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이야기

아흔이 되어가는 작가1

25-04-25 김춘봉 26

자 - 이제 끝이 가까워졌네. 내 인생 마지막 장을 맞이하고 있어. 친구여 ~ 분명히 말할 게. 내가 확신하는 이야기들 말이야 -. 나는 충만한 삶을 살았고, 많은 것을 경험하며 돌아다녔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 방식대로 실천 했다는 거야. 후회 ~ 뭐 - 조금은 있었지. 그러나 굳이 언급할 정도는 아니야.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던 것뿐이고. 성실하게 끝까지 해냈지. 나는 내 인생의 진로를 계획했고, ​지름길 따라 신중히 계획했지만 -.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 내 방식대로 했다는 거야. 그래 - 뭐, 그런 적도 있었지. 아마 자네도 알 거야. 내가 욕심을 부렸을 때도 있었고. 그 모든 것이 의구심으로 가득 찼을 때도. 보란 듯이 ~ 압도하면서 이겨냈지. 나는,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 정말 내 방식대로 했지. 웃기도 하고 ~ 사랑도 하면서 ~ 울기도 했지. 실패도 실컷 맛봤지. 그런데 울음을 멈추고 보니 ~ 그 모든 게 우습다고 느껴졌어. 내가 그 일들을 다 겪었다고 생각해 보니 ….감히 ~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야. 내 방식대로 했어. 남자는 무엇 때문에 남자이고, 무엇을 가져야 진정한 남자인가?자기 주관이 없다면 쓸모없는 남자지. 무릎 꿇는 자들의 말이 아닌 -. 자신의 진심을 말할 수 있어야 하네. 내 지난날이 보여주듯 ~ 난 시련에 정면으로 맞섰고. 그것이 My Way - 진리 탐구였다네.  

왜, 사람들은 로마에 열광할까? 광명천지 문명 때문이었어. 도시 문명을 일으킨 로마인들은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면 추락할 수밖에 없는 위태로운 정점에 있었네. 인류 공존과 번영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야. 시대적 요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없었던 일이 돼 버리고. 도약의 발판은 벼랑 끝이 되면서 날개가 없는 물체는 추락한다네. 바로 그 때,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카이사르였어. 카이사르는 경쟁과 갈등, 양육강식의 논리를 종식 시키려고 했지. 오늘날 UN처럼 공존과 번영을 모색하면서 관용과 포용 정신을 이야기 했다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했던 한심한 원로원 의원들과 키케로가 작당을 하고, 카이사르 암살에만 혈안이 돼 있었네. 이처럼 시대적 요구가 충족되지 못하니까 카이사르 암살은 개인의 생사 문제로 끝나지 않았던 거야.문명시대 여명기 먹구름이었고, 재발의 여지가 있는 악성 종양이었어. 반문명적, 반인륜적 범죄가 급증할 것이라는 불행의 전조였고, 카이사르 암살 이후, 역사적 퇴행 여파가 유대 속주에까지 미치면서 서기30년 예수 사건으로 비화되었네.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나사렛 예수도 실물교훈과 <시대의 표적>을 말한 문명의 선각자였어. 예수 산상수훈은 시대적 요구에 적합한 발상 전환으로. 문명 시대 꽃을 활짝 피우자는 계몽주의 메시지였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생각의 씨앗이었지. 그러나 세정에 밝고 시대감각이 뛰어난 예수는 자신의 메시지가 시기상조임을 알고 천국에 숨겨놓았기 때문에, 부활한 메시아 미신을 유포하는 자들 수중에서도 손상되지 않고 고금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네.

여기까지는 내가 설정한 가설이고, 가설을 진리로 이해한 그녀가 말했어.

"당신 얘기는 일시적 언변으로 끝날 내용이 아닙니다. 글을 쓰세요."

서점을 다녀오는 길이라면서 ‘매디슨 카운티 다리’와 또 다른 책을 주면서 속삭이듯 말했지.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 오는 거요. 몇 번을 다시 살더라도, 다시는 오지 않을 거요."

프란체스카를 유혹하려고 킨케이트가 한 말이었어. 두 아이의 엄마이면서 다른 남자 아내였던 프란체스카는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벗어나 육신이 갈망하던 사랑을 불태우고 싶어 했네.남편과 아이들이 외지로 가고 없을 때, 중년사내 킨케이드가 나타나면서 프란체스카는 육신이 갈망하던 감정에 빠져들게 되었다네.

그 당시, ‘나는 로버트 킨케이드. 당신은 프란체스카!’ 하면서 글 쓸 생각은 하지 않고 대필 작가를 만났다가 그녀를 화나게 만들었지.

"우리는 더 이상 만날 이유가 없어졌네요."

그 후, 그녀로부터 선물 받은 또 다른 책, 『작가는 왜 쓰는 가』에서 마음에 위안을 찾았던 거야. "나에게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오. 하나는 열심히 일하면서 내 심장을 자극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지런히 글을 써서 영혼을 밝히는 것이라오.“ 나는 영혼을 밝히려고 글을 쓰기 시작 하면서 몇 가지 가설과 의문을 갖게 되었다네.제2차 세계대전 종식과 함께 약소국가는 그들 나름의 민족단합과 민족분열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지. 왜, 사람들은 로마에 열광할까? 광명천지 문명 때문이었어. 도시 문명을 일으킨 로마인들은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면 추락할 수밖에 없는 위태로운 정점에 있었다네.인류 공존과 번영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야. 시대적 요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없었던 일이 돼 버리고 도약의 발판은 벼랑 끝이 되면서 날개가 없는 물체는 추락한다네.바로 그 때,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카이사르였고, 카이사르는 경쟁과 갈등, 양육강식의 논리를 종식 시키려고 했지.카이사르 암살 이후, 로마는 역사적 퇴행 수순을 밟게 되었고 민족 단합과 분열의 갈림길에 오른 한반도에서는 1950년 육이오 전쟁으로 시험대에 올랐던 거야.   1941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생한 필자는 기와를 얹은 요릿집에서 자색과 가무가 능한 기생을 십여 명 둔 조부모 사랑을 받고 자랐지.그런데 조부모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있었네. 큰아들은 사업차 일본에 가 있었고, 작은 아들은 수풍발전소에 근무했기 때문에 별 탈이 없었는데 딸들이 문제였어. 대한임시정부 소속 광복군 지대장에게 시집간 큰딸은 일본군 감시의 대상이었고, 작은딸은 김일성 예하부대 김정숙 여성빨치산 대원이었다네.요릿집으로 풍족하게 살았던 조부모는 해방이 되면서 친일파로 몰려 재산을 강탈당하고, 방화로 가옥마저 잃고 울화병으로 연이어 운명하셨지.광복군지대장이었던 고모부 유품을 가지고 남하한 큰딸은 대전 현충원 장군 묘역에 합장하셨고, 수풍발전소에 근무 중이던 필자의 부친은 1947년 1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여성동맹 간부로 활동 중이던 작은 고모가 외무성 최고 관리와 평양철도호텔에서 결혼을 한 다음, 부친은 평양시 형제산구역에 있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 건설 및 관리 책임자로 근무하게 되었다네. 그때 외국 영화 필름 중에서 가위질 당한 것을 부친이 갖다 주곤 했지.

1950년 6.25남침으로 한반도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지만 - 미국과 UN군 참전으로 역전되면서 10월12일 김일성이 평양을 포기하던 야심한 시각, 비상 라이트를 켠 트럭 한 대가 영화촬영소 관사에 도착하고, 트럭에서 내린 고모가 중국 단동으로 함께 가자고 했지."내래 안 가갔어" "안 가갔으면 우리 집에 가 주시라요." "기케 하마"

평양은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북서쪽은 본평양 동남쪽은 동평양이고 평양시청 광장 바로 옆 고무 집은 일본 고위 관리가 살던 2층 양옥이었어. 상수도 시설도 갖추고 있었지. 수도꼭지를 보던 부친이 갑자기 "바로 이거야!" 소리를 질렀다네.부친은 평양시청으로 달려갔네. 그날 오후, 은행 돈을 소달구지 3개에 싣고 부친이 모두 집으로 가져왔다네.그 당시 평양 위수사령관이었던 ‘프랭크 밀본’ 소장을 만나려고 시청에 갔을 때, MP가 가로막더래. 때마침 통역관이 지나가다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폭파된 수도다리 복구 문제를 상의하려고 왔다니까, 소장을 만나게 해주었던 거야.밀본 소장은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승낙을 했고, 폐쇄령을 내린 조선중앙은행 돈을 가져가서 공사를 하라면서 어깨를 두드려주기까 했다는 말을 들었어.그 당시 경향신문 특파원이 쓴 1950년 18일과 19일 평양 이모저모 기사를 도서관에서 찾아냈네.‘국군이 평양에 진주하자마자 인프라 복구에 힘써 수돗물이 11월 10일부터 나오기 시작했으며 전기도 20일부터 공급된다고 함. 평양 시내를 지나는 전차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운행을 하지 못함. 화폐는 임시적으로 북한 돈과 남한 돈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지만 평양시민들은 남한 돈을 더 환영하며 조선중앙은행은 11월 20일 현재도 개업하지 않았음’

부친이 모란봉 능라도 수도교 복구공사를 할 당시, 대동강 부교를 건설한 미제453건설 공병단과 업무상 인연이 쌓여 친밀한 관계였어.중공군 참전으로 UN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46일이 되던 12월4일 후퇴하면서 부친과 한강철교복구 때 만나자는 약속을 한 일이 있었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면서 나는 노량진 본동 초등학교 4학년을 다닐 때, 재일유학생 학도병을 모집하고 맥아더 사령관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숙부를 남대문 시장에서 부친이 먼저 알아보고 극적으로 만났지. 그 당시 숙부는 용산 육군본부에서 근무 중이었고, 여동생이 북조선 고위 관료라는 말을 듣고, 혈육 간에 싸워야 하는 현실을 한탄하다가 몸에 지니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하는 극단적이 선택을 했으며 그 후 부친도 심신이 허약한 모습을 보이다가 사망에 이르고 말았다네.

가족 생계를 책임지게 된 필자는 공사장을 전전하다가 춘천 의암댐 공사장으로 갔을 때가 1961년 박정희 5.16군사 정변이 있기 얼마 전이었어.중앙일보에 연재 된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에 보면, 김종필은 석정선 권유로 역술인 백운학을 찾아갔다고 했는데 … 그는 5.16거사를 목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비장한 각오와 남다른 느낌을 풍기는 인상을 감출 수 없었다고 봐야 한다네.필자가 역술인 백운학을 찾아 간 것도 그 무렵이였지. 그 당시 필자는 21세였고, 까닭 없이 아무나 붙들고 울고 싶을 절박한 심정이었어."예비무당은 내림굿하기 직전 앓아 눕는다." 했는데 필자 모습이 그 짝이었어. 평소에도 낯 찌푸리지 말라는 소리를 많이들은 터라, 백운학이 필자를 보면서 "세상 걱정 근심 혼자 맡은 사람 같구나. 얼굴을 펴라" 했네. 첫 인상이 이런 식이라서 다음 말은 들어보나 마나였어.부모덕을 받지 못한다. 결혼을 해도 불화가 잦을 거라면서 박복한 사람이라는 말만 들었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마지막으로 필자가 물었지. "희망이 없다는 말씀이군요?" 비감어린 말에 생각이 바뀌었는지,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을 한 다음 생년월일을 물었네. 태어난 연, 월, 일, 시, 네 간지를 필자가 보는 앞에서 적고, 그것을 보면서 백운학이 말했어.

"70이 넘어서부터 뭔가 보여"

"무엇이 보입니까?"

"출판 쪽이야."

"출판 쪽이라니요? 제가 출판사 사장이라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하면서 관심을 보이니까

"그건 나도 몰라. 그 때 가서 보면 알게 되겠지."

2015년 중앙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한 김종필 소이부답 중에서 필자의 관심사는 김종필이 역술인 백운학을 언제 찾아 갔느냐? 였어. 1961년 4월 말이었다고 하니까 5.16거사 15일 전쯤이고, 병력 투입 부대 선정에 고심하던 때였다고 봐야 한다네.박정희 주도의 군사 혁명은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하던 국민적 염원을 규합,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계기가 되었고, 그 다음에는 국민적 염원이 민주화를 열망하는 쪽으로 발전했는데 그와 같은 사실을 알 턱이 없었던 박정희는 유신 체제로 장기 집권을 생각하다가 집권 18년으로 종지부를 찍고 말았던 거야.그러나 백운학은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종필이 "그 다음에는?" 하고 물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하더군. 국민적 염원이 민주화를 열망하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당시 21세였던 필자에게는 ‘70부터 뭔가 보인다." 말을 했고. "뭐가 보입니까?" 필자가 물었을 때 출판 쪽이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했지만 그것은 급변하는 시대 상황을 따라 잡지 못한 의식의 한계였던 거였어.

그러니까 필자는 1961년 백운학을 찾아 갔었고, 백운학이 말한 70은 서기2011년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그 당시 필자는 청계천 중고서점가를 드나들면서 이 책, 저 책 사서 의문과 궁금증을 해소하려니까 자료 부족으로 창의적 발상에 진전이 없었고,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던 거야. 퍼스널컴퓨터는 서기2011년 경 만들어졌으니까 필자의 나이 70부터 인터넷 사용이 보편화 되면서 '역사물'을 소재로 글을 쓰는 작가에게 있어서, 인터넷 검색은 굽으로 땅을 치며 달리는 말 위에 오른 격이고 그 때부터 My Way -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했고, 내 방식대로 할 수 있게 된 거라네.   

  • 25-05-18 원정
    주인장인데 오늘에서야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인생은 드라마입니다.^^
    다시 들어도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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