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이야기

복음서는 고장난 거짓말(2)1

22-12-25 김춘봉 30


*예수 메시아는 객쩍은 소리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인류는 문명의 씨앗으로 존재합니다. 태생적 창조정신과 자력갱생의 정신력을 발휘하면서 중세 르네상스 이후, 인류는 문명세계를 활짝 열었습니다. 문명의 씨앗은 그리스인들의 <학당>과 이집트인들의 학문과 문화예술의 산실 <무세이온>에서 발아했습니다. 로마 지배 하에서도 문명의 씨앗은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현대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율리우스력을 최초로 도입한 카이사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트루비우스의 <건축 10서>, 플리니우스 세쿤두스 <박물지>는 고대인들의 지식을 총망라한 대표적 기록문화유산입니다.로마인들은 화산재와 석회를 섞어, 현대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콘크리트 공법으로 토목과 건축 구조물을 만들었습니다.

로마 상주인구가 백만 명에 육박하면서, 콘크리트 공법으로 4~5층 아파트를 짓고 거기서 살았습니다. 상하수도 시설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습니다.이탈리아 반도 등줄기에 해당하는 아펜니노 산맥에서 발원한 생수를 가져오려고, 십여 개의 수로도 건설했습니다. 로마인들은 대중 욕탕과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는 문화인이었습니다.로마인들처럼 세계 도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두뇌를 밝혀 문명을 일으켰습니다. 원시에서 문명으로, 빈곤에서 풍요로, 지상에서 우주로 삶의 터전을 넓혀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문명은 열린 세상이고, 당연히 가야 할 길이고, 인류는 문명의 씨앗으로 존재합니다. 문명의 씨앗 존재 여부는 신을 믿고 안 믿고 만큼이나 중요합니다.그러나 로마인들은 기원전 45년을 기원으로 문명시대를 선포한 카이사르 암살 이후, 문명 시대 여명기에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파릇파릇 돋아나던 문명의 씨앗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지중해 절대 강자였던 로마인들은 선도적 역할을 하지 않으면 퇴행의 수순을 밟게 되는 시험대에 올라 있었습니다.공존과 번영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번데기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듯 사람들도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탈피하고 거듭나야 새로운 문명세계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표적>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키케로와 원로원 의원들은 카이사르가 말한 관용과 포용 정책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적대 감정을 드러내면서 카이사르 암살을 자행한 이후, 역사적 퇴행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퇴행의 첫 번째 주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였습니다. 

리비우스는 자신의 저서 <도시의 건설로부터> 서두에, 세계를 지배하게 된 로마인들을 부각 시키고, 로마를 위대하게 만든 훌륭한 집정관들과 민중을 선동하면서 내란을 부추긴 별 볼일 없었던 호민관들을 구분하면서, 미래를 위해서 누가 더 옳았는지 밝히려고 역사서를 서술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첫 장에 건국 신화를 집어넣게 해서 <도시의 건설로부터>를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리비우스는 더 이상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카이사르가 임명한 '테렌티우스 바로' 도서관장이 죽고, 후임자를 지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서관은 사라졌습니다.

황제는 <만신전> 판테온신전을 건설하면서 로마를 종교 박람회장으로 만들었습니다.이탈리아 중북부 토스카나 지방의 카라라 대리석 광산이 개발 되니까 ‘흙의 로마’를 ‘대리석 로마’ 운운하면서 모든 신전을 대리석으로 다시 짓게 했습니다. 황제가 이 모양이기 때문에, 역사적 퇴행은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그 무렵, 나사렛 예수가 <시대의 표적> 과 <문명의 씨앗>을 말했습니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날씨가 궂겠다! 하면서, 어째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합니까?"

"당신들 믿음이 겨자씨만큼 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못할 것이 없다." 는 말도 했습니다. 

<자아 발견>과 <정신력 무한 신뢰>를 이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문명 창출에 동참하라는 말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는다. "

생장 조건이 맞아야 씨앗이 결실을 맺는다는 말도 했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한 예수는 미래를 설계한 문명 디자이너였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어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운 열 처녀와,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긴 부자 이야기도 문명세계에 대한 비유였습니다.예수는 비유로 말할 때마다, "귀 있는 자는 들으시오." 하면서 뒷귀가 어두운 사람처럼 못 알아듣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예수는 번데기가 허물을 벗듯 거듭남에 대한 말도 했습니다. 바리새파 랍비 니고데모는 그 말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늙은 사람이 어떻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출생할 수 있느냐?" 면서 음충맞게 능청을 떨었습니다. 그 후, 니고데모와 바리새파 랍비들은 예수를 볼 때마다 선험적 열등의식에 빠지곤 했습니다.

이처럼 비유로만 말한 예수는 문명의 선각자였습니다. 그런데 서기28년 안티바와 헤로디아 재혼을 비난하다가 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예수에게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지요? 그렇지요?"

"보라! 우리의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따위 객쩍은 헛소리도 했습니다.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십자가상에서 죽은 예수 시신을 동굴무덤에 방치하면서 - 문명의 선각자 예수는 부활한 메시아 허망지설 중심에 들게 되었습니다.


* 이사야 53장과 예수의 고민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직후, 일부 학자들이 대법원에 예수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한 일이 있습니다. 무고한 예수 십자가 처형은 이스라엘 민족의 수치로 남을 수 있기 때문에 주권적 사법기관을 가진 마당에 재심청구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 사건은 억지 혐의 적용. 법적 절차를 무시한 재판 진행. 여론에 휘둘린 빌라도 총독의 무리한 판결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대법원은 소송 기록이 없고 신약성경의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라는 이유로 재심 청구를 각하했습니다. 서기30년 당시, 재판권을 행사했던 로마제국을 계승한 이탈리아 법원이 할 일이라면서 사족을 덧붙이기까지 했습니다.

이와 같은 기사를 일간지에서 읽고 예수 사건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던 나는 신약성경 단편적인 기록과 유대 역사를 넘나들면서 사건 재구성에 성공했습니다.   예수 사건은 서기70년 유대 멸망을 향해 급물살을 타게 된 시발점이었다는 사실도 알아냈습니다. 예수 사건은 문명의 선각자 카이사르 이후 문명시대 여명기에 먹구름이었다는 혼란스러운 시국 상황에서 논의 되어야 합니다. 지중해 절대 강자였던 로마는 미래 지향적인 현명한 통치자 카이사르 암살 이후 역사적 퇴행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역사의 분기점에서 도약의 기회를 잃고 추락하는 모양새였습니다. 로마인들은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로 멱살을 잡거나 주먹질 하는 한심한 짓을 했습니다.

제정로마 퇴행의 여파가 유대 속주에 미치면서 서기30년 예수 사건으로 비화되었으며 또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예수 십자가 사건은 복잡하게 꼬인 인물과 현실상으로는 말이 될 수 없는 상황 설정 등 매우 자극적인 장면이 드러난 막장 드라마였습니다. 무고한 예수를 희생시켜서 경각심을 높이려는 원로사제 안나스와 메시아 운운하면서 예수를 전면에 내세우고 예루살렘 시가지 거점 확보와 자신들의 존재감을 동시에 과시하려는 베다니 사람들, 그리고 예수 시신을 동굴무덤에 방치해서 - 예수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게 하려는 바리새파 랍비들 음모가 작동하면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 역사의 잠재적 요인도 작용했습니다. 소수민족 유대는 여러 강대국 속주로 명맥을 이어왔기 때문에 수난의 역사 그 자체였습니다.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 역사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기원전586년 바빌로니아와 애급 틈새에서 말썽을 피우던 다윗왕조를 느브갓네살 왕이 포로로 데리고 가면서 방화로 사라졌습니다. 기원전516년 만들어진 스룹바벨 성전도 간신히 명맥을 이어오다가 기원전165년부터 23년 동안에 시리아 왕 유대교 탄압으로 그리스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명칭을 <올림피아 제우스>로 바꾸고 성전을 제우스 신 섬기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때부터 양이나 염소 대신 돼지를 제물로 사용했으며 가정집에서도 대문에 향을 피우는 작은 항아리를 매달았습니다. 제우스 축제 기간 중에는 그리스 배우들이 와서 디오니소스 연극을 공연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한 번 죽었다가 살아 난 신입니다. 배우들이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이것은 디오니소스의 살, 이것은 디오니소스의 피하면서 연극을 공연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육체를 가진 신이고 구세주였습니다. 동정녀에게서 태어났으며, 결혼식에서 물을 술로 바꾸는 기적도 행했습니다. 디오니소스로 분장한 배우가 세상 죄를 짊어지고 죽었다가 사흘 후에 부활합니다. 다시 와서 세상을 심판한다는 말을 남기고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이와 같은 연극을 기원전165년부터 23년 동안 유대인들이 관람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잔재가 어떤 식으로든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 이야기와 세상 종말이 바싹 다가왔다는 거짓 역사가 들어 있는 <다니엘> 문서가 세간에 나돌면서 민심이 흉흉했습니다. 유대교 탄압을 자행했던 안티오코스4세가 갑자기 죽고, 9살이었던 안티오코스5세가 왕위를 물러 받게 되니까 섭정으로 삼촌 리시아스가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섭정 2년이 되던 해, 어린 왕도 죽고 왕위 계승 문제로 리시아스는 정적들 도전을 받으면서 혼란에 빠졌을 때 - 시리아와 가까운 모데인에서 살고 있던 전직 제사장 마티아스와 다섯 아들이 시리아를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하면서 충성을 맹세하고 유대 왕 칭호를 받아가지고 왔습니다.

정권 다툼이 극심했던 시리아는 멸망 직전이라서 속주 유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마타디아와 다섯 아들이 시리아와 싸워서 독립을 쟁취한 것처럼 허세를 부리면서 예루살렘을 차지했습니다. 이것이 하스모니아 왕조 시작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왕권을 행사하게 된 하스모니아 사람들은 사두개파와 손잡고 스룹바벨 성전 정화 사업을 벌였습니다. 8일 동안 촛불을 밝히는 수전절 봉축행사를 했습니다. 그때, 바빌로니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구성된 바리새파도 생겨났습니다. 시리아의 유대고 탄압이 끝났는데도 유대광야의 엣세네파는 예루살렘에 들어 올 수 없으니까, 디오니소스 신전으로 사용했던 스룹바벨 성전을 없애야 한다면서 성전무용론을 주장했습니다.  

로마 극동지역 사령관이었던 폼페이우스가 왕권 다툼으로 말썽을 피우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를 없애고 속주로 삼았습니다. 시리아 초대 총독으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가 부임했습니다. 유대의 하스모니아 왕조는 존속시켰습니다. 하스모니아 왕조도 왕권 다툼으로 형제간에 싸웠습니다. 폼페이우스가 형과 동생을 부른 자리에서 동생을 고발한 자가 말했습니다.

"아리스토불로가 백성을 노예처럼 부리려고 왕 행세를 합니다."

히루카누스도 거들고 나섰습니다.

"동생이 왕 행세를 하면서 갈릴리 무리를 예루살렘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동생이 폭력과 무질서의 장본인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반역을 일으키겠습니까? 이 사실을 말해 줄 증인은 천 명이 넘습니다. 제 말을 믿지 못하시면, 안티파테르에게 물어보십시오.”증인 천 명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이두매 행정 장관이었던 안티파테르가 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증인으로 내세웠습니다.

아리스토불로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형은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이라서 백성으로부터 비웃음을 사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면서 다시 말했습니다."저기 있는 자들 사주를 받는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안티파테르와 같은 자를 가까이 하기 때문에 유대가 언제 이방인의 손에 넘어갈지 모른다고 근심하는 백성들이 저를 왕으로 추대했습니다."폼페이우스는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자주색 옷에 화려한 장식품을 치렁치렁 걸친 동생을 꾸짖고, 형과 화목 하게 지내라고 타이른 다음 나바테아로 갔습니다.동생은 폼페이우스가 나바테아에서 시리아로 가는 줄 알고, 모친과 형을 옥에 가두고 바리새인들 여러 명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폼페이우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니까, 황급히 성 밖으로 나가 500 달란트 상당의 뇌물을 주면서 그냥 지나가기를 권했습니다.수상하게 생각한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고 하니까, 성 안에 있던 자들이 성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아리스토불로는 포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허름하기 짝이 없는 성문을 부수고, 폼페이우스가 잔당들을 소탕하려고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사두개파 사제들은 왕권 다툼과 자신들은 무관하다면서 번제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폼페이우스가 성소와 지성소 사이, 휘장을 제치고 속을 들여다보니까, 거기에는 2,000달란트 상당의 금괴가 있었습니다.지성소까지 살펴 본 다음 밖에 나와서, 부하들에게 아무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잔당들을 쫓는 중이라서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유대인들은 당연히 그곳에 있어야 할 <야훼> 신이 없다는 말로 이해하고, 성전 무용론을 주장하는 무리가 활개를 치기 시작했습니다.폼페이우스는 아리스토불로를 인질로 데려 가면서, 금 촛대와 고귀한 그릇과 금괴를 전리품으로 가져가지 않았습니다.그 대신, 하스모니아 왕조를 없애고, 이두매 행정장관이었던 안티파테르에게 유대 전 지역을 다스리게 했습니다.유대를 통치하게 된 안티파테르는 이두매에 있으면서, 장남 바사엘을 예루살렘 행정관으로, 그 당시 25세였던 헤롯을 갈릴리 행정관으로 보냈습니다.기원전 44년, 카이사르 암살 주범이었던 카시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유대 왕권을 되찾으려는 하스모니아 왕조 잔당들이 카시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예루살렘에 와서 바사엘을 죽이고, 이두메에 사람을 보내 안티파테르도 독살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헤롯이 예루살렘으로 달려갔다가 매복조 공격을 받았습니다. 헤롯은 무역선단을 이끌고 지중해의 여러 항구를 드나들면서 해적들과 싸운 전력이 있는데다가 호위무사들을 데리고 갔기 때문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헤롯은 갈릴리 북쪽 신의 삼나무 숲이라고 알려진 울창한 자연림에서 벌목한 백향목을 뗏목 띄우는 방법으로 운반해서 큰돈을 벌었습니다. 배를 건조할 때 필요한 점성이 강한 역청도 사해에서 생산 판매했습니다. 로도스 섬에서 사양길에 접어든 유리 제조 기술자들을 양질의 원료가 풍부한 시돈, 두로, 베니게에 불러들여 생산 판매했습니다. 대롱불기 신기술도 개발해서 다양한 형태의 유리 제품도 만들어 팔았습니다. 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 껍질을 벗겨, 두루마리를 만들었는데, 헤롯이 파피루스 제조 기술을 도입해서, 폭과 길이가 다양한 크기의 책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동방 상인들이 가지고 온 비단과 각종 귀금속 등을 지중해 전 지역에 팔았습니다.해상무역으로 재력가가 된 헤롯은 로마 정세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현명하게 대처했습니다.

기원전42년, 카이사르 암살주범 카시우스와 그의 처남 브루투스 연합 반군과의 필리피 전투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승리했습니다.파르티아 원정을 하려고 안토니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 있을 때, 헤롯이 찾아가서 용병을 거느릴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했습니다.안토니우스가 용병을 허락하면서, 유대 왕 칭호도 주고, 자신의 참모 니콜라우스에게 따라가서 도와주라고 했습니다.헤롯은 세포리에서 3 천의 용병을 모집한 다음, 갈릴리에서 다윗 왕 후손을 자처하던 에제키아를 죽였습니다. 헤롯은 지중해 연안의 욥바에 있으면서, 용병에게 예루살렘을 포위만 하고 공격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거동이 수상한 자들만 검거하고, 생필품과 희생 제물로 쓸 양이나 염소 반입을 허용했습니다.헤롯은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관용과 포용정책을 쓰면서 적이 투항하도록 기다렸습니다.

안토니우스가 소시우스를 시리아 총독으로 보내면서, 예루살렘을 함락 시켜 헤롯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소시우스는 단숨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헤롯은 43세가 되던 해 7월,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헤롯이 오벨 산과 모리아 산 새 중간 구릉지에 성전 산을 조성한다는 <예루살렘 개발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헤롯의 용병은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의 도시 건설에 동원 된 건설공병 부대였습니다. 가이사라 신항만을 먼저 건설했으며, 예루살렘 성전 산 성벽 축조 공사에 용병부대를 투입했습니다. 석축 공사가 끝나고, 기원전 15년 성전 본당 준공식을 했습니다. 성전 뜰 매립과 평탄 공사는 헤롯 사망 이후, 공사비를 아끼려고 무교절 7일 동안 순례자들 노력 봉사로 바뀌면서, 서기 54년에 가서야 끝이 났습니다.예루살렘 성전 봉헌식을 하려고 준비 중에, 이단의 무리 공격으로 취소했다가 서기62년 봉헌식을 했습니다. 봉헌식이 있고 8년이 지난 서기70년, 예루살렘을 제각각 장악한 젤롯당, 시카리당, 기스칼라의 요한 무리를 사령관 티투스가 소탕하고 로마로 갔습니다. 로마군이 공격할 때, 성전 본당 건물을 차지하고 있던 젤롯당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 휘장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면서 건물이 전소되었습니다.지금까지 파악한 성전 이야기만으로도 유대 역사는 수난 그 자체였고, 사금파리 하나라도 건질 것이 없는 한심한 이야기였습니다.유대인들도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신명기>에 보면, 유대 민족이 애급을 비롯하여 바벨론과 시리아에 의한 핍박은 연단 과정이기 때문에, 이제 곧 성스러운 예루살렘에서 축복 받은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합리적 사상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이사야53장>에 보면, 대속으로 누군가가 죽지 않으면, 고난의 시대는 끝나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 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장> 대속사상과 예수를 최초로 연결시킨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서 제발 죽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나왔습니다. 세례요한은 서기27년, 예수를 메시아로 선포했습니다. 자기 제자를 갈릴리로 보내, 예수제자 행세도 하게 했습니다. 요한이 안티바에게 죽임을 당하니까, 추종 세력이 요단강 나루터 건너 편 베다니에서 감람 산 작은 베다니로 와서, 예수가 예루살렘에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예수는 예루살렘에 와서, 언행을 조심하다가 무심결에 저들의 비밀 아지트 다락방에 간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예수는 아무도 모르게 감람산에 가서 숨으려고 했습니다.베드로가 낌새를 알아차리고,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하면서 끝까지 따라 붙었고, 가롯유다가 숨은 곳을 원로사제 안나스에게 알려주면서, 예수는 베다니 사람들 각본에 따라,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 서푼짜리 오페라 

서기30년 3월14일(유월절), 예수 십자가 사건은 인류 문명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가미한 막장 드라마였고, 복잡하게 꼬인 인물과 현실상으로는 말이 될 수 없는 상황 설정 등 매우 자극적인 장면이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서푼짜리 오페라였습니다.20세기 서양연극사의 거장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대표작! <서푼짜리 오페라>.도둑, 거지, 창녀, 등 하층 인간과 귀족, 경찰 고위 간부가 출연진으로 나옵니다. 노상 강도단 두목 매키스는 런던의 구걸사업을 독점하고 있는 <거지들의 친구>라는 회사 사장 피첨 외동딸 폴리를 꾀어내 몰래 결혼합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피첨이 경악합니다. 매키스는 사업상 적수일 뿐만 아니라 딸 폴리는 자신의 노후대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독점 자본주의 특성을 가진 사업가 피첨과 직원을 거느린 갱단의 두목 매키스의 대결구도는 성전 금고에서 일정 금액을 배당 받아 자선사업을 하던 바리새파 랍비들과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따라다니던 나사렛 예수와 외형적 유사성이 있습니다. 피첨과 부인이 딸 폴리에게 - 매키스와 이혼을 강요하지만,

"그는 수입이 좋아요. 그는 날 먹여 살릴 만하죠. 그는 뛰어난 가택 침입자며, 앞을 보는 안목이 있고 노련한 노상강도예요. 그의 저축이 지금까지만 해도 벌써 얼마나 되는지 나는 정확히 알아요." 하면서 거절합니다. 이혼을 강요했다가 실패한 피첨과 피첨 부인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합니다.

"만약, 그자가 교수형에 처해진다면 … "

"교수형이라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 그거 좋은 생각인데."

"알겠어요. 보안관에게 고발하는 거죠."

"물론이지. 그렇게 되면 우리는 공짜로 그를 교수형에 처하는 거야 … 일석이조야.”매키는 사창가에 있다가 창녀 제니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질 운명이지만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브레히트는 독점자본가 피첨의 계획과 정반대 결론으로 <서푼짜리 오페라>를 장식합니다.   갑자기 합창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누가 오는지 귀를 기울여 보라! 국왕의 말 탄 사자가 온다!"매키는 대관식을 기념한 여왕의 선처로 사면됩니다. 매키가 말합니다. "구원되었다. 구원되었다! 고통이 극도에 달하면 구원도 멀지 않음을 알았지."폴리도 기뻐합니다. "구원되었어. 나의 사랑 매키가 구원 받았어.난 정말 행복 해." 교수형이 취소되니까 피침이 관객을 향해서 말합니다.

"존경하는 관객 여러분! 이제 여기까지 왔군요. 여러분은 오페라에서 나마 - 자비가 법에 앞선다는 것을 보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십자가> 서푼짜리 오페라는 요단강에서 시작됩니다. 요단강 나루터 건너편 베다니에서 활동하던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가깝기 가 한 오리 쯤 되는 작은 베다니까지 진출했습니다. 작은 베다니는 전초기지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시가지에 거점 본부를 확보하려고 비밀 아지트 다락방까지 만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다락방은 예수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핵심 키워드입니다.인터넷 검색 창에 다락방을 입력하면 정확도가 높은 카테고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다락방에 가지 않았다면 감람산에 숨을 일이 없었을 것이고, 안나스가 제자들에 대해서 묻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를 이용해서 경각심을 높이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십자가 처형이 있고 나서 50여 일이 지나 다음 - 오순절 다락방 모임도 베다니 사람들 숙원 사업이었던 예루살렘 시가지 거점 확보 자축 행사였습니다. 안나스는 이단자들 예루살렘 진출을 막으려고, 예수를 가야바에게 보내, 경각심을 높이려다 가 십자가 처형을 초래했기 때문에 더 이상 사건 확대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다니 사람들이 다락방 집회를 할 때도 모르는 척 했습니다. 그 틈을 타서 베다니 사람들은 소란을 피우면서 자축 행사를 했습니다.

오순절 이야기는 베드로를 비롯하여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과 관련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가 안나스로 부터 심문을 받고 있을 때, 베드로는 멀찍이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비자들이 "당신도 예수와 함께 있었다." 말하니까 - 맹세하고 저주하며, 자기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부인하고는 꽁무니가 빠지도록 도망을 갔습니다.

이처럼 예수를 저주하면서 배신한 베드로와 - 뿔뿔이 도망간 제자들이 다시 다락방에 모여 집회를 주도했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부활한 예수가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갔다는 요한복음 21장 이야기도 터무니없는 거짓말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는 예수의 행적을 역사적인 순서에 따라 서술한 것이고, 요한복음은 신학 체계에 따라 쓰인 것으로 - 신학서적 특징을 최대한 드러내려고, 사족처럼 거짓말을 덧붙였습니다.

오순절 행사는 베다니 사람들 숙원사업이었던 예루살렘 시가지 거점 확보 자축행사였기 때문에 - 사도행전 12제자는 사복음서 캐릭터를 공유한 생판 다른 사람들 이야기였습니다.

고장 난 거짓말은 계속됩니다.   

  • 22-12-28 원정
    성경을 글짜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