무도 기적과도 같은 지극히 좋은 것이 현실로서 나타나니까, 그러한 곳에서 집을 짓고 살면 한평생 인생은 살만한 것이다라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화로서만 가능한 그 나라는 그렇게 어떤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싶어 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미처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도무지 성립이 되지 않는 헛말을(구름을 잡을려고 하는 말 같은 것)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그네의 특징은 어딘가 일정한 곳에 머무르기 보다는 어디론가 자꾸만 떠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의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혹 어디론가 자꾸만 멀리 떠나고 싶은 그러한 마음자세로 사는 것이라 볼 수도 있지 않나 여겨지기도 하는데, 실상은 그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이미 그 모든 것으로 회복되어진, 태초이전의 그 나라로서 그것화, 그 세계의 것으로 변화된 상태의 것임이, 때를 따라 하늘의 것이 임하여 짐으로서 나로서는 떠나있었으나, 그 나라의 것으로는 단 한번도 떨어져 본적이 없이 본래 영원무궁히 함께 있었음이 기이함으로 다가와 지는 것, 그것을 이름하여 세상에는 단 한번도 발 디딜 곳이 없는 나그네 인생이라고 한가지 방편으로서 형용해 보는 듯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변화가 되었을때, 베드로는 그것이 본래 자기자신이 있었던 그 나라의 것임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 나라의 것이 어떤 때는 예수님으로, 어떤 때는 모세로, 어떤 때는 엘리야로, 어떤 때는 베드로로 나타났건, 그것은 이미 이 세상의 임시 나그네의 모습으로서, 그것이 전부 다 아님으로서, 그것이 전부 다 돌이켜 짐으로서, 본래 그 나라의 것임을 알려주는 신호탄과도 같은 것임을 알아차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임시 나그네의 모습으로서 그러한 본래 형상으로의 회복을 위하여 세례요한이 그러한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처럼, 지금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 그러한 사명으로서 저마다의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눅9:30)
세상이전의 그 나라의 것이 잠시 임시 형용의 모습으로서 예수님의 별세(보여지는 것에서 떠나가심)를 말씀하실 때에, 예루살렘에서 하실 것임을 애기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마음의 중심을 애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모든 혼란과 에워쌓임이 가중되는 듯이 여겨지게 될 때에, 그 모든 우주만물의 흐름이 담겨져 있는 그 마음속에서 뭔가로부터 떠나는 듯이, 새롭게 본래의 모습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사막광야에서 돌베개를 하고 자다가 한 밤중에 하늘로부터 오르락 내리락 하는 사닥다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뭔가로부터 도망치는 듯한, 뭔가로부터 멀리 떠나가는 듯한 고독한 나그네의 모습일 때, 돌연 하늘의 이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을 보게 된때는, 부드러운 솜베게를 하고 잘때가 아니라, 딱딱하기 이를 때 없는 돌베개를 하고 잤을 때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부드러운 솜배게가 아니라, 딱딱한 돌배게를 하고 잣을 때 그러한 이상을 보게 된 것이겠습니까?
부드러운 솜은 사람으로서 능히 뚫고 들어가 그 세계의 것을 알아볼 수 있음이 어느 정도 가능하겠으나, 돌은 그 틈이 좁고 심히 단단해 사람으로서 그 안을 뚫고 들어가 그 세계의 것을 알 수 있음이 거의 다 불능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돌과 같이 참으로 견고하고 단단한 것이 우리들의 마음중심에 있는 핵인 것입니다. 핵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대부분 헐겁고 부드럽게 되어있지만, 핵은 자가자신의 붕괴를 막고자 대단히 오래되고 단단한 것으로 겹겹이 둘러쌓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핵은 세포중에 그 면적이 몇십만분의 1에 불과하지만, 그 질량은 세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별세하심, 야곱의 이상을 보게 됨, 본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짐은 오직 마음의 그 중심에 이르러지게 될 때에 비로서 가능케 되는 것입니다.
2차세계대전은 핵으로 인하여 결정적으로 종결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평화이든, 그 모든 전쟁이든 핵앞에는 무력하게 손들게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핵중심의 모습 형상으로 솟아나기 까지는 대로 내 육체속에 사람들의 미혹,지진,기근,그 모든 난리와 소문들이 ,내 앞에 득세하는 것처럼 나타나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장차 나타날 그 모든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도 없는 그 모든 우주삼라만상의 기이한 족적들인 것이니, 그런줄 알고 믿음으로서 그 모든 것들을 스스로 가능케 하는 하늘의 섭리에 나 자신을 기꺼이 떠나보냄(맡김)이 때로 간절히 요청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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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13
원정
그대 떠나려하는가?
그 순간 당신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떠나보지 않고
어찌
지금 이 순간에 머물 수 있으랴!!!
05-07-14
여명
전에는 하나님께 나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못 맡겼는가?
맡기면 과연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그대로 나에게 뭔가를 해 주실 것인지 불확실했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해주신다는 확신은 없고,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지 알수가 없으니 불안해서 맡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지녔던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와보니 그냥 맡기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을 느낍니다.
많은 세월을 살아왔는데 '나'의 한계는 너무나 뻔하고 '나'란 존재 역시 너무나 허무하며 믿을 것이 못되고 ........
결국 저는 낭떠러지에 이르른 심정이 되어
어느날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알 수 없는 행복이 밀려왔습니다.
바보가 된 듯, 멍청한 듯, 고요하면서도 평화롭고 그윽한 행복 속에 한동안 머물렀습니다.
자주 놓치곤 하지만
맡김의 행복을 늘 묵상하곤 합니다.
바람님, 제가 잘 이해 못하는 부분이 많습니다만, 좋은 글 늘 고맙게 받아 읽습니다.
외람되오나 부족한 저에게 많은 지도와 도움 주시기를 빕니다.
05-07-14
바람
이해라는 말뜻을 한자로서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理: 王은 하늘과 땅으로 이어지게 하는 그 중심된 힘(도)이라 할 수있고, 里는 그 안에 담겨진 공간적(거리적)상태라 볼 수 있습니다.
解: 角은 오래되어 단단하게 솟아나오는 어떤 힘(압축되어진 것)이라 할 수 있고, 刀는 그러한 힘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상태가 자꾸만 해체되고 나누어지는 듯한 것이라 할 수 있고, 牛는 그 안에 담기어져 있는 어떤 충만한(살지고 기름진것)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해는 각자 그 안에 그 모든 시공간의 것이 얼마만한 역량의 것으로, 얼마만한 응축된 것으로서, 그리고 그것이 또다시 해체되고 나누어지는 것으로서, 그 안에서 그 얼마나 충만하게 다가올 수 있게 하는 것이냐? 하는 그 차이적 상태에 따라 그 이해의 깊이도 전부 다를 수 밖에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여명님은 여명님의 그러한 상태로서 이해하는 것이고, 저는 또한 저의 상태로서 이해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인생은 이해한 것만큼 달라지고(?), 이해한 것만큼 스며들고(?), 이해한 것만큼 뭔가가 남습니다. 그런데 이해는 기억이라고 하는 소자에 의존되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해는 어떤 기억으로서 그 속의 것이 새롭게 다아지는 상태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인데, 각자 안에 있는 그러한 기억의 소자들이 그 얼마만한 시공간의 상태에 속해져 있는 것이냐에 따라, 이해의 깊이도 조금씩 차이가 날 수 밖에는 없지 않나 여겨집니다. 여명님의 글 고맙습니다.
05-07-15
여명
이해라는 말에 그러한 오묘한 뜻이 담겨 있군요.
그리고 이해가 기억에 의존되어 있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각자 안에 있는 그러한 기억의 소자들이 그 얼마만한 시공간의 상태에 속해져 있는 것이냐에 따라, 이해의 깊이도 조금씩 차이가 날 수 밖에는 없지 않나 여겨집니다.'
바람님 말씀 경청하며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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