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서기 40년대 예루살렘 이야기)
1장, 귀국
2장, 왕과 총독
3장, 유피테르 신상
4장, 성전 수난사
5장, 황제의 죽음
6장, 유대통일
7장, 에필로그
헤롯의 손자 아그립바는 어린시절 로마에 유학을 가서 티베리우스 황제의 동생 드루수스 부인 안토니아아 집에서 살고 있었다. 고아가 된 칼리굴라가 할머니 안토니아를 찾아오면서 두 사람은 만나게 된다. 당시 아그립바는 29세였고, 칼리굴라는 17세였다.
노환으로 티베리우스가 죽고, 칼리굴라가 새 황제 지위에 오른다(A.D37). 그동안 유대에 돌아가 왕 되기를 청했으나 ‘유능하지만 책임감이 부족하다’ 는 이유로 티베리우스 황제는 거절했고, 칼리굴라는 왕 칭호를 내리면서 가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가서 있어야 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유대 북부지역 빌립의 땅이었다.
당시 예루살렘과 이두메, 사마리아 지역은 마르겔루스 총독이, 베레아와 갈릴리 지역은 안티바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북부지역은 빌립이 죽고(A.D34) 공석 중이었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예루살렘에 눌러 앉아 왕 행세를 하려다가 마르겔루스 총독으로부터 한 소리 듣는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예루살렘에 버티고 있으면 싸우려는 자들이 몰려옵니다.”
그래도 아그립바는 율리아스로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조카가 왕 칭호를 받고 돌아오자 안티바도 왕 칭호를 받을 욕심에 칼리굴라 황제를 찾아 나섰다가 유배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A.D39년).
안토니아 집에서 속주 왕자들과 함께 있을 당시 로마황제는 무관인 반면, 동방의 왕들은 왕관을 쓰는 문제에 대해서 칼리굴라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내가 황제의 지위에 오르면, 왕관을 쓰기보다는 유피테르(쥬피터)신상에 내 얼굴을 새기게 할 것이요.’
그의 외모가 수려했기 때문에 농담 삼아 흘린 말이려니 생각했었는데 황제의 지위에 오르면서 자신과 닮은 흉상을 만들도록 지시를 내린다. 따라서 도시마다 유피테르 신상이 세워지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얌니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곳 그리스인들이 황제를 위한 의식을 치르는 가운데 유대인들이 몰려가 난동을 부린다.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집트의 디아스포라들이 보복성 공격을 받는 가운데 알렉산드리아의 회당에 유피테르 신상이 세워지고, 그곳 회당장 필로가 황제를 찾아 가 탄원을 했으나 오히려 미움만 산다.
“신을 미워한다는 게 바로 너희들이냐? 다른 민족은 나를 신으로 인정하는데, 너희들만이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는 그 누군가를 위해서 나를 신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냐?”
이처럼 무시를 당하자 필로는 밖에 나와서 중얼거린다.
“황제가 나쁜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이 확실하나 이는 야훼를 자기 적으로 삼은 것이나 마찬가지니 걱정할 것 없네. 우리 다 같이 용기를 내도록 합시다.”
그러나 아무리 속이 상하더라도 쉽게 내뱉을 말은 아니었다.
그 후, 칼리굴라 황제는 시리아총독 페트로니우스에게 예루살렘 성전에 유피테르 신상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유대는 온통 신상건립 반대운동에 휘말리면서 바울과 같은 이는 신상 자체를 ‘망하게 만드는 가증할 것’ 이라고 비난하면서 백성을 선동한다.
아그립바는 황제의 명령을 철회시킬 수 있다고 장단하고 로마로 달려갔으나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페트로니우스에게 한 통의 편지를 전한다.
‘아무래도 그대는 내 명령보다 유대인들의 선물을 좋아하는 것 같소. 총독으로써의 임무에 충실하기보다는 유대인들 호의를 선택했다면 황제에 대한 도전이요. 나는 명령에 불복종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명확하게 해둘 필요가 있소. 그대 스스로 인생의 결말을 짓기 바라오. 잘 가시오.’
페트로니우스는 항명을 결심하고, 아그립바와 모종의 밀약을 나눈 다음 로마로 돌아간다.
이집트 총독 플라쿠스가 신상을 세우기 위해 예루살렘에 도착했으나 칼리굴라 황제가 죽는 바람에 급히 돌아가다가 실종된다.
아그립바는 새 황제 글라우디우스부터 푸짐한 선물을 받는다. 헤롯 시절의 옛 토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칼기스와 아빌론 지역까지 하사받는다.
아그립바는 로마에 돌아가서 일등공신이 된 페트로니우스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명실상부 유대 왕이 된 아그립바가 대관식장에서 히브리어로 신명기 17장을 읽고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보에뚜스가문의 사제 시몬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저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두메 출신 헤롯의 손자입니다. 조금 전 저 사람은 이방인은 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
시몬은 아그립바가 읽은 대목 중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사제들 반대를 예상치 못했던 아그립바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난감해 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 회당장 가말리엘이 단상에 뛰어오르면서 위로한다.
“걱정하지 마시요 아그립바 ! 당신은 우리의 형제요.”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왕을 에워싸면서 소리 지른다.
“아무렴 우리의 형제이지. 우리의 형제이고말고.”
대관식 이후, 아그립바는 그동안 탐탁치 않게 여기던 바리새인들과 국정을 논할 수밖에 없는 난감한 처지에 몰리고 만다.
국법이 바뀌고, 건국의 날과 이스라엘이라는 연호가 선포되는 가운데 유대는 바리새인들 세상이 되고 만다.
유대통일의 과업을 이룬 아그립바는 바리새인들 세력에 밀려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한다.
반격에 나선 사두개파 사람들이 아그립바를 찾아가 충격적인 발언을 하는 바람에 갑자기 쓰러져 죽는다(A.D44년). 이로써 바리새인들 세상은 종말을 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