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10월, ‘예루살렘 이야기’ 제1권 총독 빌라도 파일을 보내고 출간 직전에 출판사를 방문했다. 그 때 편집 담당 직원이 원고를 보여주면서 이런 말을 했다.
“다빈치 코드에 버금가는 내용입니다.”
나는 <다빈치코드>를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무슨 소린가 싶었으나 내용이 괜찮다는 뜻에서 그런 말을 했거니 생각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뉴스 미디어를 통해 <다빈치코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서, 역사적 진실에 한 발 다가서겠다는 일념에서 시작한 나의 글 쓰기작업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다.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허구적 스릴러물일 뿐, 누구를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5월 19일, 세계적으로 동시개봉 예정인 이 영화를 들여와 상영하려는 소니픽처스릴리징코리아 쪽에서 이처럼 해명한 바 있으나, 개신교 최대의 연합기구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련) 관계자들은 영화 배급사를 항의 방문하면서 수입 상영 철회를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3월 29일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제출했고, 영화 안 보기 운동을 벌이는 한 편, 영화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소책자도 배포 중이란다. 아마도, 그 책자에는 다음과 같은 유사한 글이 담겨 있으리라.
‘실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화 상영 반대를 하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 이들이 영화를 봤을 때 복음전파에 치명적인 장애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문구라면 교인 확보를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는 개척교회의 사정을 감안할 때 동정이 가는 대목이다. 그런데 ‘사탄이 문화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한다. 마귀는 언제나 광명의 천사로 가장했기 때문이다.’라는 요지의 글이 어느 교단의 기관지에 실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한 소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먼저 최후의 만찬 그림부터 생각해 보자. 예수가 죽기 이전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가졌을 것이라는 상상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를 읽어 보면 누구나 가능하다.
그래서 밀라노의 수도원 케벤션룸의 식당 벽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림이 그려지게 되었고, 피렌체의 산타 아폴로니아 성당에도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작품이 걸리게 되었으며, 피렌체의 또 다른 곳 온니산티 성당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그림도 있다.
그런데 최후의 만찬하면 유독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물들의 배치와 성격 묘사가 뛰어나기도 하려니와 그 속에 담긴 의문의 코드 때문이리라.
기독교인이 아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당시 어려운 처지에 있던 그가 경제적 후견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처지라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에 조예가 깊을뿐더러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를 좋아하는 취향을 지닌 사람답게 으레 종교적 인물 뒤에 있어야 할 후광을 무시하면서 예수를 일반인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려놓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예수와 유다의 모델을 동일 인물로 삼아 세인을 놀라게 했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력을 부추기기에 충분한 코드를 여러 곳에 숨겨놓았다.
이번에는 소설 <다빈치코드> 이야기를 해보자. 저자 히비에르 시에라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이 기독교적 내용을 담아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비기독교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
더구나 소설을 구상함에 있어서 갈등 구조가 불가피 했기 때문에 그는 당시 기독교 세계를 관장하고 있는 로마 교황청 기준에서의 이단이 출몰하기도 했는데, 카타르 파를 등장시켜 갈등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어느 네티즌의 독후감을 여기 소개한다. ‘아고레로라 스스로를 칭하며 레이레 신부의 뒤편에서 사건의 수수께끼 한 면을 틀어쥐고 있는 비밀스러운 인물이 있는가 하면, 상징적 학문에 통달해 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막달레 마리아의 유구한 혈통을 이어받아 그림의 비밀에 한발 더 접근할 수 있게 되는 엘레나, 아고레로의 독촉으로 산타 델라그라치에 성당으로 파견 나온 베다니아 정보부 소속의 레이레 신부 등. 이 소설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은 1945년 이집트에서 우연찮게 발견된 나그함마디 복음서들일 것이다. 필립보, 마리아 막달레나, 토마스 복음서 등, 중세의 이단 논쟁에서 묻혀 버렸던 그노시스파 계열의 귀중한 복음서들이 발굴된 것이다. 이러한 그노시스파 복음서들에서 발견되는 정통 교리와 달리하는 사상 및 비밀적인 전수를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이 소설의 전체적인 줄거리라고 할 수 있다.’
<다빈치코드>의 저자 히비에르 시에라는 이처럼 인류가 선험하고 있는 진리와 본질을 추구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소설을 완성 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을 자기들의 교리에 위배된다 하여, ‘사탄이 문화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는 행위’로 단죄한다면 이 또한 중세의 마녀사냥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미국 소설가 댄 브라운 씨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것이 영화 <다빈치코드>라 했다. 사실과 허구를 섞어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죽지 않고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한 다음, 프랑스에 가서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가 됐다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부활사상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신성을 의심케 했으니 한기련이 앞장서서 반대할 만한 내용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예수와 부활론과 신성이 별개의 문제였다고 한다면 어찌하겠는가?
예수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부활론자들은 있었다. 더구나 로마에서는 황제를 신격화하려는 풍조가 만연했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누군가가, 또는 몇몇이 모여 세 개를 하나로 만드는 작업을 시도할 수도 있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주문자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의문의 코드가 생긴 것처럼 복음서 저자들과 행위자 예수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난해한 구절이 복음서 구석구석에 숨겨지면서 기독교는 교파와 이단의 시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경우는 의도적인데 비하여, 사복음서 저자들은 자신들의 기록을 믿게 하려는 과장된 표현이 오히려 의심을 부추겼으며, 예수의 특별한 언행으로 말미암아 생긴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한기련은 히비에르 시에라의 소설 ‘다빈치코드’와 댄 브라운의 소설을 논쟁거리로 삼지 않았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자면 진리가 아닌 것은 생명이 짧고, 진리는 영원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니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하면서도 유독 영화 <다빈치코드>를 법정으로까지 몰고 가려는 의도는 영화의 특성상 파급 효과가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이제부터는 ‘예루살렘 이야기’를 해보자.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가졌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기정사실화 되었으니 접어두기로 하고, 예수는 각본(예정)에 따라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제사장 지위에 있던 가야바와 그의 장인 안나스 사이에서 의미심장한 말이 오고갔다.
“온 세상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대신해서 죽는다 생각하게.”
두 사람 중 누군가가 예수 죽이기를 거부하면서 나온 말이 분명하다.
이처럼 거절당하자 고발 자들은 총독 빌라도를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총독 빌라도마저도 거짓증언을 간파하고 안티바에게 사건을 넘겨버린다.
안티바 또한 그럴싸한 핑계를 대면서 그들을 물리친다.
“허허, 그것참, 지금도 유대 땅에 왕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도 않는 왕을 사칭했다면 그것은 티베리우스 황제를 능멸하는 것일세. 로마에 가서 알아보게.”
아마도 이런 말을 했으리라. 그러자 예수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던 무리들은 옳다구나 생각하면서 다시 총독 빌라도를 찾아가서 ‘이 사람에게 죄를 주지 않으면 당신은 티베리우스 황제의 충신이 아니다.’는 식으로 나왔기 때문에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게 된 것이다.
이처럼 범법 행위가 확실치 않고, 고발의 사유마저 불투명한 가운데 그 당시 여러 통치자들이 피하는 바람에 적어도 4번 이상이나 법정을 오가는 기이한 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사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다 이루었다’는 말을 한 것처럼 결론을 내렸다. 이 또한 의문의 코드에 속한 것이기도 하려니와 어린 양을 죽여 자신의 죄를 대신 사함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이고 보면 그들 특유의 정서에 따라 다 이룬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처럼 모든 정황을 두루 살펴보는 가운데 다시 복음서를 읽어 본다면 소설 ‘다빈치코드’ 이상의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 이야기’ 속에 다음과 같은 내용 글이 담겨 있다.
‘빌라도 총독에 의하여 사형판결을 받은 갈릴리 출신 젊은이 사건은 유기체가 태동하기 위한 초기단계의 진통에서 비롯되었다. 이미 다윗에 의하여 힘의 논리로 세상을 어찌해볼 수 있다는 가상 시나리오가 만들어진 다음이고 보니, 메시아꾼들은 자신들에게 걸맞은 상징적 인물이 필요하던 차, 때마침 젊은이는 세인의 주목을 받는 입장이라 유명세를 치르게 된 것이다. 더구나 로마인들이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가를 선전하려는 자들에 의하여 젊은이는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었으며, 생명의 소중함을 깨우친 사람은 누구나 긍정적 삶을 살기 마련이고, 이들의 꽃에 해당하는 사랑 이야기마저도 저들에게는 신의 선물인양 비처지면서 젊은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는 당시 유대 사회에 만연하던 잘못된 시대정신의 상징물에 불과하다. 젊은이는 이처럼 잘못된 시대정신을 조장하는 세력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는 비난을 퍼붓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예수사건은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 사건이야말로 인류가 시대정신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는 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려니와 역사적 진실에 한 발 다가서는 방법이기도 하다.
시대정신은 바람과 같은 것이다. 없는 것 같다가 갑자기 나타나 재앙을 안겨주는 토네이도나 태풍보다 더 무서운 괴력을 지니고 있다.
이천 여 년 전, 예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