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오후 8시 무렵 탑승한 여객기는 10시30분,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로비로 나오니까, 로마의 현지 가이드가 여행사 피켓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사 로고가 선명한 버스를 타고 우리는 공항에서 30분 거리의 호텔에 투숙했다.
유럽여행 둘째 날(4월 15일), 호텔 로비에서 가이드가 휴대용 수신기를 나누어 주면서 말했다.
“오늘은 콜로세움을 구경하시고, 팔라티노 언덕에서 로마 시가지를 보시고, 포로 로마노, 베네치아 광장, 판테온 신전, 트레비 분수, 스페인 광장을 보시고,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드시고, 바티칸시국으로 이동합니다. 바티칸시국에 가서는 베드로 광장, 박물관, 대성당을 관람하신 다음, 버스를 타고 3시간 거리의 피렌체로 이동합니다. 피렌체의 명소를 보시고, 다시 버스를 타고 가실 때 제가 준비한 도시락으로 저녁 식사를 하시면서 차장 밖으로 펼쳐지는 이국적 풍경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베네치아에, 몇 시 도착하느냐고 누군가가 물었다. 오후11시라고 가이드가 말했다. 7박8일 동안, 여러 관광명소를 둘러보는 ‘패키지여행’이라서 버스를 타고 3~4시간 이동은 다반사라고 일정표에도 명시되어 있었다.
버스가 콜로세움 주차장에 도착했다. 관광 안내 책자를 진열한 가판대에서 고대 로마 화보집을 샀다. 가이드가 콜로세움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콜로세움은 서기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시작하고, 서기80년 티투스 황제 시절 완공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와 장남 티투스, 차남 도미티아누스 세 사람을 역사가들은 ‘플라비우스 왕조’라 합니다. 그들과 달리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여섯 사람을 ‘클라우디우스 왕조’라고 합니다. 콜로세움 경기장은 플라비우스 왕조 시절에 건립되었지만 경기장이 생기기 전에도, 로마에서는 노예검투사 경기가 유행했습니다. 기원전 73년 검투사 노예 스파르타쿠스가 동료검투사 70여 명과 함께 이탈리아 남쪽 카푸아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많은 동조자들이 생겼습니다. 반란군이 된 검투사 노예들은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출신들이었습니다. 스파르타쿠스는 동조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다가 갈리아와 인접한 포강에서 로마군과 싸웠습니다. 로마군총사령관이었던 크라수스는 포로가 된 노예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도망친 자들은 배를 타고 고향으로 가다가 폼페이우스 소속 해군에게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후 노예검투사 경기는 한동안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부활시켰습니다. 검투사 노예상인과 연극배우들에게 돈을 지불하면서 공짜로 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무상으로 먹을거리도 주었습니다. 이것을 ‘빵과 서커스 정책’이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죽을 때까지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정책을 썼습니다.”
‘빵과 서커스 정책’을 말하는 가이드가 신기해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눈에 총기가 서려 있었고, 웃음기 없는 얼굴에는 주관이 뚜렷한 사람으로 보였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역사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빵과 서커스 정책’을 고집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위장병으로 몸이 쇠약했으며 성질이 모질지 못하고 소심한데다가 무능했기 때문에 ‘빵과 서커스 정책’을 죽을 때까지 시행 하면서 자신의 무능을 감추려고 했다.그 바람에 근면하고 창의적이었던 로마인들은 나태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통치자의 잘못된 정책으로 사회기강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집트의 나일강 삼각주에 있는 황실농장과 시칠리아 섬에서 수확한 밀을 로마 시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었다. 경사스러운 날에는 유증금도 주었다. 악티움 해전에서 마크 안토니를 속이고 승리했으면서도, 로마 거주 세대주에게 400세스테르티우스 유증금을 주었다(BC29).
외동딸 율리아와 조카 마르겔루스를 결혼시키고서도 유증금을 주었다(BC24). 첫 번째 손자 가이우스가 예정집정관이 되던 해에도 주었다(BC5).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아버지’ 칭호를 받고서도 주었다(BC2). 노동자 한 달 품삯이 100세스테르티우스인 점을 감안하면, 거금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주었다. 이처럼 구경거리와 먹을거리에 - 유증금도 주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은 일할 생각을 하지 않고 흥청거리면서 놀기 만 했다.
서기14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죽고, 제위에 오른 티베리우스는 노예검투사 시합을 하지 못하게 법으로 금지시켰다. 유증금도 자기 생전에는 주지 않았다. 이처럼 긴축 정책을 썼기 때문에 인기가 없었다. 그 때문에 까닭 없이 비난과 미움을 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빵과 서커스 정책’과 동시에 집권 40여 년 동안 자신의 신격화를 도모했다. 그 바람에 지중해 인근에서는 은밀한 미스터리와 허망지설이 창궐했으며, 로마제국은 지중해 패권국답지 않게 종교 박람회장이 되고 말았다.
판테온 신전을 비롯하여 황제가 손을 댄 신전이 이탈리아 반도에만도 80여 곳이 넘었다. 이탈리아 중북부 토스카나 지방의 카라라에서 엄청 난 양의 대리석 광산이 개발 되면서부터였다.내가 이처럼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티베리우스를 비교 하면서 차이점을 생각하고 있을 때, 가이드는 콜로세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콜로세움의 한 쪽 길이는 188m, 다른 쪽 길이는 156m, 총 둘레는 527m, 높이는 48m이고, 80개의 아치 형태 외벽이 둘러싼 타원형 구조물입니다.”
“내부는 4층으로 되어 있으며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각 층마다 건축 양식이 다르고, 중앙에서 볼 때 관람석은 방사 형태이고, 1층의 특별석에는 황제와 황실 가족, 바로 옆에는 원로원 의원들, 2층은 귀족과 무사들, 3층은 로마 시민, 4층은 여자와 노예들, 그리고 관광을 목적으로 온 외국인들도 4층에서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신속하게 대피시키려고 사방팔방에 여러 개의 문도 있었습니다.”
가이드가 이처럼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는 데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사진 찍기에 바빴다. 경청하는 나에게 가이드가 말했다.
“콜로세움 경기장이 세워지기 전, 이 근처 어딘가에 네로 황제의 거대한 청동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거대하다’는 뜻의 라틴어 ‘콜로살레’가 콜로세움의 어원입니다. 보시다시피 경기장이 거대하지 않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심으로는 영화 <쿼바디스>에서 본 장면을 생각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이 보고 있는 가운데, 기독교 신자들이 맹수에게 잡혀 먹히는 끔찍한 장면이었다. 네로 황제가 엄지손가락을 올리거나 내리는 제스쳐를 할 때마다, 함성을 지르면서 관중이 열광했다. 하지만 네로 시절에는 콜로세움이 없었다. 네로는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하거나 맹수의 먹잇감으로 주지도 않았다. 그와 같은 이야기는 가톨릭교회가 만들어 낸 거짓말이었다.
콜로세움에 대한 설명을 마친 가이드가 검정색 벤츠를 가리키면서 타라고 했다. 로마 시내에서는 25인승 이상 버스는 운행할 수 없다면서, 벤츠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도보로 가도 되는 거리였지만, 시간이 없다면서 두 대의 벤츠에 각자 알아서 타라고 했다. 벤츠를 타고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팔라티노 언덕 정상에 올랐다.
팔라티노 언덕에서는 로마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아벤티노, 첼리오, 카피톨리노, 에스퀼리노, 팔라티노, 퀴리날레, 비미날레 일곱 언덕 중에서 - 팔라티노 언덕이 가장 역사가 깊은 곳이었다.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 형제가 로마를 세웠다는 전설이 깃든 장소였다.그 후, 귀족들의 호화로운 주택이 들어섰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황후의 거처였던 ‘리비아의 집’도 이곳 어딘가에 있었다.
공화정과 민중회의를 표방하던 로마인들은 왕궁이나 궁전이라는 호칭은 쓰지 않았다. 그 대신 도무스라고 했다. 도무스는 건물 중앙이 뻥 뚫린 가옥구조를 말한다. 외벽이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방어를 목적으로 지은 건물이었다. 가운데 뻥 뚫린 공간의 첫 번째 안뜰은 아트리움으로 오락을 하거나 일을 하는 공간이었다. 두 번째 안뜰에는 정원이 있고 연못과 분수대도 있었다. 외벽에 붙은 주거용 방은 2~3층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부터 도무스를 궁전이라고 불렀다. 그 때 사용하던 플라비 궁전의 잔재가 이곳 어딘가에 있다는 기록을 일간지에서 본 기억이 났다.
서민들은 시가지에 있는 3~4층 아파트 인술라에서 살았다. 기원전 26년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곳 정상에 신전을 세웠다. 신전 중앙 대문을 온통 대리석으로 치장했다. 사방에 조각상들을 세워놓았기 때문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장엄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리비아의 집’에는 연못과 분수대와 목욕탕이 있었다. 이처럼 지대가 높은 팔라티노 언덕 정상에도 상수도가 있었다는 사실만 봐도 로마인들의 측량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반도의 등줄기에 해당하는 아펜니노 산맥에서 발원한 수원지에서, 수로를 따라 수돗물을 공급받으려고 수로를 설치하면서 측량과 토목기술이 발달했다. 수로관은 납과 구리를 녹여서 만들었다. 이음새는 콘크리트로 메웠다. 일정한 각도를 유지하려고 높은 지역에서는 수로관을 매설했고, 계곡에는 아취다리를 놓고, 그 위에 수로관을 연결하면서 아펜니노 산맥의 생수를 로마시민이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팔라티노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니까, 서울 남산 어린이회관 정도의 높이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원로원 건물이 어디쯤 있었을까 생각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화제로 잿더미가 된 건물 흔적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기원전 52년, 원로원과 민중회의 권력 투쟁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 민회의 폭도들 방화로 원로원 건물이 전소되었다. 원로원이 선출한 집정관과 민회를 대변하는 호민관은 사사건건 충돌했다. 귀족 신분이었던 풀케로는 서민의 양자로 입적하고 호민관이 되었다. 카이사르가 게르마니아 지역에 가 있을 때였다.
폼페이우스는 극동지역에 있었고, 집정관 밀로가 자객을 보내 호민관 풀케르를 살해했다(BC52). 호민관 풀케르의 부인 풀비아는 부자였고 여장부였다. 칼에 맞아 죽은 남편의 사체를 마당에 안치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민심을 선동했다. 그러자 호민관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민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수천 명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구호를 외치면서 팔라티노 언덕의 원로원 건물을 점거하고, 나무의자와 집기들을 쌓아놓고, 건물 앞에서 시신을 화장했다. 때마침 불어오는 강풍에 불길이 번지면서 원로원 건물이 전소되고, 그 후 건물을 다시 짓지 않고 여러 신전을 옮겨 다니면서 회의장으로 썼다.
나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빤히 건너다보이는 첼리오 언덕에 가 보고 싶었지만 갈 수 없어서 못내 아쉬웠다.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영국)에 갔다가 되돌아와서 갈리아의 민란을 평정하니까, 원로원이 폼페이우스를 내세우고 카이사르를 제거하려고 했다. 루비콘 강을 건너 와서 카이사르는 원로원과 싸워야 했다.
기원전44년, 카이사르가 살해당한 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두 사람에게 북방 정벌을 지시했다. 라인 강 서쪽 방위사령관이었던 드루수스와 도나우 강 동쪽 방위사령관이었던 티베리우스는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엘베 강과 도나우 강을 잇는 전선을 목표로 군사작전을 펴고 있었다.
그 무렵,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아의 루그두눔에서, 드루수스와 안토니아 사이에서 태어났다.그가 태어난 다음 해였던 기원전9년 1월, 드루수스는 원로원으로부터 호민관 특권에 동의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그동안 미루어 오던 후계자를 확정지었다.이 사실을 알게 된 드루수스는 형이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데 자신이 가로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미안해했다. 티베리우스는 애초부터 후계자가 될 생각이 없었다면서 형제간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후계자가 되고 달포가 지난 2월 말, 드루수스는 한파가 몰아치는데도 정찰에 나섰다가 말이 빙판길에 미끄러지면서 크게 다치고, 병영에 돌아와서 형을 애타게 찾았다.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산맥과 인접한 평야지대의 포 강과 티치노 강이 합류하는 티키눔의 겨울 숙영지에 있던 티베리우스가 한걸음에 달려갔다.
드루수스는 그 당시 27세였고, 부인 안토니아와 여섯 살 게르마니쿠스와 네 살이었던 딸, 그리고 갓 태어난 클라우디우스를 형에게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티베리우스는 근심하지 말라고 동생을 안심시키고, 운구 행렬 선두에 서서 로마로 돌아왔다. 남편을 따라 외지에 갔던 안토니아는 남편을 잃은 슬픔에 정신이 없어서 갓 태어난 클라우디우스를 보모에게 맡겼다. 추운 겨울, 운구 행렬 뒤를 따라오던 보모의 실수로, 클라우디우스는 병에 걸려 하반신 마비가 왔다. 다행히 로마에 와서 병세가 호전되었다. 다리를 절기는 했어도 목발을 짚고 다닐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보모였던 나르키소스 어미는 자신의 잘못이 크다면서 평생을 괴로워하면서 살았다.
로마인들과는 달리 갈리아인, 아니우니족은 한 장소에 모여 살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 전쟁 중에도 가족을 데리고 다녔다. 싸움에서 패하면 아녀자들은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훗날 클라우디우스의 3인방이었던 나르키소스, 칼리스투스, 팔라스, 그리고 또래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클라우디우스 집에서 함께 살았다. 졸지에 미망인이 된 안토니아는 첼리오 언덕의 본가에서, 유학 온 아이들을 보살피면서 살았다. 그 당시, 속주의 왕이나 권세가들은 자녀를 로마에 유학 보내는 관습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로마 황실 자녀들과 친교를 맺어두면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클라우디우스가 여섯 살이 되던 기원전4년, 서른 살 가량 되어 보이던 유대 여자 베레니케가 11세 헤로디아와 6세 아들을 데리고 왔다.헤롯의 며느리이면서도 자녀가 어려서 유산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안토니아를 찾아와서 가사도우미를 자청했다. 아들이 장성하면 유대 왕 칭호를 받고 금의환향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허드렛일은 노예들이 했지만 유학 온 고만고만한 또래 아이들이 야단법석을 떨면서 소란을 피우는데도 베레니케는 짜증이나 불평을 하지 않았다.
“망측한 종교적 관습이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베레니케는 정직한 내 친구랍니다. 최고의 살림꾼이죠.”하면서 안토니아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망측한 종교적 관습’이라는 표현은 유대인이면 따라붙는 수식어였다. 베레니케는 유대인임을 고집스럽게 내세웠다. 아들이 장성하면 유대 왕이 될 거라서 더욱 유난을 떨었다. 그녀는 아들을 ‘헤롯 아그립바’라고 불렀다. 극동 지역 사령관이었던 마르쿠스 아그립바가 기원전15년 예루살렘 성전 본당 준공식에 참석하고, 청동 포도주 잔과 황소 100마리를 선물한 적이 있었고, 행사에 참석한 이들이 고기를 배불리 먹었으므로 그의 이름을 빌리면 유대인들 환심을 사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아그립바가 클라우디우스 집으로 오고 2년이 되던 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외동딸 율리아(BC39~AD14)가 외간 남자와 간통을 했다면서 고발당했다. 기원전18년 ‘간통 및 혼외정사에 관한 법’이 만들어지고 첫 번째 발생한 사건이었다. 황제의 딸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경고성 차원에서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더군다나 황실에서 발생한 사건이라서, 황후 리비아(BC58~AD29)의 노여움이 컸다.
율리아에게는 변호사를 사서 변론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속전속결로 판결이 났다. 그 서슬에 상대 남성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율리아는 종신 유배형으로 아드리아 해의 판다타리아 섬으로 보내졌다.
졸지에 유배지로 가게 된 율리아는 당시 37세였고, 기원전12년 사망한 전 남편 마르쿠스 아그립바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자녀가 있었다. 장남 가이우스는 18세, 장녀는 17세, 차남 루키우스는 15세, 차녀는 12세, 막내 포스투무스는 10세였다.
그녀는 두 번째 혼인한 티베리우스 하고는 초야도 치르지 않고 별거 중이었다. 율리아는 유배지로 가기 전, 아이들을 첼리오 언덕의 클라우디우스 집으로 보냈다. 명색이 율리아의 남편이었던 티베리우스는 드루수스의 유해와 함께 로마에 돌아와서는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로도스 섬에 가 있었다. 그곳에 있으면서, 서기1년 올림피아 대회(195회)에 출전하고, 기마경주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율리아가 유배지로 떠난 다음부터, 아이들은 국법의 지엄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아이들은 율리아의 간통사건에 대해서는 모른 체했다. 되레 즐거운 척 하면서 어른들을 속였다. 이와 같은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나는, 첼리오 언덕에서 왁자지껄 떠들면서 노는 아이들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