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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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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었던 아들의 비유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
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서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중 하나에게 붙여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 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
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 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
버지께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였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
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측은히 보고 달려가 옥을 안
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
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
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 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들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받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여러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
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아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
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애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것으로되 이 동
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
하다 하니라"(눅15:11-32)
성경말씀,여러 경전의 말씀은 나 자신을 잘 살펴보라고 주신 말씀이다. 남과 나를 비교해 보는 것이 때로는 필요하겠지만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말씀을 통하여 나 자신을 돌아보고 살펴보는데 있다. 따라서 나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오직 나, 인간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살펴보고자 한다. 모든 경전의 핵심은 '나 자신을 잘 살펴보고 이해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다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나 자신을 모르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진정 깨닫지 못한다면 그 또한 무슨 소용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만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인 잃어버린 '나'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두 아들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다. 두 아들은 나의 내면세계에 항상 공존하면
서도 서로 양분되여 살아가고 있는 나의 양면성(이중성)을 지칭하는 상징적인 언어이다.
어떤 사람은 나의 내면에 들어 있는 이러한 양면성(이중성)을 다 포함한 한 사람을 애기하며 두
아들은 이러한 한 사람에게서 발생되어 나타난 양면성(이중성)으로서 사람들의 이러한 양면성(지
중적)인 모습(구조)을 '두 아들'이라고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 둘째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주소서 하는지라 아
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러면 이 말씀에서 '둘째'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 말 그대로 자기는 항상 첫째가 못되고
둘째라고 하는 의식에 젖어있는 그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비교의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
기자신을 뭔가에 비하여 못하다고 하는 열등의식,부족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자기자신에 대한 불만, 자기자신에 대한 열등의식에 사로 잡혀 살아가고 있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생각들은 필연적으로 끊임이 없이 뭔가를 더 바라게 되어 있는 것입니
다. 그래서 이러한 생각들이 마침내 기도(소원)로 표현되여 아버지께 뭔가를 요청하게 된 것
입니다.
"아버지여! 저는 아직 뭔가가 부족합니다. 더 많은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요구가
채워지고 제 마음대로 뭔가를 해야 제 인생이 비로서 풀릴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 소원대로
이렇게 이렇게 해 주옵소서'라고 요청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그 요청을 들어주사 둘째에게 살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세상에서 나름대
로 살아가게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허락하여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먼 나라에 가서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서 궁핍한지라
그러자 둘째는 '얼씨구나 좋다 지화자 좋다 이제는 살판났네'하면서 그 모든 조건들과 함께 더
불어 먼 나라로 가서 더불어 허랑방탕하며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재물은 본질적인 아닌 비본질적인 것, 영원한 것이 아닌 일시적인 것,불변이 아닌 너무
도 자주 변하는 것등을 상징하는 것이며 허랑방탕은 그러한 것들에 취하여 정신없이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라는 의미는 그러한 것들에 취하여 살다보니 점점 하
나님(본질)과의 사이가 점점 벌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들은 얻었다고 해도 지극히 일시적인 것들이기에 때가 되면 모두 다 소
비가 되어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은 언제라도 항상 크게 흉년이 들때가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바라는 생각(행복)은 지극히 일시적인 것이니 언제고 항상 그 반대적인 것
이 나타나 우리를 흉년이 들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뭔가를 바라고 그것을 추구함은 항상 반대적인 것이 그 뒤에 깔려 있습니다. 행복을 바란다는 것은 항상
그 생각에 반대하는 불행이 나의 내면에 깔려있다고 하는 것을 명확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그 무엇인가를 바랄 수도 있으되, 그것만을 바라고 계속 쫓아가다 보면 반드시 언젠가는 상황이 바뀌면서 필연적으로 크게 흉년이 들어 궁핍하게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노예로 전락함
"그 나라 백성중 하나에게 붙여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 지라"
'그 나라 백성중 하나에게 붙여사니'라고 하는 의미는 그렇게 흉년이 들어 궁핍하게 되었음에도
아직도 미련이 있어 이 둘째적인 생각이 깊이 깨닫지를 못하고 자기 안에 있는 한가지 생각에 붙
잡혀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러한 생각에 끌려
다니는 모습이며,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생각속
에서 그래도 뭔가 행복(기쁨)을 맛보려고(채우려고) 하는 어리석은 모습인 것입니다.
자기 생각(느낌,행위) 자체의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아직도 자기가 원하는 어떤 생각으로,
그러한 생각으로 뭘 열심히 하면, 그러한 생각속에서 뭔가 좋은 것이 나오겠지 하면서 무작정 매
달리는 그러한 모습인 것입니다. 행복(기쁨)을 맞보려고 하다가 오히려 나중에는 역전이 되
어 그러한 것을 맞보려고 하는 생각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여러가지 것들, 내 생각속에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통하여 기쁨과 은혜(구원)를 맞
보려고 하다가 그것이 나중에는 역전이 되어 그러한 것을 탐하게 되고 결국은 그러한 생각들에
노예가 되어 버리는 어리석은 모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러자 비로서 이 둘째에 속한 생각이 드디어 후회를 하기 시작합니다. '아! 내가 어떻게 하
다가 이렇게 까지 되었는고!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고!'하면서 깊이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생각(행위)으로 행복을 찾으려고 하다가 나중에는 이것이 역전되어 도리어 극심한 생각의 혼란
이 오면서 죽음의 위기를 느끼게 되자 드디어 앞이 캄캄하게 된 것입니다. 깊은 절망의 구렁
텅이, 깊은 혼돈의 늪에서 인생의 절망감이 생각을 압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세하게 주목하여야 할 점은 그러한 인생의 위기속에서 둘째 생각속에 '이에 스
스로 돌이켜'와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 고'라고 하는 생각이 떠올랐
습니다.
인생의 결정적인 위기속에서 그는 스스로 돌이킬 수 밖에 없었고 또한 동시에 문득 '아버지 안
에 있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에 대한 생각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불현 듯 떠올랐습니다. 그
리고 그러한 품군들이 참으로 그리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깨달음)이 그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문득 떠오른
그 생각(깨달음)이 그를 죽음의 나락에서 영생의 길로 바꾸어 놓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입
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스스로 돌이켜'와 '아버지안에 있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의 의
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천지간에 있어 운명(생명)을 죄우할 수 있는 중요한 비밀이 '스스로 돌이키는 것과 품군의 의미
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돌이켜
둘째 생각(느낌)은 인생의 위기를 만나게 되자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돌이키는 것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깨닫고 '이에 스스로 돌이켰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스스로 돌이켜'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스스로 나 자신에게로 돌이켜'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이 말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When he came to his senses'
'senses'는 감각,느낌,인식등을 말합니다. 그런데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풀이하면 '그 때에 그는 그의(자기안의) 모든 감각,느낌,인식들에게로 들어가
고'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행복(더 나은 것)을 위하여 뭔가를 열심히 하였고 구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나중에는 이
상하게 되어 자기 자신을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본능적
으로 이러한 생각(느낌)들이 싫은지라 피하려고(벗어나려)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여전히 그러한 고통이 반복이 되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힘들어 하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
상 그러한 생각(느낌)들을 자기가 벗어날 수 없을을 깨닫고는 하는 수 없이 그러한 생각(느낌)들
속(안)으로 그냥 돌이켰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안에 있는 그 모든 생각(느낌)들 속(안)으로 돌이켰다는 뜻입니다. 즉 스스로 자기가 자기자신의 그 모든 것들의 안으로 들어가 그냥 함께 하였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전에는 자기자신의 그 모든 생각(느낌)들이 원하는 바을 쫓아 갔다면, 이제는 자기자신의 그 모든 생각(느낌)들 속으로 들어가 함께 거한 것입니다. 자기자신의 안으로 돌아가 기꺼이 그냥 함께 있어준 것입니다.
그전에는 자기 밖으로 향하던 그 생각(느낌)들이 이제는 자기 안으로 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어떤 생각(느낌)들이 떠오르건 상관이 없이 그냥 무턱대고 덮어놓고 그냥 마구잡이로 자기안으로 그냥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 순간, 자기 안(생각,느낌,감각)으로 깊숙히 들어가려고 하는 그 순간, 그 모든 것들과 함께 하려는 그 순간, 그의 머리에는 섬광과 같은 한줄기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 고'였습니다.
그러면 '내 아버지안에 있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은 무엇을 말씀함인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품군의 의미
품군은 일용노동자(날품팔이군)으로서 종들과는 달리 주인의 권속의 일원에 포함되지 않은 자로
서 품삯(대가)를 바라며 하루동안 혹은 짧은 기간동안 일시적으로 고용되여 일하는 사람을 말합니
다.. 주인이 필요에 의하여 쓰고 싶으면 쓰고 또한 쓰고 싶지 않으면 쓰다가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극히 제한적,일시적,찰라적인 일꾼인데 품삯(대가)를 바라는 자며, 또한 주인의 권속(가족)에
포함되지 않은 일꾼이니 마치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은 일꾼의 모습이 바로 품군의 의미인 것입니
다. 품삯(대가)를 요구하는 돗한 모습으로서 지극히 일시적으로 사용되였다가 바람같이 사라지고 마는 일군, 그리고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는 일군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
을 말씀합니까?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까?
품군은 우리들의 내면에 떠오르는 그 모든 생각(느낌,인식,감각)들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것들이 일시로 사용되져 졌다가, 또한 사라지는 것이니, 결국 그 모든 것은 나를 위하여 그러한 품군들이 쓰여지기도 없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온통 다 나를 위하여 그러한 모든 것들이 사용이 되어지며 또한 소모가 된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그 모든 느낌들은 이미 다 나를 위하여 사용이 되어지고 있고, 또한 없어지고 있으니, 그런 줄 알고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그냥 내 버려두면 되는 것입니다.
품군은 어디에도 소속이 되어 있지 않는 것입니다. 바람과 같이 와서 잠깐동안 쓰이다가 또한
바람같이 사라지는 것이 품군입니다. 대가만 성취되면 그 즉시 그 즉시 사라지는 것이 품군의 모습입니다.
마치 성행위하고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쾌락이라는 대가를 바라고 하다가 쾌락이라고 하는
대가가 성취되면 그 즉시 사라지고 마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 품군이라는 모습으로 의인화하여 표
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아들은 둘째 아들이 행한 모습을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품군의 모습은 성행위하고 아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품군은 지극히 일시적,제한적,찰라적이며, 어디에도 소속이 되어 있지아니하니 있는 듯 하다가도
반드시 사라질 수 밖에 업는 그러한 성질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사람들이 이러한 품군의
성질(원리)을 이해하지 못하고 품군들이 제공해주는 생각에 붙들리어 거기서 어떠한 대가,행복,기
쁨,만족이 되기를 바라며 그것을 지속하려 한다면 그는 반드시 품군의 노예, 생각(느낌,행위)의 노예가
되어 필히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망가운데 하나는 소속감,성취감,안정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이미 이러한 품군들의 수고로 말미암아 소소감,성취감,안정감을 이미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더 나은 소속감, 더 나은 성취감, 더 나은 안정감을 누리려고 품군들을 혹사시키면 균형이 무너지면서 필히 무너지게 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지극히 작고 일시적인 만족감(성취감,소속감)을 얻어
내면 그러한 것들이 좋아 보이니 그러한 것들을 좋아하며 자꾸만 내 자신이 원하는 그러한 만족감을 얻어낼려고 하는 집착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품군은 대가만 성취되면 그 즉시 사라지게 되어 있는 성질의 것입니다. 품군은 절대적으로
오랬동안 머물러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고 있다가도 대가만 만족되면 즉시 사라지게끔 원리가 그
렇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품군들이 제공하여 주는 생각(느낌)에 자꾸만 만족하려 하
며 그러한 생각(느낌)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그러한 생각(느낌)들이 존속되기를 바라며, 그러
한 생각(느낌)들을 통하여 끝없는 만족감(성취감)을 맛보려 하니 그 얼마나 심한 왜곡입니까?
그러니 이러한 모습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다가 아들로서의 신분을 스스로 잃어버리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내 속에 지금 어떤 혼란(고통)이 있고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는 생각이 있다고
치십시다. 그러면 나로서는 내 안에 혼란(고통)이 있다고 느끼며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
일까요? 그것은 은연중에 내 안에 내 생각과 노력으로서 질서(행복)라고 하는 품삯(대가)
를 얻어내면 '좋을 것'이려고 하는 나의 분별심이 자라잡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종(아들)과 품군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분별없는 나라면, 그러한 혼란(고통)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요, 이들
은 하나님 아버지께 소속이 되어 아무런 대가없이 그냥 일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그 모든 것
을 지극히 신뢰하며 사랑하는 자들이니 혼란(고통)이 설사 온다고 하여도 그것을 혼란(고통)이라
고 하는 분별심이 없습니다. 그것을 혼란(고통)이라고 분별하는 그 마음이 발생되지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을 자비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인식하며 도리어 그러한 생각(느낌)자체와 기꺼이 함께
하며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은혜를 선물하여 주신데 대하여 기꺼이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즉 혼란(고통)이라고 하는 분별심이 없으니 그 모든 것이 온통 다 자비하신 하나님의 섭리, 은혜인줄로 믿고 그냥 다 허용을 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우리의 내면에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매일매일(순간순간)마다 엄청나게 수많은 생각(느낌)들이
떠오르고는 또한 사라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아버지는 이렇게 수많은 품군들의 생각(느낌,행위)
들을 때와 상황에 맞게끔 적절하게 사용하시고 또한 사라지게 하면서 스스로 균형과 조화를 이룸으로서 스스로 풍족한 품군들을 많이 거느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아버지의 나라는 언제나 항상 풍성하고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련하여 풍족하다고 생각하는 쪽은 택하여 취하려 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쪽은 버리려하는 행동을 함으로서 스스로 품군들의 생각(느낌)과 행위들을 감싸안지 못하고 불편
부당하게 대우함으로서 스스로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품군들의 그 모든 것들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즉 품군들의 생각(느낌)과 행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나의 모든 생각과 행위
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생각(느낌)들을 분별심으로 보느냐, 분별심이 없느냐, 혹 있는 듯하면서도 없는냐 하는 것입니다.
즉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분별심의 발생여부에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
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였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 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둘째에 속한 생각이 어느날 자기의 생각이 바로 뭔가 대가를 바라는 생각에 속
고 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절실하게 실감나게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너무도 당연히 자기
가 살길은 오직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그 길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삶, 진실된 삶을 살지 못하고, 거짓생각에 속아
품군과 같은 삶, 헛된 삶을 살았으니 저로서는 도저히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습니다. 하면서 그
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아버지께로 돌이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삶, 진실된 삶을 살지 못하고, 거짓생각에 속아 비참한 삶, 헛된 삶을 살았으니 저로서는 도저히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습니다. 하면서 그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아버지께로 돌이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진리 그 자체, 본질 그 자체를 말합니다. 그런데 진리 그 자체, 본질 그 자체는 우
리 안에도 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그 모든 진리(본질) 그 자체
로 돌아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있는 진리(본질) 그 자체는 무엇을 말씀합
니까? 내 안에 있는 그 모든 것이, 나와 함께 하는 그 모든 것이, 결국 깊이 보면 온통
전부 다 진리 그 자체임을 인식하고 내 안에 있는 그 모든 것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씀
하는 것입니다. 나의 내면에 그 어떠한 생각이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지속이 되면 지속
되 되는대로,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그러한 모든 생각(느낌)들에 대하여
'아! 그래 요 생각(느낌)은 요런 것이로구나. 아! 그래 이 생각(느낌)은 저런 것이로구나' 하면
서 저절로 이해가 됨과 동시에 그 모든 것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동거동락, 함께 생사고락, 함께 희노애락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영혼과 사랑의 통로가 열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측은히 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원리를 모르고, 품군(삵군)의 소리에 현혹이 되어 진리 그 자체를
멀리하게 되니 아버지와 자연적으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깨닫고 진심으로 돌이키 진
리 그 자체와 함께 하려고 하는 진실된 모습으로 되돌아 오니 그 어찌 아니 하나님이 불쌍히 보
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 때 우리 내면에 숨겨져 있던 영(아버지)이 비로서 문을 열고 측은
하고도 반가운 모습으로 나와 우리의 그 모든 것을 기꺼이 용납하여 주는 것입니다.
목에는 하늘과 우리 내면으로 통하는 영혼의 통로가 있습니다. 입은 사랑의 통로입니다.
따라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춤'은 영혼과 사랑의 통로가 열려진 것을 말합니다.
미혹되여 생각에 속아서 굳게 닫혀져 있던 그 영혼과 사랑의 통로가 비로서 활짝열린 것입니다.
영혼의 공간, 사랑의 공간에 진입이 되여 비로서 진리 그 자체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생명의
신비가 열리고, 삶의 신비가 열리고, 영혼의 신비가 열리고 그 모든 것과 함께 하는 진리와 사랑
그 자체가 된 것입니다.
나는 그전에 많은 것을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었습니다. 은혜에 대한 갈망도 많이 있었습니
다. 그래서 기도원에도 꽤 많이 다니고, 여러사람들을 만나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은혜체험도 하고 하는 그러는 과정속에서 생각과 행위가 앞서 여러 가지 실수도 하게 되고 무수
한 혼돈과 방황을 거듭한 적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때로 은혜를 체험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그 때뿐 그것이 지나고 나면 여전히 혼돈과 방황을
거듭하는 나 자신의 모습속에서 언제부터가 그 모든 문제의 원인은 결국 '나' 자신에게서 찾지 않
으면 안된다고 하는 깊은 깨달음이 왔습니다. 철저하게 그 모든 문제의 원인은 결국 '나 자
신'에게 있다. 그러니 철저하게 '나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는 결국 아무것도 될 수 없다.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고 하는 너무나도 뼈저린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 예수그리스도를 생각하기에 앞서 내 자신을 깊이 보고 그 모든 것을 정확
하게 이해하려고 하는 수 많은 각고의 진통이 있었습니다. 무수한 시행착오와 무수한 번뇌속에
서 저는 어느 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청천벽력과
도 같은 깨달음이였습니다. 나는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만 내 자신이 스스로 착각하여, 내 생각에 속아 나 스스로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을 진
정으로 깨우쳤습니다. 너무도 맹백히...
나는 너무도 잘 압니다. 수많은 문제 투성이의 존재임을 너무도 잘 압니다. 죄로 뒤범벅이
된 너무나도 완전한 엉터리임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기 때문에 도리어 아무 문
제가 없는 사람임을 가슴이 벅차도록, 그 모든 죄가 이미 소멸되어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음을 눈
이 부시도록 너무도 분명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왜 인지 아십니까? 왜! 왜! 왜! 인지 아십니까?
'그 모든 생각느낌)들은 이미 다 나를 위하여 수고하고 또한 사라지는 것인데, 내가 그것을 '좋다. 안좋다'로 분별심을 낸 것 뿐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내 삶의 신비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 삶 자체가 그 얼마나 참으
로 기적과도 같은 것임을... 아! 내가 애태 영적소경인채로 살았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
면서 진리가 무언인지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였었구나!
영적소경이 사람들을 가르칠려고 하였구나를 절실하게 깨우치게 된 것입니다.
삶의 축복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제일 좋은 옷은 칭의 의 옷, 영의(靈依,오로라) 로서 우리들의 내면(외면)이 밝음의 옷으로 갈아
입혀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전에는 자기 생각의 어두움에 가려져 빛이 드러나지 못하였지만
이제는 내면에 있는 밝은 빛이 드러남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움은 약속을 맺
음, 도장을 찍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전에는 방황하였던 자이지만 이제는 확신과 믿음속에서 안식하며 사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
다.
발에 신을 신기움은 이제부터는 그 모든 삶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발검음이 인도될 것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자기 마음대로 다녔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예정된 섭리에 의
하여 저절로 움직이고 멈추어 질 것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기쁨의 잔치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 하더라'
살진 송아지는 내 자신의 육체속에 담겨진 모든 노력과 희생을 상징하며 그러한 모든 노력과
희생들이 아버지를 만남으로 완전히 다 죽어 없어지고 진정 새로운 존재로 새롭게 살아남을 실감
나게 설명하여 주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의 노력과 희생들이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과 희생도 결국은 다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진실로 '헛되다'
라고 깨달았다면, 그것은 가치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의 모든 노력과 희생들은 이미 헛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만, 그러한 것들이 헛됨을 깨닫는 것은 모든 노력과 희생을 통하여서 깨닫
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노력과 희생은 완전히 헛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헛것임을 깨닫게 하는
것은 또한 노력과 희생을 통하여서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의 모든 노력과 희생속에는 반드시 헛됨과 가치있음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
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들의 모든 노력과 희생이전에 하나님의 축복이 이미
우리안에 거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만세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그 계획이 이미 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이미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이미 내 안에, 하나님의 그 모든 것이 이미 내 안에...
그렇게 그렇게 항상 함께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면세계에서는 기쁨의 잔치가 열리게 되며, 우리들안에는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
니다. 존재의 비약이 일어나며 생명의 은혜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것입니다.
옳다고 하는 생각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들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받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
늘 아버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여러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
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
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애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것으로되 이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
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맏아들은 우리들의 생각속에 있는 어떤 옳다고 하는 생각들을 말합니다. 우리들이 그동안 배
우고 읽힌 결과 스스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그러한 생각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분명히 옳다
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르다 하는 것을 그르다 하는 분별을 말합니다.
그래서 첫째 생각이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이라고 말하였던 것처럼
그 말 그대로 그릇것은 안하고 옯다고 하는 것을 충실하게 행하여 온 나의 생각(양심)의 한 부분
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생각(양심)들이 둘째 생각이 큰 기쁨을 누리는 것을 보고 못마땅
하게 생각하니 나쁜 것입니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면 좋은 것입니까?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의 생각(양심)에 의하여 옯다고 하는 바대로 사는 것은 결코 나무랄수 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바람직한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생각들이 스스로를 옳다고 분별심을 일으킬 때
문제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니까 당연히 그렇
게 살았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데 어느틈엔가 그렇게 산 것이 마치 올바르게 산 것인양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자기 생각의 미혹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올바르다고 하는 생각, 양심을 통하여서는 대개 깊은 깨달음을 체험하지 못합니
다. 저는 율법(계명)을 열심히 지켜서 은혜(깨달음)을 체험하였다고 하는 사람의 간증은 들어보
지를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죄(번뇌)로 인하여 극심한 혼돈을 겪은 후에 은혜를 체험하였다고
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즉 말씀을 따라 올바르게 사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혹시라도 올
바르게 산다고 하는 분별심을 일으킴은
오히려 큰 장애물이 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즉 첫째 생각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묵묵히 아버지와 함께 하는 충직한 아들로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둘째 생각은 뭔가 대가를 바라고 하는 욕심많은 품군과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생각
에 속한 부분이 두 번째 생각에 속한 부분보다는 분명히 바람직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깨달음은 첫 번째에 속한 생각(행위)보다는 두 번째에 속한 생각(행위)에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즉 '이러한 생각(행위)은 분명히 옳은 것인데'라는 생각에서 옳음을 깨
우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생각(행위)들은 분명히 옳치 못한 것인데'라고 생각하는 데서
진정한 옳음을 깨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참 묘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나의 분별심에 의하여 마음이 흔들렸을 뿐, 그 모든 것은 완전히 괜찮은 것 뿐임을 너무도 명백하게 인식하기에 그러한 모든 생각(느낌)들에 대하여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느낌)들이 있기에 때로 기쁨,평안,행복,괴로움,번뇌,아픔등 그 모든 것을 겪게 되나 그러한
모든 것은 그 때 그 순간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또한 그 순간이 지나가면 사라지고 마는
그러한 것들임을 익히 알기에 그러한 생각(느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연
연하지 않고 그냥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요사이 제 내면에서 떠오르는 그 모든 생각을 다 이해하게 되면서 참으로 하나님은 인간
들을 신묘막측하고 기가막히게 지으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저절로 탄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
가막힌 솜씨에 대하여 저절로 찬양이 흘러 나옵니다.
싸움과 일치
첫 번째 적인 생각과 두 번째 적인 생각은 항상 서로 싸웁니다. 항상 서로를 견제합니다.
그러나 깨우침을 얻게 되면 이렇게 서로 싸우고 견제하는 그 자체가 바로 균형이고 조화임을 인
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들끼리 서로 싸우도록 서로 견제하도록 그 모든 것을 허락하며,
포용하며, 감싸줍니다. 그렇게 되면 싸움은 더 이상 싸움이 아니라 평화가 되며, 견제는 견제
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이 되며, 혼돈은 혼돈이 아니라 질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평화,질서의 개념이 아님을 이해 하시기 바랍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입니다. 에서는 첫 번째로 야곱은 두 번째로 거의 동시에 태여났습니다.
에서는 우리들의 생각중에서 첫 번째의 생각에 속한 부분을 말하며, 야곱은 우리들의 생각중에
서 두 번째의 생각에 속한 부분을 말합니다. 그러한 양면성적인 생각이 있는 그러한 상태속에
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여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둘은 항상 서로를 견제하고
서로 싸우고 서로를 이길려고(앞서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얍복강가에서 야곱(둘째생각)이 무너지면서 에서(첫째생각)와 더불어 서로 화해하게 됩
니다. 즉 나중에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하나가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 부분의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무너지면서 동시에 이김이 된 것은 야곱(둘째생각)
이지, 에서(첫째생각)가 아닙니다. 에서는 무너진것도 없고 이김도 없습니다. 에서는 강한
자였고 힘(세력)이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힘(세력)만을 의존하였기에 그는 결코 자기
자신에게 무너지지를 않았습니다. 자기의 힘과 노력을 의존하여 끝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에서는 너무도 당연히 깨달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약하였습니다. 스스로 힘이 없는 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무너졌습
니다.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야곱과 함께 하시는 그 은혜와 사랑을,
노력과 행위이전에 이미 섭리하여 나아가시는 그 모든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에서는 자기의 생각(느낌,행위,힘)을 의존하여 살았다고 한다면,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와 일치
하여 살아간 것이지요. 그런데 이와같이 자기의 생각(느낌,행위,힘)을 의존하여 사는 것은 이미
자기 자신의 본래의 모습에서 이탈되여 있는 것입니다. 즉 이미 '잃어버려져 있는 아들"의 모
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꿈에도 자기 자신이 이미 '잃어버려져 있는 아들'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의 모든 생각(느낌,행위,힘)이 무너지면서, 동시에 함께 하면
서, 동시에 돌이키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면서, 본래 자기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에서와 야곱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생각(행위)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축복이 있
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내 생각(느낌,행위)으로서 보다 더 나은 축복을 얻고
소유하려고 하다가 스스로 멸망을, 스스로 잃어버림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아버지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
나이까 하시니"(눅2:49)
예수께서는 이미 아버지집에 거하고 있었던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찾는 가족들
에게 이미 아버지집에 거하여 있는 모습, 이미 아버지와 함께 하는 그 모습을 말씀으로서 가족들
에게 진실을 일깨워주고자 하었습니다. 즉 가족들은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고자 하였지만, 예
수님은 이미 아버지와함께 하는 그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태여나면서 이미 아버지의 집(영)이 있습니다. 이미 존재하여 살아 숨쉬고 있
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만 찾으려고 하다가, 예수님을 통하여 뭔가를 얻으려고 하다가
우리 안에 만세전부터 거하고 있는 아버지의 나라를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뭔가를 찾으려 하기 이전에 이미 그 모든 것이 내안에 이미 '찾아져 있는 그 상태' 뭔가를
구하려 하기 이전에 이미 그 모든 것이 '구하여져 있는 그 상태'로서 함께 하고 있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으려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었을 것입니다.
'왜 너희들은 나(예수)만 찾으려고 하느냐, 내가 이미 아버지안(집)에 있는 것처럼, 너희들도
이미 아버지안(집)에 있지 않느냐' '너희들은 예수를 잃어버린 줄 알고 나를 찾으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나는 결코 잃어버려진 적이 없으니라' '나는 항상 아버지와 함께 하는데 어떻게 내가
잃어버려질 수가 있겠느냐' '너희들이 나 예수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은 너희들 스스로의
착각이니라' '너희들은 "예수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속아" 나를 찾으려는 헛된 행위를 함으로
서 너희 자신 스스로를 잃어버렸느니라'
'명심하라' '너희들은 나 예수를 잃어버린 것이 결코 아니니라' '스스로 착각한 것이니라'
'항상 아버지집(안)에 거하는 예수와 너희 자신을 깨닫지 못하기에, 너희 자신 스스로가 이미
잃어버린 자들 이니라' "너희들은 나 예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너희들 스스로가 "예수를
잃어버렸다는 생각"만 하면서 그 한가지 생각만을 따라가다 보니, 정작 찾아야할 너희 자신을 잃
어버린 것이니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아버지의 집(영)이 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함께 되어져 있음으로 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삶 자체, 우리들의 존재 자체, 우리들의 모습 자체가 바로 하나님
의 축복입니다. 가장 위대한 기적이고, 가장 위대한 축복입니다. 신묘막측하게 빚어서 탄생시
킨 기가막힌 예술품입니다.
그러니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감사요 그저 노래할 뿐입니다.
그런데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뜨거운 용광로속에 집어넣어 알맞게 구워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묘막측하게 지으신 것은 하나님이지만, 뜨거운 용광로속에서 자기
자신을 불태우고 구워지게 하는 것은 본인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뜨거운 용광로속에서 진정한 우리의 삶의 운명(질적 측면)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비유의 결론을 내립니다.
가장 먼저 우선하여 '잃어버린 나'를 찾으라, 그러면 찾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알
게 될 것이다. 찾으려 하기 이전에 이미 찾아져 있는 상태로 되어져 있는 '진정한 나' '참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기쁨이 넘칠 것이다. 그러니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지어다. 그것이 인생의 너무도 마땅한 본분이니라.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1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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