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버스에 탑승했다. 일정표에는 다음 코스가 바티칸시국이었다.
계산해 보니까 로마에서의 관광은 고작 6시간뿐이었다. 시간표가 너무 빡빡하다고 불만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가이드가 차내 방송으로 말했다.
“바티칸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이면서도 막강한 영향력과 재력을 갖춘 국가입니다. 1984년 도시 전제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이번 여행의 핵심은 세계3대 박물관 둘러보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런던 대영박물관에서 세계적으로 희귀한 고고학 및 민속수집품, 소장품, 그리고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인도, 그리스, 로마, 중국 등의 문화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보셨습니다.”
가이드는 우리와 동행하지 않았으면서도, 7박8일 유럽여행 일정 전부를 숙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이드가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바티칸 박물관은 바티칸 교황궁 안에 있고, 역대 로마교황이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과 고문서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과 라파엘로 산치오의 '아테네 학당' 등 벽화와 장식품이 있기 때문에 박물관이라고 말하지 않고, 미술관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프랑스 파리에 가서 보실, 루브르 박물관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와 안토니오 카노바의 '큐피드와 프시케' 등 200여만 점의 미술품도 보시게 됩니다.”
로마 현지 가이드는 직업의식이 투철한 전문가라고 이미 나는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하는 말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로마의 판테온신전에서 바티칸까지는 도보로 약45분 거리였고, 버스를 이용한 우리는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바티칸시국은 견고하게 쌓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입국을 하려는 사람들이 담장을 끼고 길게 줄지어 있었고, 예약을 한 우리는 곧바로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안티크리스트를 자부하는 사람이라서 바티칸시국을 적의 요새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내심 첩보활동 중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입구를 들어서니까 높고 육중한 담장을 보았을 때와는 달리, 입국장 내에는 무장한 군인이나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여권을 엄격하게 확인하지도 않았다. 가이드가 한꺼번에 준 여권을 흩어보는 정도였다. 여느 공항에서처럼 몸수색이나 휴대품 검사도 하지 않았다. 금속 탐지기가 작동하는 좁은 문을 통과하면 그만이었다. 어린아이들은 그것조차도 하지 않았고, 가이드가 나를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게 해서 수월하게 입국 수속이 끝났다.
입국장 검색대를 통과한 사람들은 곧바로 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에서는 입장료를 받았다. 성인은 12유로, 청소년은 8유라고 광고판에 표시되어 있었다. 한화로 성인은 16,500원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패키지여행의 장점은 출발 전 비용만 지불하면 다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이었다. 단점은 빡빡한 일정, 여행 시간의 대부분을 버스에서만 보낸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원하지 않고, 입맛에 맞지 않는 식사를 해야 하는 고충이 있지만 현지 가이드가 이 점을 고려해서 한국 음식이 나오는 곳으로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우리는 가이드가 미리 지불했기 때문에 무사통과했다. 미술관에는 역대 교황들 소장품과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프라안젤리코 등 화가들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이드의 음성이 휴대용 단말기 이어폰에서 들여왔다.
“16세기 초, 추기경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의 개인 수집에서 미술관이 시작되었고, 역대 교황들의 기증품과 소장품이 많습니다. 미술관의 주된 전시 품목은 그리스도교 고문서와 성유물, 고대의 벽화, 조각품, 이교도의 미술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교도의 미술품까지 전시하면서도 정작 가톨릭은 그리스도교 고문서를 공개하지 않았다. 신약성경 원본이나 사본을 공개하지 않았고,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 발행한 성경책을 시중 서점에서 판매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면서도 가톨릭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화가들로 하여금 기독교 문서를 그림으로 그리게 해서 전시했다.이것이야말로 천박한 지성을 현란한 색깔로 분칠해서 진리인 양 선전 하는 위장술이며 진실을 숨기기 위한 절묘한 계책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미술관 밖으로 나오니까 가이드가 커다란 솔방울 조각상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기 있는 조각상은 대기의 오염을 정화한다는 상징물입니다. 바티칸이 세상의 모든 죄악을 정화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됩니다.”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입가에 번지는 냉소적인 비웃음을 간신히 참았다.솔방울 조각상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시절, 황후 아그리피나가 욕실에 놓고 감상하던 물건이었다. 로마 시내 어딘가에 있던 것을 가톨릭이 가지고 와서 ‘가톨릭이 세상의 모든 죄악을 정화 한다.’ 선전하고 있었으니,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 비웃음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가이드의 설명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바티칸시국의 면적은 0.44㎢에 불과한 작은 나라입니다. 과거 이탈리아 정부와 대립해오다가 1929년 2월 ‘라테란’조약을 체결한 이후, 교황이 다스리는 독립 주권국가로 인정받았습니다. 이곳의 공용어는 이탈리아어입니다. 교황이 국가원수와 국무총리를 겸하고 있습니다. 공식 화폐는 유로화입니다. 상주인구는 1,000명 미만이지만, 세계적으 로 8억이 넘는 가톨릭 신도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바티칸은 유럽의 기독교 문화 총집합체입니다. 수 천 년 동안 쌓여온 가톨릭의 문화와 예 술이 이곳에 있습니다. 너무 많아서 일 년을 살아도 다 볼 수 없다고 합니다. 베드로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저기 보이는 열주와 열주를 장식 한 성인의 동상만 해도 140종이나 됩니다. 방금 전에 보신, 미술관 역사는 1506년 로마의 어느 포도밭에서 ‘라오콘 조각상’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또 다시 비웃음을 간신히 참았다.라오콘은 <트로이목마>에 나오는 전설 속 인물이었다. 트로이 전쟁 당시, 그리스인들의 계략이었던 거대한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지 말자고 말했다. 라오콘의 경고를 무시하고 목마를 궁전 광장으로 들여왔다.야심한 시각에, 목마 안에 숨어 있던 군사들이 밖으로 뛰어나와 왕을 죽이고, 트로이가 망했다. 거기에 등장하는 라오콘이 바티칸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어느 농부가 포도밭에서 라오콘 조각상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교황 율리오 2세가 포도밭 주인으로부터 구입해서 이곳에 가져와 진열하면서 미술관 역사가 시작되었다니까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가이드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저기 광장 한 가운데 있는 오벨리스크 꼭대기에 십자가와 교황 알렉산데르7세 가문 문장이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만든 오벨리스크 중에서 9개는 이집트에 있고, 20여 개는 강대국들이 약탈해 갔습니다. 그 중 하나를 서기 40년 칼리굴라 황제가 로마로 가지고 온 것을 1586년 로마 교황청이 기독교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태양신 ‘라’를 섬기려고 만든 석상이었다.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의 상징물과 가톨릭이 무슨 상관 이 있다는 말인가.오벨리스크가 베드로 광장 한 가운데 있어야 할 이유를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가이드가 우리를 시스티나 성당으로 데리고 갔다. 성당 이름도 교황의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정화 <천지창조>를 유심히 봤다. 내용이야 어찌되었건 그림으로써는 단연 압권이었다.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가면서, 나는 <밀비오 다리 전투> 벽화가 어디쯤 있는지 열심히 찾아보았다. 그리고 교황도 함부로 열지 못하고, 25년에 단 한 번만 열 수 있다는 <천국의 문>도 어디에 있는지 확인 하고 싶었다.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을 선출할 때 추기경들이 모여서 선거하는 장소라고 했다.가이드가 베드로 성당이 세워지게 된 동기도 설명했다.서기 349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의 열두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성당을 건축하라고 지시했다.서기 396년 실베스트로 교황에 의해 축성되기 시작한 성당은 숱한 전쟁과 약탈의 반복에 의해 성당이 사라졌다가 1503년 교황 율리우스2세에 의해 다시 건축을 시작했고, 1629년 무렵 완성되었다면서 가이드는 연도까지 말했다.
“베드로 대성당은 가톨릭의 여러 건축물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입니다. 길이 218m, 높이 137m, 총 면적이 22,067㎡입니다. 6만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고, 778개의 기둥과 44개의 제단이 있습니다. 모자이크 135개, 동상 395개로 구성되어 있고, 꼭대기 돔(쿠폴라)은 1547년 공사가 시작되고 나서, 우여곡절 끝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것 을 가지고 그의 제자 쟈코모 델라 포르타가 1590년 마무리했습니다.”
그러면서 계단으로 쿠폴라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주변 건물들이 양팔을 벌려서 광장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고,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열쇠 모양과 같다고 말했다.가이드의 설명을 듣기 전부터 나는 인터넷 검색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마태복음16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너는 베드로(반석)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가톨릭이 이 구절을 모티브로, 바티칸시국을 만들었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보았다.휴대용 단말기에서는 가이드의 설명이 계속 들려왔다.성당 내부에는 44개의 크고 작은 제대와 395개의 조각품이 배열되어 있으며, 135개에 달하는 모자이크 그림이 벽면에 장식되어 있다고 했다.네로 황제가 목욕할 때 사용한 커다란 욕조가 성당 내부에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성당 내부의 오른쪽에,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이 있었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가 십자가상에 죽고,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빌라도 총독에게 시신을 매장할 것처럼 속이고, 시신을 동굴무덤에 넣었다3일이 지난 이른 아침, 여인들이 동굴무덤에 갔다가 시신을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모친 마리아가 예수의 시신을 무릎 위에 놓고 슬픔에 젖어 있는 모습으로 조각상을 만들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베드로의 시신이 있다는 지하 무덤 입구의 베드로 청동좌상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중세부터 지금까지 이곳을 다녀간 가톨릭 신자들이 조각상 발에 입맞춤을 했기 때문에 오른쪽 발가락이 닳아버린 것을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베드로 시신이 이곳에 묻혔다는 기록이 없다. 베드로가 로마에 왔다는 기록도 없다.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베드로의 무덤 위에 바실리카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고, 그와 관련된 여러 종류의 기록을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서기312년 막센티우스와 싸우고 있었다.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콘스탄티누스는 테베레 강의 밀비오 다리에서 대치하고 있으면서 그동안 이단으로 간주하던 기독교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그리스도인들의 도움으로 승리하고,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법적으로 공인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 그 후, 테오도시우스1세가 서기380년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이로써 300년간의 혹독한 박해를 받았던 기독교는 광범위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모친 헬레나의 영향을 받고 자라면서 기독교에 귀의했다. 아니다. 인생의 여정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모친과 상관없이 40세 때, 스스로 기독교에 귀의 하고 사망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 밀비오 다리에서 막센티우스와 최후의 결전이 있던 날, 콘스탄티누스가 정오의 태양을 보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십자가 모양이 나타나면서 이것으로 이겨라 글자가 나타나는 환영을 보고, 싸움에서 이겼다.
이것만 보더라도 콘스탄티누스가 보았다는 환영은 객쩍은 허세였다. 그와 동시에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는 순간, 로마는 퇴행성 상처부위가 악성 종양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었다. 바티칸시국이 세워지기 전, 이곳은 단지 적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였다.
서기 440년경, 서로마 황제였던 발렌티아누스3세는 본토를 침입한 게르만족과 싸웠다. 북쪽에서는 브리타니아를 침입한 앵글로족과 색슨(작센)족이 여세를 몰아 로마로 쳐들어왔다. 방어에 정신이 없었던 황제는 로마 시가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를 대비해서 테베레 강 건너편에 성을 쌓고 요새를 만들었다. 바티칸시국의 경계 담장이 견고하고 높아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레오4세(847~855)도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성벽을 다시 쌓기 시 작하면서 500여 년이 넘게 성벽을 쌓아서 오늘날과 같은 견고한 성벽 이 완성되었다. 1506년 교황 니콜라스5세가 새로운 바실리카 건축을 지시하면서 성당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베드로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1950년 12월 23일, 교황 비오12세가 바티칸시국 라디오 방송으로 베드로의 무덤을 발굴했다는 뉴스가 나온 이후에도 무덤에 대한 의혹은 끊이지 않았다. 교황의 말이라도 의심쩍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덤을 발굴했다는 발표가 있기 54년 전, 폴란드 작가 헨리크(1846~1916)의 소설 『쿼바디스』가 1896년에 나왔다.
‘쿠오바디스 도미네’는 요한복음(13;36)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대화체이다. 그것을 모티브로, 헨리 크가 소설을 썼다. 줄거리는 단순하다.방탕한 생활을 하던 청년이 신앙심이 깊은 미모의 유대 여인을 만나면서 진실한 사랑을 배워가게 된다. 폭군 네로의 횡포 속에서도 기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로마인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베드로와 바울이 등장한다.
네로는 시가지에 불을 지르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덮어씌우려고 한다. 대학살이 자행된다.콜로세움에서는 결박당한 여주인공을 구하려고 기골이 장대하면서 충 성스러운 노예가 사투를 벌려 물소를 죽인다.관중이 열광한다. 신하들이 네로에게 여주인공을 살려주라고 간청한다. 그 시각, 베드로는 네로의 박해가 두려워서 허둥지둥 도망가다가 예수가 다가오는 환영을 본다.베드로가 땅에 엎드리면서 ‘쿠오바디스 도미네’ 하고 물었다. 예수가 말했다.
‘그대가 양떼를 버리려 하니, 내가 다시 십자가에 매달리려고 간다’
이 말에 감동 받은 베드로가 로마로 되돌아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다.『쿼바디스』를 발표하고 헨리크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영화도 만들어졌다가톨릭 교황과 신도들은 신약성경 내용보다 영화 『쿼바디스』를 더 신뢰하게 되었다. 이처럼 바티칸시국에서 보고 느낀 것은, 문명의 선각자 예수와 관련이 없는 내용이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문학적 여흥거리에 지나지 않고 퇴행의 잡동사니 중 하나였다. 내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가이드의 음성이 이어폰을 통해서 들려왔다.
“이곳 바티칸에서는 있는 그대로를 보고 감상하세요. 우리의 상식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일지라도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고 논할 그런 자리가 아니랍니다.”
나는 깜짝 놀라면서 두리번거렸다. 은근슬쩍 나를 겁주는 소리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이드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이어폰으로 음성만 들었다.
바티칸에서 관광 가이드들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가이드가 무심결에 한 말이라고 나는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