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 중에는 노예생활에 시달리던 조상을 생각하면서 원수를 갚아줄 인물이 나타나기를 은근히 바라는 자들도 있었다. 이런 시기에 다윗이 등장하게 된다.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다.’
참으로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출생과 시대상황을 결부시키면서 마치 신의 계시를 받은 양 둘러대는 표현이 놀랍기까지 했던 것이다.
다윗은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인물인데다 글재주가 뛰어나 자신의 생각을 그럴싸하게 표현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영토 확장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주변국들과 싸움을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야훼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전장에 나설 때마다 ‘야훼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야훼께서 계신 줄 알게 하리다.’ 이처럼 큰소리치며 승전을 거듭하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야훼가 전쟁을 좋아하는 신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다윗의 존재에 대해서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던 대제사장 가야바(A.D18~37)를 비롯해서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던 사제들은 다윗이야말로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면서 죽음의 자리로 사람을 몰고 간 세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더구나 왕권을 장악하자마자 궁궐부터 세운 다음에서야 ‘나는 백향목 궁궐에 거하거늘 법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이런 소리를 하면서 자신의 궁궐 뒤편에 성전을 세우려 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당신은 피를 많이 흘린 사람이니 성전을 짓지 못한다.’
당시 장막과 번제단은 기브온 산당에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 다윗은 자신의 아들 솔로몬을 내세우면서 ‘내 아들 솔로몬이 홀로 야훼의 택하신바 되었으나 오히려 어리고 연약하고 이 역사는 크도다. 이 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야훼를 위한 것이라 내가 힘을 다하여 예비하겠노라.’ 그리고는 대제사장 사독으로 하여금 자신을 지지토록 압력을 가했으며, 이방인들을 불러들여 성전건축에 필요한 돌을 다듬게 하고, 문짝 못과 거멀못에 쓸 철을 준비하고, 두로와 시돈에서 백향목을 해상으로 실어 날랐다.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도 솔로몬에게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내가 환난 중에 야훼의 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일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중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예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예비하였으나 너는 더할 것이며 또 공장이 네게 많이 있나니 곧 석수와 목수와 온갖 일에 익숙한 모든 사람이니라. 금과 은과 놋과 철이 무수하니 너는 일어나 일하라.’
마침내 다윗의 계획대로 성전은 준공(BC938)을 보았다. 20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된 다음이었다. 이처럼 오랜 세월 징용을 당하거나 궁궐과 성전 건축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과중한 세금과 노역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에 대다수 유대인들은 다윗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성전을 가리켜 -다윗의 예배당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유목생활에 익숙한 터라 장소제약을 받아야 하는 성전을 기피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 후,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BC605) 유대인들은 포로 신세가 되고, 예루살렘은 망가지고, 성전은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BC587).
그 후, 페르시아 왕에 의하여 스룹바벨이 유대총독 지위에 오르면서(BC515) 다시 성전이 세워졌으나 규모가 작고 보잘 것이 없었다. 그런 다음에도 갖가지 사건에 휘말리면서 존폐의 위기를 맞다가 헤롯의 시대에 들어와서야 제대로 된 성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으리으리한 성전 건물에 대한 신뢰보다는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번제단에서의 의식을 더 중요시 했다. 따라서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성전에서의 당직을 서기보다는 타미드 번제물 팀에 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길을 가다가도 의식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리기라도 할라치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아무데서나 기도를 해댔다.
인심의 향방이 이와 같으니 사제들 중에는 성전을 버리고 광야의 수도원으로 찾아드는 자가 속출했으며, 성전을 향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떠벌리는 자들이 이상하게 여겨지질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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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번제단에서의 행사가 원만히 지속된 것도 아니었다. 디아스포라들에 의하여 저질러진 오욕의 세월을 말끔히 지워버리지 않는 한 그 어디에도 유대인들의 자긍심을 심어줄만한 구석은 남아 있지 않았다.
번제단에서 돼지가 제물로 쓰일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이집트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밑에 있다가 시리아의 셀루커스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된 시점(BC198)에서 유대교의 보수파와 헬라파는 갈라서게 되었다. 당시 야손이 시리아 왕에게 돈을 주고 대제사장 직을 살 생각을 했으며, 뒤이어 메넬라우스가 더 많은 돈을 주고 대제사장 직을 가로챘던 것이다. 사독가문의 후손 오니아스3세가 이집트로 도망을 간 연후가 이 때문이었다.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4세는 이집트 세력을 유대 전역에서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으며, 여세를 몰아 알렉산드리아를 침공할 생각까지 했다. 다행이 로마에서 포필리우스 래나스를 보내 설득했기 때문에 전쟁은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
유대에서는 야손이 대제사장 직을 되찾을 욕심에 메넬라우스를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다시 차지했으나 이집트 원정을 포기하고 돌아가던 사령관이 안티오쿠스4세의 명령에 따르지 않던 야손과 보수 세력을 잡아 가면서 유대교의 종교행위를 금지시켰던 것이다(BC165).
안식일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았다. 사내아이가 태어나도 할례를 시술하지 못했다. 경전을 소지하거나 읽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이처럼 성전의 기존세력이 수난을 당하자 헬라파 유대인들이 성전을 차지하면서 예루살렘을 올림피안 제우스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며 천신을 섬기는 신전으로 바꾸어버렸던 것이다.
이후, 양이나 염소 대신 돼지를 제물로 쓰이는 의식이 행해졌으며, 가정에서도 향을 피우는 작은 항아리를 대문에 매달거나 거리에서는 디오니소스 축제가 열리곤 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세간에서는 다니엘(~BC597)의 이름을 빌려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이 예언 되기라도 한 것처럼 써진 글이 나돌기 시작했으며, 그 글 속에는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에 대한 이야기, 세상종말이 바싹 다가왔다는 암시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오욕의 세월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시리아에서 내분이 발생하면서 셀루커스 왕조가 퇴조를 보이고, 요한 히루카누스가 헬라파를 물리치면서 예루살렘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3년 5개월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뿌려진 말세론과 성전에 대한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으며 그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재앙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이 등장하면서 세상 종말이 바짝 다가왔다는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은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다’라는 허망한 말이 나돌기 시작했으며 유대 사회는 종말론 사상을 기정사실화 하는 가운데 ‘주여! 어느 때 이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하는 질문 따위가 하나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호전적 무리들에 의하여 야훼에 대한 신격은 힘과 불가분의 관계인 것처럼 선전되기 시작했으며, 이런 맥락에서 필로(B.C10~A.D45)와 같은 자는 칼리굴라 황제를 겨냥해 ‘근심할 것 없네. 야훼를 자기 적으로 삼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하는 따위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래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 애급과 같은 강대국의 통치는 자기 백성에게 징벌의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며, 백성의 회개를 요구하는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에 범죄가 보상되고, 완전히 율법의 길로 돌아서면 기근이 사라지는 것처럼 강대국의 통치도 종식된다는 비폭력 신앙이 전부였다. 그런데 다윗에 의하여 야훼가 전쟁을 좋아한다고 알려지면서 엉뚱하게도 자신들을 대신해서 싸워주는 세속적 후원자로 상상하게 된 것이다.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하여 지성소가 유린당한 사건(BC63) 또한 충격적이었다. 사건이후, 속죄일을 정하고 금식과 정결의식을 요란스럽게 치르고 있으나 이것으로 성역에 대한 경외심을 회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바리새인들이 회당을 세우고 별도의 모임을 가지는 바람에 회당과 성전 중 어디를 갈까 고민하는 자들이 늘어나면서 성전에 대한 기대 심리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시리아 총독 루키우스 비텔리우스가 대제사장 예복을 돌려준 일(A.D36)에 대해서도 무척이나 회의적이었다. 그동안 성전 쪽 사제들이 감쪽같이 속이는 바람에 별다른 말썽은 없었으나 언제 또다시 대제사장 예복을 빼앗기는 일이 발생할지 몰라 전전긍긍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강압에 의하여 그리되었을 것이라 지레짐작한 모양이었다.
가야바를 통해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아그립바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탄식, 탄식입니다.”
가야바는 이런 말도 했다. 망가트리려는 자들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불행한 사태를 예감하고 바로잡아 보려는 의도에서 나선 젊은이(예수)를 죽게 내버려둔 저들이, 이제 와서 무엇이라 하는지 아세요? 성전에서의 번제의식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순결한 사람을 단번에 드렸으니 그렇다고 하더군요.”
참으로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들의 선생을 죽음의 자리에 내준 베드로와 그의 무리가 무슨 꿍꿍이속으로 그와 같은 짓을 하게 되었는지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가야바의 견해에 따르자면 성전이나 대제사장에 대한 기대 심리가 무너지면서 시대정신은 광기로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들은 젊은이를 가리켜 다윗계의 구원자이며 용맹함과 정의, 신성함 등의 재능을 겸비한 인물로 선전하기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가야바는 계속해서 힘의 논리로 세상을 어찌해볼 수 있다는 가상 시나리오가 만들어진 다음이고 보니, 메시아꾼들을 막을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소설 ‘유대 왕 아그립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