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70년 유대 멸망 전초전
제1화 – 나사렛 예수 십자가 사건 (AD30)
제2화 – 9인의 총독 이야기 사도행전 (AD37~60)
제3화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AD66~70)
감사, 감사 ~ 십계명은 진짜 말도 안 되는 엉터리 리스트였어. 그래서 중첩된 내용을 줄이고 줄여서 - 말이 되는 리스트를 새로 만들어 보니까, “항상 정직하고, 너희 배우자에게 충실 하라! 살인하지 않도록 엄청 노력하라!”이것만 있으면 되니까, '모세'가 자기 주머니에 넣고 산을 내려올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꼭 필요한 거 - 하나만 추가하자고. - “믿고 싶으면 너 혼자 조용히 믿거라.”우리를 바보로 알고 십계명 만든 개네가 들으면 - 뒤로 나자 빠질 일이니까 쉬 ~ 쉿.
그러면이제부터 사도행전 12장 이야기 계속하자고. 2개만 있으면 되는 계명을 10개로 부풀린 것은 순전히 <구라>를 치기 위해서였어. 그리고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거짓말이 들통 나니까 어물쩍 어물쩍 넘어간 경우가 <사도행전>이야.
사도행전 12장, 경우 시대 배경은 서기37년부터 서기44년 지야. - 7년이나 되는 긴 세월 개네는 <유대멸망>을 자초하는 한심한 짓들만 했기 때문에 -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 데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 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하면서 우리를 또 속이려고 했던 거야.
그러나 거기 등장하는 수십 명 사람은 피차 관련이 있기 마련이고,
‘무슨 일이 벌어졌나? 언제 벌어졌나? 왜 벌어졌나? 어떻게 벌어졌나? 어디서 벌어졌나? 누가 연루 돼 있나?’를 적용하면 개네가 숨기려는 역사적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돼 있다고 -
서기36년은 빌라도 총독 10년 임기가 끝나는 해였어. 티베리우스 지시로 만들어진 <속주 총독 임기 중 공소유예> 특별법 때문에 서기30년 고발하지 못하였다가 시리아 총독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에게 - "빌라도가 무고한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흉악범 바라바를 방면했으며, 시신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죽은 자가 부활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게 한 책임이 있다" 면서 고발했네.
빌라도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어서 알고 있었던 비텔리우스는 서기37년 유월절 예루살렘에 와서 - 고소를 취하는 조건으로 서기6년 시리아 총독 구례뇨가 빼앗아 안토니요새 로마 병사들이 보관하고 있던 대제사장 예복을 돌려주면서 고소를 없었던 일로 해버렸어. 그 당시 원로사제 안나스는 노환으로 이미 사망했고, 가야바가 대제사장을 그만두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두개파 뵈두스의 아들 칸데라스를 대제사장에 임명하면서 대대적인 물갈이가 있었던 거야.
로마에서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전국 변화가 있었어. - 카푸아에서 사망한 티베리우스 시신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시민 반응은 싸늘했어. 서기19년 시리아에 있다가 여름에 창궐하는 괴질로 죽은 게르마니쿠스와 전혀 딴판이었어. - 시리아 총독 피소가 독살 했다고 의심한 아그리피나가 거짓 선전을 했고,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던 로마 시민의 애도 속에 장례가 엄수된 일이 있었지.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로마시민의 냉대와 조문객 없는 가운데 마르스 광장 화장터에서 수습한 유골을 장례의원들이 황제 묘역에 안장 했지.그 시각 - 원로원에서는 25세가 되려면 아직도 4개월이나 부족한 칼리굴라에게 <국가의 아버지>와 <신격> 칭호를 주었네. 그 후, 로마에서는 날마다 축제 분위기였어.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빵과 서커스> 정책으로 로마 시민을 무위도식 하게 만들었는데 - 티베리우스는 검투사 시합을 중단 시켰다네.그런데 칼리굴라가 <빵과 서커스> 정책을 다시 시행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에 여자와 아이들은 머리에 화관을 쓰고 거리를 뛰어다니면서 즐거워했다네.모두가 행복한 얼굴이었어.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한 것처럼 기뻐했던 거였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경축 사절단을 인솔하고 온 유대인 필론도 칼리굴라에게 축하 선물을 증정하면서낯 간지러운 소리를 했네."황제 폐하! 행복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문을 활짝 여시고 행복을 맞이하십시오."
제위에 오른 칼리굴라가 빌라도 후임으로 마르셀루스를 유대 총독으로 보내면서 아그립바에게도 유대 왕 칭호를 주었네. 그런데 서기34년 빌립이 죽고, 공석 중인 유대 북부 지역으로 가라고 했네.명실상부 유대 왕이 되지 못한 아그립바 입장에서 보면 - 실망이 컸지만 불평할 입장도 아니기 때문에 - 부인과 아들 그리고 두 딸과 함께 유대로 갔지.
47세가 되 서야 왕 칭호를 받고 갈 때, 클라우디우스는 형제처럼 지낸 사이라서 해방노예 블라스트스를 따라가게 했다네. 아그리립바 호위무사였던 거였어.
아그립바가 유대 왕 칭호를 받고 오니까 - 헤르디아와 안티바가 왕 칭호를 받겠다면서 로마로 갔다네. 그러나 아그립바가 블라스투스를 보내 - 안티바를 모함 하는 바람에 안티바는 게르마니아 외딴 지역으로 유배당하고 헤로디아도 따라가면서 두 사람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
황제가 된 칼리굴라는 검투사 시합과 각종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황실 재정을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과로와 열병에 걸려 병석에 누워 거동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네.
칼리굴라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 전역이 황제의 쾌유를 비는 침통한 분위기로 바뀌었네. - 너, 나 할 것 없이 황제의 안부를 묻는 것이 인사가 되었지. 칼리굴라 얼굴이 새겨 진 유피테르 신상 앞에서 쾌유를 비는 제사가 유행처럼 번져 나갔어. 예루살렘과 가까운 얌니아의 그리스인들이 칼리굴라 신상 앞에서 쾌유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을 때,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훼방을 놓고, 폭행을 가하면서 사상자가 발생했다네.
얌니아와 가까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거주 그리스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보복성 공격을 가했지. 부두에 정박 중인 유대인 소유 선박에 불을 지르고 상가를 노략질 하면서 유대인들이 피해를 입었어. 아빌라우스 플라쿠스 이집트 총독이 가세하면서 유대 회당에 신상까지 세우니까 - 서기40년 3월 중순, 필론이 그리스인들로부터 입은 피해 보상과 회당에 세워진 신상 철거를 탄원하려고 대표단을 데리고 칼리굴라를 찾아갔네. -
그들 보다 한 발 앞서, 그리스 지도자 아피온이 보낸 사람이 먼저 칼리굴라를 만났다네.
"유대인들은 폐하께 경의를 표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도시 마다 폐하의 신상이 세워지고 있을 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신상을 세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폐하의 신상 앞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 이 말을 듣고 칼리굴라가 유대인들을 만나주지 않았지.
문전 박대 당한 필론이 돌아가면서 일행에게 이렇게 말했다네.
"칼리굴라가 우리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야훼를 자기 적으로 삼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분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우리는 용기를 잃지 말자."
이 말을 전해들은 칼리굴라가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에게 공문을 보냈다네.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예루살렘에 나의 신상을 세우게 하시오. 만약 불복하면 무력을 사용해도 좋습니다."
칼리굴라의 명령을 받은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가 지중해 연안의 티루스 공방에서 신상을 만들게 하고 예루살렘에 오니까 - 유피테르 신상이 세워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지. 그러자 재앙을 선전하는 거짓예언자가 예루살렘 감람산에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어.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려 돌이키지 말라.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라. 이때 큰 환란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와 같은 환란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
이렇게 말하면서 성전에 신상이 세워지는 날 세상 종말이 된다면서 새빨간 거짓말을 했어.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믿는 '야훼'는 다듬어진 돌에 불과한 신상 앞에서 - 겁쟁이었다는 얘기가 되는 거였어. 거짓 선지자가 이처럼 소란을 피우고 있을 때 아그립바는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페트로니우스를 찾아가서 - 황제를 설득하고 신상 건립을 없었던 일로 할 수 있다고 장담했네.
칼리굴라와 아그립바가 친밀한 사이임을 알고 있었던 페트로니우스가 다녀오라고 했어. 10월 10일, 로마에 도착한 아그립바는 클라우디우스에게 함께 가자고 말했어. -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아그립바 성화에 따라갔지. 칼리굴라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면서 먼저 말했어.
"티베리우스 시절 당신이 겪은 고충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에게 보답하겠습니다. 소원이 있으면 말하세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아그립바 눈에서 광채가 났고,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립바를 쳐다봤네. 아그립바가 잠시 머뭇거렸네. 유대 왕을 시켜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면서도 예루살렘에 총독을 보내고, 자기를 유대 북부 지역으로 가라고 한 사람이야. 그렇게 말한 사람이 갑자기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말을 바꿨으니 - 만에 하나 명실상부 유대 왕이 되게 한 다음, 책임지고 예루살렘 성전에 신상을 세우라고 한다면 이것은 화근을 자초하는 꼴이 되는 거였어.
아그립바가 창백한 얼굴로 "더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 다음 신상 건립 취소 말은 하지도 못했지.
칼리굴라는 미리 준비한 문서를 내밀면서
"더 바랄 것이 없다니까 다행입니다. 이것을 페트로니우스에게 전해 주세요."
표지에는 <극비> 소인이 찍혀 있었어.
"하루가 급합니다. 전령을 보낼 수도 있는데 때마침 오셨기에 부탁드리는 겁니다."
아그립바는 황궁을 나서면서 실성한 사람처럼 허, 허, 허 웃었다네. 아그립바와 클라우디우스는 동갑내기 50세였고, 칼리굴라는 28세였네. 얕잡아 본 게 불찰이었고, 칼리굴라는 소견머리 없는 철부지가 아니었어.
예루살렘에 도착한 아그립바가 <밀봉> 한 문서를 페트로니우스에게 전해주었네.문서를 확인한 페트로니우스가 아그립바에게 문서를 집어 던지고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시리아로 돌아갔어. 문서를 확인한 아그립바는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했네.
"아무래도 그대는 내 명령보다 유대인들 선물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총독 임무에 충실하기보다는 유대인들 호의를 선택했다면 나에 대한 도전이요. 나는 명령에 불복종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명확하게 해 둘 필요가 있오. 당신 스스로 인생의 결말을 짓기 바랍니다. 잘 가시오."
페트로니우스에게 자살하라고 문서를 보낸 칼리굴라는 이집트 총독 플라쿠스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신상을 세우라고 다시 명령했네.
그렇게 되니까 예루살렘에서는 재앙을 선포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 유피테르 신상이 세워지는 날 세상 종말이 온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지. 이들이야말로 서기70년 유대 멸망을 자초한 어리석은 종파분자들이었어.
오늘은 여기서 끝 - 감사,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