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이야기

교파 하나 만들었우?5

04-03-22 김춘봉 1,086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궁리하던 중에 어느 목사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친절하게도 그분은 성경을 권했고, 저는 그 책자를 통해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부활, 구원, 최후의 심판, 따위의 온갖 용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후, 의혹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예수사건과 서기 70년 유월절 예루살렘 전투는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랍니다. 더구나 유대와 로마 전쟁이 인류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 참상이었다고 한다면, 당시 사람들 중에는 불행한 사태를 예감하고 해법을 제시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찮은 미물에게도 천재지변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당시 유대는 온통 대립의 형세였습니다.
왕권을 유지하려는 헤롯 일가와 여기에 도전하는 에제키아의 후손들. 성전 권위를 내세우며 기득권을 행세하려는 사제계급과 메시아가 나타나면 헤롯의 성전마저도 깡그리 무너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것이라고 선전하는 광야의 수도원 사람들. 그리고 이 두 세력 사이에서 또 다른 기회를 노리고 있는 회당소속의 바리새인 랍비들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광야의 수도원 사람들은 하늘에서 메시아가 나타나는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식의 선전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지한 사람들은 맹신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호전적 무리들은 이처럼 맹신에 빠져든 사람들을 이용하여 로마와 일전을 벌릴 생각을 하게 되면서 순교자적 신앙이 부추겨지기도 했습니다.

이에 반해서, 지각 있는 사람들은 메시아신앙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화평의 도리를 가르치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들에 의하여 인두세 거부를 선동하면서 민심을 반로마쪽으로 몰고 가려는 세력들을 향해 가이샤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자는 식의 발언이 터져 나왔고, 성전 파괴를 선동하는 무리들에게 성전은 야훼께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로써 면박을 주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야훼를 향해 ‘아버지 하느님’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인식시켜주려는 뜻에서 그리 하였을 것입니다.

어느 선교사가 마하트마 간디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는 사랑하지만 기독교는 싫어합니다.”
제자들의 예수론은 스승에 대한 자기들의 배신과 후해, 굴욕에서 생겨났다고 어느 학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루돌프 볼트만과 같은 사람은 신약성서 속에서 예수의 언행을 여과시켜 보려는 시도를 했다고 합니다.
야마모또 시찌헤이 말에 따르면,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전을 쓴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란 것을 논증하고, 나아가 선교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전해진 예수상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 또한 공감하는 가운데 그 당시의 사회상을 면밀히 살펴보게 된 것이랍니다.
이런 저에게 엉뚱한 제안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김형, 사업 하나 합시다.”
“사업이라니요?”
“내가 사람을 불러 모을 테니 김형 특유의 이야기를 하세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더군요.
사이비 종단이라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였습니다.

얼마가 지나서 또 다시 황당한 일을 당했습니다.
노상에서 어느 분을 만나 인사를 건넸습니다.
“안녕하세요?”
그는 단번에 저를 알아보고는 이런 말을 하더군요.
“교파 하나 만들었우?”
공연히 인사를 청했다 싶어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 회중 사람이었고, 장시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때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본 모양이었습니다.

재건축 아파트가 조성된 다음 입주하던 날, 단지 주변의 여러 교회에서 현수막까지 내걸고 무료로 음료수와 커피를 나누어주더군요.
경쟁이나 하듯 입주자들에게 접근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교인 확보를 위해 애를 쓴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왜들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았으면 그때부터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면 더 이상의 교리나 설교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혹자는 신약성경을 읽고 있노라면 세계의 종말이 바짝 다가와 있다는 느낌, 최후의 심판이 다가오는 중이라는 느낌, 현존하는 온갖 물질적인 것들은 얼마 안 있어 파멸된다는 느낌 따위를 인식하게 된다고 하더군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서기 50년대부터 바울은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 고린도전후서, 로마서, 야고보서를 썼습니다.
64년에 가서는 마가복음서, 빌레몬서, 골로새서, 에베소서, 누가복음, 마태복음, 히브리서, 유다서, 사도행전, 빌립보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베드로전후서가 나왔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멸망 직전에 나온 글들이고 보면, 종말론적 냄새가 풍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80년대에 등장한 요한복음이나 요한계시록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바울이라고 하는 나방의 깃털에 묻어 오늘에 이른 예수님의 생명사상을 새롭게 인식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무섭게 달라지는 자연환경의 황폐화,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한 지금의 사회상을 돌이켜 볼 때, 서기 30년대 예루살렘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처구니없게도, 환상을 보는 가운데 십계명 중 어느 하나가 특히 강조되면서 세상종말의 시기를 예언한 외국의 어느 여인이 있었답니다.
그녀는 신도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가 망신만 당하고 내려왔습니다.
그 후에도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를 통해 세상종말의 시기를 알아보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롭게 인식할 때가 아닌 가 싶습니다.
  • 04-03-23 바람
    저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강하게 부정하여 본적이 있습니다. 모두가 거짓말, 혹은 꾸며낸 말 수도 있다고 말이죠. 그래서 성경을 불태워 없애버릴 려고 했었던 적고 있고... 등등, 그러다가 성경의 말씀이 진정으로 진리의 말씀인지, 아닌지는 내 자신이 직접 말씀을 통하여 실험을 해 보는 수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성경말씀을 읽다가 잘 이해가 안되거나,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게 되면, 무조건 그 말씀에다가 저를 대입하여 놓고서는 그대로 저 자신이 그러한 행동을 해보려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가 예수를 저주하기까지 3번부인한 장면이 나오면, 저도 그 자리에 있다고 보고 저도 진심으로 그렇게 한번 부인해 보는 것입니다.
    가롯유다가 목매달이 죽은 장면이 나오면, 저도 그와같은 후회를 하면서 목매달이 같이 죽어보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제 임의대로 가감하지 아니하고 말씀에 나온 대로 제 자신을 실험해 보는 것이지요. 물론 그러한 과정속에서는 다소의 두려움도 있게되지만, 실험해 본 만치 사실이 사실대로 와 닿는 기쁨은 그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였습니다. 신약이 개발될려면 무수한 흰쥐들이 실험대상이 되어 죽게 됩니다. 무수한 흰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신약이 탄생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내 자신을 말씀이라고 하는 약재료에 던져 넣어 스스로를 실험해 낼 때, 말씀의 진위성여부가 내 자신속에서 스스로 판명이 되어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아직도 시간이 나면 가끔씩 제 자신을 실험해 보고는 합니다. 그러면 어김이 없이 뭔가가 반드시 있게 됩니다. 그러니 때로 그러한 기쁨속에서 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은 기독교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지요. 그런데 기독교만의 성경으로 읽게되면 오히려 성경이 이상하게 왜곡이 되어진다고 보지요.
    오직 다 내 애기로 보여질 때, 바르게 성경이 읽혀진다고 봅니다.
    그리고 김춘봉님의 글 고맙게 잘 읽어보았습니다. 항상 평안하시기를...
  • 04-03-23 마음
    예수 숭배해서 어쩌자는 건지, 하나님 숭배해서 어쩌자는 건지 그저 나와 다름이 인정하고 사랑으로 사람이 삶을 사는것이 참 기독교고 신앙이 아닌가 합니다. 기독교가 자꾸만 숭배하는 맹신으로 가는것이 한국기독교의 문제점이 아닌가 조심스레 지적도 합니다. 하지만 모태신앙인 아내를 보면서 하나님의 저절로 찾아오는 은혜는 우주의 수많은 별들만큼이나 다양하다는 것을 알겠더라구요. 단지 그들이 자기에게 오는 은혜에 자꾸만 국한시키고 그것을 교리와 연관시키는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말 사는것이 내가 아니더라구요. 자꾸만 가슴에서 '쏘~옥'하고 올라오는 뭔가가 있습니다. 이것을 성령하나님, 또는 참나 라고 부르지 않나 싶고요. 이것 또한 사람마다마다 조금씩 틀리게 찾아오나 봅니다.

    저는 성경을 무척이나 경멸했기까지 했는데요, 지금은 희한하게도 성경말씀이 살아있다는것이 느껴집니다. 뿐만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사랑이라는 것으로 모든것이 나의 가슴에 찾아와지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지요. 어쨌든 불경을 봐도 도덕경을 봐도 천부경을 봐도 매한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얘기로 가슴에 쏙쏙 들어옵니다.
  • 04-03-23 원정
    김춘봉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예수님은 사랑하지만, 기독교 조직은 별로 재미 없습니다.
    그리고 저도 바람님 말씀처럼 기독교와 성경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마음님처럼 어떤 경전을 읽어도 매한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얘기로 가슴에 쏙쏙 들어옵니다.

    모든 분들이 고맙고 고맙습니다.
  • 07-03-02 손호석
    예수를 사랑하신다면 , 기독교 조직을 측은히 생각하여 바로잡을 생각을 하심이...

    지금의 기독교는 원래 예수가 원했던 조직이 아닌 권력과 자본주의의 산물이지 않습니까.

    저 또한 성경이나. 예수의 본질에 대해 비판적인 과거가 있었지만.
    모두 그것은 저의 머리속 생각일뿐 .. 지금은 '오직 모를뿐'의 초심으로 갑니다.


    신성과 인성의 조화냐.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문제나, 유대교와 카톨릭, 개신교 의 문제는 인간의 손에서 벗어난 문제라는 걸 요즘 어렴풋이 느낌니다.
  • 07-03-02 원정
    손호석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오직 모를뿐'
    진심으로 공감합니다.

    전 신성과 인성이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제외한 신이 별도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신약의 가슴의 크기와 구약의 가슴의 크기는 다른 것 같습니다.
    구약이 유대인을 바라보았다면 신약은 세계인을 바라본 것 같습니다.

    유대교와 개신교 카톨릭의 문제는 돈문제 욕망의 문제로 보입니다.
    즉 인간의 손에서 벗어난 문제라기 보다는 인간의 욕망들이 만들어 내는 현상으로 보입니다.
  • 04-04-24 바람 온유함의 승함2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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