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서는 고장난 거짓말(1)
서기30년 3월14일(유월절)의 예수 십자가 사건은 인류 문명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가미한 막장 드라마였습니다. 초강력 반문명적, 반인륜적 범죄였습니다. 지중해 절대 강자였던 로마는 문명의 선각자 카이사르와 같은 현명한 통치자를 암살한 다음부터 퇴행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역사의 분기점에서 도약의 기회를 잃고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인들은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로가 멱살을 잡고 주먹질 하는 한심한 짓을 했습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 암살 이후, 퇴행의 여파가 유대 속주에까지 미치면서 서기30년 예루살렘의 예수 십자가 사건으로 비화되었습니다. 예수 십자가 사건은 복잡하게 꼬인 인물과 현실상으로는 말이 될 수 없는 상황 설정 등 매우 자극적인 장면이 드러난 막장 드라마였습니다. 예수는 무심결에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 다락방에 갔습니다. 그것이 비극의 단초였습니다. 다락방은 이단자들 비밀아지트였습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예수는 급히 감람산에 가서 숨었습니다. 다락방에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예수는 현행범으로 체포될 수 있었습니다. 다락방 출입은 어디까지나 치안 유지 차원에서의 일탈 행위였습니다. 가롯유다가 원로사제 안나스에게 고발하지 않았다면 -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는 경미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를 심문하게 된 안나스가 두 가지를 물었습니다.
"너의 제자들과 너의 교훈에 대하여 말하라."
예수는 회당과 성전에서도 은밀한 것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결백을 주장하면서도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 가게 된 경위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 대해서 함구하는 예수를 보면서 - 원로사제 안나스가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 벌을 주라고 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던 가야바가 안나스를 찾아가서, 며칠 전부터 유심히 봤는데 죄가 없더라고 말했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다락방에 갔다가 감람산에 숨어 있는 걸 잡아왔네. 그래도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모르고 갔을 겁니다. 죄가 있었으면, 경비대장 요나단이 현행범으로 체포했습니다.” -
“제자들이 이단자들과 내통하고 있는 게 분명하네.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하게.”
안나스는 예수를 희생시켜서라도 경각심을 높이려고 했습니다. 이처럼 안나스와 가아바가 예수 문제로 다투고 있는 사이에 - 당신들 말고도 죄를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면서 고발의 무리가 예수를 빌라도가 있는 안토니요새의 총독 관저로 갔습니다. 빌라도에게 가서는 예수가 인두세를 내지 말자고 선동했다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말에 속을 총독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지역 사람인가 묻고, - 마침, 헤롯궁전에 와 있는 안티바에게 가라고 했습니다. 안티바는 갈릴리 지역 세금청부업자였습니다. 예수가 인두세를 내지 말라고 선동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 안티바에게 가서는 죄명이 바뀌었습니다. -
"이 자가, 유대 왕을 사칭했습니다." -
예수를 이미 알고 있었던 안티바가 그 말에 속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허허허, 존재하지도 않는 유대 왕을 사칭했다면, 그것은 로마 황제를 능멸하는 것일세. 다른 데 가서 알아보게." -
이렇게 말하고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때가 오전10시 무렵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총독을 찾아갔을 때, 예수는 유대 왕을 사칭한 자로 죄명이 바뀌었습니다. 인두세 반대에서 왕을 사칭한 자로 죄명이 바뀌었는데도 총독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가벼운 매질을 하고, 방면하면 된다고 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왕을 사칭한 자를 풀어주면, 당신은 카이사르 충신이 아니라면서 누군가가 억지소리를 했습니다. -
화가 난 총독이 수감 중인 흉악범 바라바를 방면하겠다면서 엄포성 발언을 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렇게 하라면서 되레 큰소리쳤습니다.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총독이 흉악범을 방면했습니다. 백성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총독으로써는 신중하지 못한 처사였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약점을 잡았다고 판단한 무리 중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 -
"왕을 사칭한 자를 십자가에 매달아야 합니다."
이때부터 광기와 집단 히스테리가 발동하면서 십자가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습니다. 축제 기간 중에 민란이 발생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총독은 마지못해 십자가형을 지시하고, 하인이 떠온 물에 손을 씻으면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나는 무관하니 너희가 당하라.”
기고만장해진 누군가가 우리와 우리 자손이 책임진다고 소리쳤습니다. 엄포를 놓으려다가 감정싸움으로 비화된 사건에 대해서 총독은 자괴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자주색 외투를 벗어서 예수 어깨에 걸쳐주면서 말했습니다.
“이 시간 이후, 너는 내가 인정하는 유대 왕이다. 당당한 모습으로 저들에게 가거라.”
왕의 행차에 시종이 따라야 한다면서, 두 명의 죄수를 함께 십자가에 매달게 했습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서, - 나사렛 사람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팻말을 십자가 형틀 위에 매달게 했습니다. 사악한 유대인들을 싸잡아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들려고 작심을 했습니다. 십자가 판결은 오전11시경 났습니다.
예수는 골고다 언덕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고통스러워 하다가 오후3시경 숨을 거두었습니다. 오후4시경, 안토니요새에서 대민업무를 보는 아리마대 요셉과 랍비 니고데모가 총독에게 예수 시신을 달라고 했습니다. 무고한 사람에게 십자가 처형을 지시한 총독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백인대장에게 사망을 확인한 다음 시신을 주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갈대로 엮은 들것에 시신을 놓고 매장하는 전통 장례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요셉과 니고데모는 시신을 가져가서 동굴무덤에 방치했습니다. -
왜, 두 사람이 이와 같은 사악한 짓을 했을까요? 총독 고발의 구실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백성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총독이 흉악범 바라바를 방면한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신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 죽은 자가 부활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게 하면, 고발의 사유를 하나 더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굴무덤 시신 방치에는 또 다른 불순한 음모도 있었습니다.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자아발견과 정신력 무한 신뢰>를 말한 예수를 부활한 메시아 허망지설 중심에 들게 해서 -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게 하려는, 물 타기 계획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 무렵, 카프리 섬에 있으면서 예루살렘을 손바닥 드려다 보듯 하던 티베리우스 황제가 원로원에 <총독임기 중 공소유예 특별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빌라도를 당장 고발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랍비들은 선동하면서 사회불안 조성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가 서기85~90년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사도행전에 보면, 사복음서 12제자 캐릭터를 공유한 또 다른 불순분자들이, 사회 불안조성에 적극 동조하고 있었습니다.
* <최후의 만찬>은 바울의 거짓말
나이가 들수록, 주위를 보면 볼수록 엉망이란 기분이 든단 말이야 뭔가가 좀 아니란 생각이 들어 - 전쟁, 질병, 죽음, 파괴, 기아, 오물, 가난, 고문, 범죄 부정부패, 등등 역사는 진정 정신문화의 종말을 고하고 물질문명의 흥성만 도모하는가?아무나 붙잡고 묻고 싶은 거야. 참, - 혹부리영감 얘기가 생각나는 군.
목에 혹이 달린 영감이 나무를 하러 산에 갔지 날이 저물어 토굴에서 하룻밤 쉬고 있는데 심심해서 노래를 불렀어. 쿵짝 쿵짝 쿵짜작 쿵짝 ~ 도깨비들이 노래를 듣고 몰려 온 거야. 노래에 감동한 도깨비 두목이
"그 고운 노랫소리가 어디에서 나는 거요?" 물었고,
노인은 농담 삼아 "목에 달린 혹에서 나오는 것이오.“ 웃으면서 말했지. 이건 진짜, 진짜 - 농담이었어. 혹이 욕심난 도깨비가 금은보화를 던져 주고 혹을 떼어 갔지, 노인은 혹도 떼고 도깨비가 준 금은보화로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모두가 소망하는 해피엔딩이었어. 인류는 원시에서 문명으로, 빈곤에서 풍요로움으로, 지상에서 우주로 삶의 터전을 넓혀나가고 있는 중이야. 문명은 열린 세상이고, 당연히 가야할 길이고. 목표가 분명한 정식코스라네.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인류는 문명의 씨앗으로 존재하는 거야.
도깨비들이 욕심 낸 고운 목소리는 태생적 창조정신과 자력갱생의 정신력에서 나오는 거야. 인류는 탐험가이자, 발명가이자, 변화의 설계자이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건축가야. 인류는 아깝게 놓친 기회와, 감수했던 모든 위험과, 맞닥뜨려야 했던 모든 도전이, 인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뿐이야. 내 말이 맞으면 춤을 추자고. 쿵짝 쿵짝 쿵짜작 쿵짝 ~
혹 떼고 부자가 된 이야기 듣고 찾아 온 또 다른 혹부리영감이 있었지. 노래도 못 부르는 주제에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림인데다가 도깨비들이 욕심 낼만한 고운 목소리는 애초부터 없었던 거야. 도깨비를 만난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토굴로 달려간 혹부리영감이 노래를 불렀지. 생판 음치 주제에 노래를 하니까 춤을 추지 않고 나타난 도깨비 두목이 물었어.
"당신 노랫소리가 어디서 나는 거요?"
노인이 혹을 가리키면서 여기서 나온다고 거짓말을 했어. 두목이 화를 내면서,
“어떤 영감이 거짓말을 하더니 너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혹을 던지고 가버렸어.
졸지에 쌍 혹부리영감 신세가 된 이야기는 종교가 급성장한 사연과 판박이 닮은꼴이야. 문명 이전의 인류는 샤머니즘 분위기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지. 샤머니즘은 원시 종교니까 다신교ㆍ불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 쌍 혹부리영감들과 우리가 동거 중이라는 말씀이야. 인류는 원시에서 문명을 향해 가는 중이고, 문명세계는 인류가 당연히 가야할 열린 길, 광대한 우주 공간을 자유롭게 탐험할 수 있는 첨단 기술은 <시대의 표적>인 거야
<시대의 표적>을 말한 이가 있었지.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날씨가 궂겠다! 천기는 분별하면서 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이렇게 탄식한 예수는 문명세계에 동참하라는 말도 했어.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동무를 불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않는다고 말했어. 예수는 열두 살 무렵, 예루살렘에 가서 선생들 중에 앉아 듣고, 묻기도 하니까 듣는 자들이 아이의 지혜에 놀랐으며 예수가 자라면서 지혜가 더해져서 산상수훈으로 천국의 비밀 - 문명세계를 말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던 거야. 예수가 말한 천국은 문명세계의 비유적 표현이었어. 자연을 관찰하면서 통찰력을 키운 예수는 겨자씨 속에도 생존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문명세계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선각자가 된 거야.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천국은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 천국은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다.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 천국은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다. 천국은 자기 아들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 천국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천국은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다.
천국 비유 중에서 씨 뿌리는 농부는 단연 압권이었어. 길 가에 떨어진 씨앗은 새들이 와서 먹어버리고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가 없어 말라버리고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면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아버리고 좋은 땅에 떨진 씨앗은 많은 결실을 맺는다. 환경이 좋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대자연이야말로 생명의 인큐베이터가 아닌가. 거기에다가 겨자씨 속에도, 생존에 필요한 모든 정보와 설계도가 들어 있으니 이 세상이야말로 낙원인 셈이지. 이 세상은 정직하고 단순해. 우주의 신비도 베일에 가려졌을 뿐이야. 베일을 벗기고 예리한 관찰과 분석을 통해서 문제점을 찾아내면 정직하고 단순한 그 무언이 있을 뿐이야. 그런데도 종교는 과거에서 미래를 가져오려고 해. 그것이 종교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지만, 우주 만상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거든 스스로 존재하는 거야.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건 물질이고, 생명은 산야에서 피어나는 군영과 같은 거야.
예수가 문명에 대해서 말할 때, 바리새파 랍비들은 많은 자선이 평화를 가져온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처럼 말장난에 불과한 현학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잠언인 양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고, 예수를 볼 때마다 랍비들은 선험적 열등의식에 빠지곤 했던 거지 예수가 말한 <거듭남>은 <대오 각성>과 <자아 발견>이였고, 니고데모는 의미를 알고 있으면서도 늙은이가 어떻게 두 번 모태에 들어갔다가 출생할 수 있느냐면서 음충맞게 능청을 떨다가 마침내 기회를 잡았지 무심코 이단의 무리 비밀 아지트 다락방에 갔다가 감람산에 숨은 예수를 원로사제 안나스가 희생시켜서 경각심을 높이려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냈는데 - 가야바가 죄를 주지 않으니까 고발의 무리가 예수를 앞세우고 총독에게 갔다가, 거절당하고, 안티바에게 가서도 죄를 찾지 못하니까 다시 총독에게 갔던 거였어. 유대인들에게 해묵은 감정이 많았던 총독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흉악범 바라바를 방면한 총독은 민란이 두려워서 예수에게 십자가처형을 지시했던 거야. 백성의 안위를 책임진 총독으로서는 귀책사유에 해당되는 것이고 무고한 사람에게 십자가형을 지시한 총독이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 니고데모와 요셉이 예수 시신을 매장할 것처럼 총독을 속이고 동굴무덤에 방치하면서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게 된 거야.
예수 시신 동굴무덤 방치는 총독과 예수를 싸잡아 음해하려는 범죄였으며, 백성의 안위를 책임져야할 총독이 흉악범 바라바를 방면하고, 무고한 예수에게 십자가처형을 지시한 것만으로도 황제에게 고발할 수 있었지만, 예수 시신을 동굴무덤에 방치함으로써 그리스도 부활 허망지설 유포에 기름을 붓는 격이고, 예수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일거양득의 꼼수를 썼던 가였어. 니고데모와 요셉은 시신을 동굴무덤에 넣었다가 곧바로 어딘가에 숨겨놓고 여인들이 나타났을 때 - 마태복음에 보면, 형상이 번개 같고 흰 옷 입은 천사, 마가복음에 보면 흰 옷 입은 청년, 누가복음에 보면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요한복음에 보면 동산지기 같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가 여인들이 나타나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살아났느니라. 그의 누웠던 자리를 보라!” 이따위 거짓말에 속은 여인들이 달려가서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갈릴리로 돌아갔고, 그로부터 50일 지난 오순절, 베다니 사람들이 다시 다락방에 모여 그들의 숙원사업이었던 예루살렘 시가지 거점 확보 성공 자축행사를 했던 거야.
원로사제 안나스는 이단의 무리 베다니 사람들의 예루살렘 진출을 막으려고 예수를 가야바에게 보냈던 것이고, 그때만 하더라도 십자가처형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였어. 무고한 사람에게 십자가처형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세인들로부터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고, 안나스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거였어. 로마제국은 팍스로마나로 태평성대를 누리는 중이라서, 더 이상의 사건 확대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단의 무리가 다락방에 다시 모였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모르는 체 그냥 넘어가려고 했던 거였어. 오순절 사건은 사도행전에만 있는 스토리이고, 거기 등장하는 12제자는 사복음서의 캐릭터를 공유한다른 사람들 이야기라서 우리가 그것을 논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난센스 코미디가 되는 거였어.
그런데다가 서기34년 스데반 사건과 서기35년 이단자 체포 선봉에 나섰던 사울이 40인 랍비 특공대 이탈 사건과 문명의 선각자 예수는 관련이 없는 딴 세상 얘기였어. 그런데도 불구하고, 3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행적이 묘연했던 사울이 바울로 개명을 하고 서기38년 예루살렘에 나타나서는 예수가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주재했다는 근거 없는 말을 유포했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이라는 사람의 지성과 인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거야. 바울은 예수 살아생전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데다가 12제자 명단에 이름도 오르지 못한 제3의 인물이었어.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자기가 다락방에 있을 때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주재하는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고린도전서에 거짓말을 했어.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은 허위사실을 유포했기 때문에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던 거였어. 바울이 <최후의 만찬>으로 - 예수를 신화적으로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으로 만들어 놓으니까, 출처불명, 신원미상의 작가들이 바통을 이어 받으면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신화>에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추가했고, 마태와 누가복음에서는 예수 탄생과 부활에 대한 세부 내용을 윤문했으며, 요한복음으로 - 기독교 신학이 견고해졌기 때문에 - 예수시신 동굴무덤 방치와 -<최후의 만찬>은 거짓말 시대의 주체 - 쌍벽인 셈이야.
* 헤롯왕 유아살해는 거짓 -
마태복음2장 <헤롯왕 유아살해>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서기6년, 시리아총독 구례뇨가, 그 당시 29세였던 아겔라오에게 아우구스투스 황제로부터 유대 왕 윤허를 받아오라고 로마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예루살렘 실세들은 사마리아 여인 말타케 소생 아겔라오가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대표단을 먼저 보내, 아겔라오를 귀양 보낼 때 써 먹은 날조 문서 이름만 바꾼 거짓말입니다.자고이래로 강대국 속주로 명맥을 이어 온 유대 역사는 사금파리 하나도 건질 게 없는 한심한 이야기뿐입니다.
서기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유대인들이 작심하고 쏘아올린 거짓말 불꽃놀이가 지중해 밤하늘을 형형색색 물들게 했습니다. 거짓말 불꽃놀이 중심에는 <바울>과 <신원을 알 수 없는 신약성경 작가들> 그리고 <이사야53장>이 있었습니다. 서기70년 예루살렘 멸망과 로마인들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유대 종파분자들이 불나방처럼 춤을 추듯 무모한 객기와 난동을 부리면서 파국을 자초한 일입니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왕조 멸망 직전 정권 다툼이 극심했을 때 하스모니아 사람들이 어부지리로 왕권을 차지한 전력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서기70년 예루살렘 시가지를 제각각 차지한 젤롯당, 시카리당, 기스칼라 요한 무리들도 로마 정세가 뒤숭숭한 분위기를 틈타 정권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서기64년부터 로마 황제 네로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였습니다. 국정도 돌보지 않고 놀기만 하다가 측근들로부터 외면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변방의 사령관들이 황제가 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도전장을 낸 이스파니아 총독 갈바를 - 로마 원로원은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근위대대장을 비롯하여 병사들은 더 이상 황제를 지켜주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겁에 질린 네로가 서기68년 6월9일 로마 인근 은신처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네로가 죽고, 갈바가 로마에 와서 제위에 올랐습니다.
두 번째로 도전장을 낸 사람은 이베리아 반도 중서부에 있는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 오토였습니다. 갈바는 원로원이 자기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 것에 앙심을 품고, 로마에 와서 정적들을 처형한 다음, 73세였던 그는 후계자를 지명할 때, 근위대 병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오토를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지명했다가 제위에 오르고 7개월이 되던 1월15일 오토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세 번째로 도전장을 낸 사람은 도나우 군단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였습니다. 로마제국에서 중요한 방위 사령부는 라인과 도나우 강 일대, 그리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이었습니다. 동부 전선 책임자는 4개 군단을 거느린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였고, 도나우 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3개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서기67년 2월, 베스파시아누스(AD9~79)가 3개 군단을 안디옥에 주둔시키고, 부하 몇 명만 데리고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를 찾아갔습니다. 출신성분이 낮은 베스파시아누스는 젊은 시절,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3인방이었던 나르키소스 눈에 들어 로마군 지휘관이 되었습니다.브리타니아(영국) 침공에 참가해서, 선봉대장으로 20개가 넘는 도시를 점령했을 때(AD43). 무키아누스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하급 장교였습니다. 무키아누스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 받게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60세였고, 50대 후반의 무키아누스, 그리고 아들 티투스는 30세였습니다. 갈바와 한 번 겨루어 볼만한 위치에 있었습니다.그러나 내전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황제가 되려던 생각을 접고, 서기69년 겨울 - 티투스를 축하 사절로 보냈습니다. 티투스가 로마로 가던 중, 코린트에서 갈바가 오토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리아로 되돌아갔습니다.
네 번째 도전자는 비텔리우스(57세)였습니다. 부친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후광으로 막강한 지지 세력을 확보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로마로 오니까, 오토(37세)가 부하들을 보내 싸우게 했습니다. 알프스산맥 남쪽 롬바르디아 평원에서 싸우고 있을 때, 전세가 불리하다는 보고를 받고, 오토는 4월16일 자살했습니다. 제위에 오르고 3개월만의 일이었습니다. 원로원이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그런데도 두어 달이 지난 6월 말경에야 수도 로마에 왔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 눈치를 보다가 조용하니까 안심하고 로마에 와서 제위에 올랐습니다.
비텔리우스는 날마다 파티를 열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네로 때문에 파탄 난 황실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황제 옹립의 일등공신이었던 카이키나 불신을 사게 되면서, 비텔리우스를 따르던 장병들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정세를 주시하던 티투스와 무키아누스가 서기69년 7월1일,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이미 추대한 바 있었고, 베스파시아누스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가 있었습니다. 무키아누스가 비텔리우스와 싸우려고 안디옥의 3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향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평원에서 10월24일, 전투가 벌어졌을 때 비텔리우스 쪽 병사들이 투항하거나 도망가는 바람에 싱겁게 끝났습니다.
이때, 훗날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근위대장이 된 유대인 알렉산더와 요세푸스, 그리고 또 다른 유대인들도 참전했습니다. 로마에 있던 비텔리우스는 전세가 불리하자, 제위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근위대와 로마시민이 황궁으로 몰려가서 황제를 결박하고 거리로 끌고 다니면서 조롱하다가 살해하고, 시신을 테베레 강에 버렸습니다.
12월21일,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베스파시아누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그런데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에서 오지 않고 열 달이 지난 서기70년 10월에 로마에 왔습니다. 그 열 달 동안, 무키아누스는 수도 로마의 치안을 안정시키면서, 이탈리아 북부 갈리아 주민들이 입은 피해를 원로원 의원들 돈으로 보상하게 했습니다. 그곳 비텔리우스 지지 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무키아누스는 신분이 낮은 베스파시아누스의 권력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원로원을 소집하고, <황제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처럼 내란을 진압하고 갈리아 반란을 사전에 차단한 무키아누스는 자신의 전과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에 있으면서, 바닥난 황실 재정 복구에 주력했습니다. 그곳 황실 소유 토지 일부를 팔고, 유대와 그리스 부자들 협조를 구했습니다. 이때 유대인 필로와 황실 농장 책임자였던 알렉산더 부친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처럼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에 있으면서 재정 확보에 주력하는 동안, 티투스는 강대국 파르티아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티투스는 클라우디우스 생전에 유대 왕 칭호를 받은 아그림바2세와도 각별한 사이었습니다. 그의 여동생 버니게와는 연인 사이었습니다. 서기68년, 네로 황제가 자살하기 이전부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덩달아 소요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서기37년 제위에 오른 칼리굴라는 예루살렘에 총독을 보내면서 헤롯의 손자 아그립바에게도 유대 왕 칭호를 주고, 빌립이 죽고 공석 중이 유대 북부지역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아그립바는 빌립의 땅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있다가 서기41년 1월, 칼리굴라가 근위대장에게 죽임을 당하고 제위에 오른 클라우디우스로부터 명실상부한 유대 왕 칭호를 받았습니다. 51세가 돼서야 소원을 성취하게 된 아그립바는 예루살렘에 지지 세력과 호위무사가 없는데도, 대관식을 하겠다고 서둘렀습니다.
아그립바가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사제들이 협조를 하는 척 하면서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대제사장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야 백성의 환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아그립바는 서기41년 유월절 대관식장에서 대제사장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요란스럽게 치장한 예복을 입고 나타난 대제사장이 히브리어로 된 두루마리 <신명기17장>을 주면서 읽으라고 했습니다. 아그립바가 더듬더듬 읽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위에 왕을 세우리라는 뜻이 나거든 반드시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
아그립바는 이두메 출신 헤롯의 직계라서 왕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우~우 하면서 야유를 보냈습니다. 아그립바가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을 때, 바리새파 최고 지도자 가말리엘이 무대에 뛰어올라가, 아그립바를 부둥켜안고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아그립바! 당신은 우리의 형제요. 아무렴! 우리의 형제이지.”
그렇게 말한 다음, 호위무사를 자청했습니다. 그 후, 바리새인들은 아그립바를 돕는 척 하면서 국정을 좌지우지 했습니다. 국법을 바리새파 율법으로 바꾸고, 국명도 바꾸기까지 했습니다.아그립바는 대관식이 있고, 3년이 지난 서기44년 8월1일, 클라우디우스 황제 생일 축하 행사로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다가 누군가가 건네 준 독극물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기사가 사도행전 12장에 있습니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서기54년 성전 봉헌식을 하려다가 성전 무용론을 주장하는 폭도들 공격으로 취소된 일이 있었고, 서기66년, 성전경비대장 엘루아살을 비롯하여 젊은 사제들이 매일 조석으로 행하던 황제를 위한 제사를 중단시켰습니다. 이 제사는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독수기 깃발이나 석상 대신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시온산 중턱, 하스몬 궁궐에서 번제단을 감시하던 헤롯의 증손녀 버니게가 이 사실을 빌립의 땅에 있던 아그립바2세에게 알렸습니다. 아그립바2세가 달려와서 제사를 중단하면 황제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고,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계속하라고 말했지만 엘루아살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두세 문제로 말썽을 피운 무리도 있었습니다. 인두세는 야훼께 드리는 십일조를 황제가 도적질 하는 행위라면서 단도(시카리)를 숨기고 다니는 시카리당이 위협을 가하곤 했습니다. 시카리당 협박이 무서워서 인두세 징수업자들이 경합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인두세는 세금청부업자들이 경합을 벌여 견적서를 제출하고, 낙찰자는 전액을 총독에게 선납한 다음 세리들이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거두어들였습니다. 거금을 선납하고, 푼돈을 모아들이는 방식이라서, 속주마다 세금청부업자에게 뒷돈을 대주는 사채업자들도 있었습니다.경합에 나서는 세금청부업자가 없어서 인두세를 징수할 수 없게 되니까, 서기64년 폴로루스(AD64~66)총독이 산헤드린 의원들에게 대납을 요구하고, 성전금고에서 17달란트를 가져갔습니다. 총독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서 대납한 의원들은 원성을 사지 않으려고, 총독이 빼앗아갔다고 둘러대니까, 총독 복장을 한 거지광대가 시가지를 돌아다니면서 총독을 조롱했습니다. 화가 난 총독이 안토니요새 병력을 가이사라로 철수 시키고, 시리아 총독에게 자진 귀국을 통보한 다음, 로마로 가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예루살렘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두세 거부를 용납할 수 없었던 시리아 총독 갈루스가 10월 중순경(AD66)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 전염병 괴질로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빌립의 땅에 있던 아그립바2세가 달려가서 자기가 책임지고 예루살렘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말하니까 갈루스는 시리아로 되돌아갔습니다.
서기67년 1월 갈루스가 죽고, 수석 참모였던 무키아누스가 시리아 총독과 로마 군단 지휘권을 계승했습니다. 2월, 베스파시아누스가 시리아에 왔기 때문에 무키아누스는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지역 소요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아그립바의 호위무사를 자청했던 바리새인들이 젊은 사제로 구성된 젤롯당과의 투쟁에서 패하고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요하난 아들 자카이는 야브네로 갔고, 요세푸스는 갈릴리지역 요타파타에 있으면서 로마 정세를 관망하다가 베스파시아누스를 찾아가서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경비대장 엘루아살과 대제사장 맛디아스가 싸우고 있었습니다. 성전을 장악한 엘루아살이 갈릴리 지역 기스칼라 요한 무리를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요한은 개선장군처럼 위세를 떨었습니다. 성전도 제집 드나들듯 하려고 했습니다. 그 꼴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엘루아살이, 요한을 불러들인 것을 후해하면서 성전 출입을 못하게 청동으로 된 니카노르 문을 안에서 잠갔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기가 갇힌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하 통로가 있어서 생활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대제사장 맛디아스도 세 아들을 마사다 요새에 보내, 시카리당 시몬을 오라고 했습니다. 시몬도 예루살렘에 와서, 개선장군처럼 행세를 하면서, 시가지에 철공소를 차려 놓고 칼과 창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예루살렘은 말썽스러운 패거리들이 나누어 가진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엘루아살은 사제의 뜰과 본당 건물을, 기스칼라 요한은 안토니요새와 오벨산 지역을, 시카리당 시몬은 시온 산과 시가지를 차지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에 가서 제위에 오른 다음, 티투스가 로마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그립바2세가 티투스를 찾아가서, 예루살렘 패거리들을 쫓아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8월8일(AD70), 티투스가 예루살렘에 도착하니까, 대제사장 맛디아스가 성 안에 있는 세 아들이 시카리당 시몬과 함께 젤롯당과 기스칼라 요한을 물리치기 위한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다면서 기다려 달라고 말했습니다. 맛디아스 말이 무색하게, 시몬이 맛디아스의 세 아들을 성벽 위에 세우고 소리쳤습니다.
“맛디아스! 사악한 로마의 개들에게 자식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해 보거라.”
그러면서 한 사람씩 성벽 밑으로 떨어트려 죽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티투스가 공격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투석기에서 쏘아올린 돌이 성안으로 날라들었습니다. 공격이 시작되니까 지레 겁을 먹은 엘루아살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 휘장에 불을 지르고, 지하통로를 따라 예루살렘을 빠져 나갔습니다. 본당과 부속건물이 화염에 휩싸이면서 예루살렘 성전은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기스칼라 요한과 시카리당 시몬 패거리는 변변한 무기도 없는 오합지절이었습니다. 시몬은 죽임을 당했고, 기스칼라 요한은 티투스가 노예로 삼으려고 로마로 데리고 갔습니다. 로마군 투포환에 미천한 농부의 아들 예수도 맞아 죽었습니다. 미천한 농부의 아들 예수는 서기62년 성전봉헌식 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화 있을 진저, 예루살렘아! 동쪽에서 들려오는 한 목소리, 서쪽에서 들려오는 한 목소리, 사방에서 들려오는 한 목소리가 있으니 이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대적하는 소리요, 신랑과 신부를 대적하는 소리요, 온 백성을 대적하는 목소리니라.”
사람들은 봉헌식 준비를 하다가 폭도들에 의하여 행사가 취소된 서기54년 사건을 떠올렸습니다. 종파분자들 자중지란으로 유대가 멸망한다는 경고성 메시지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되풀이 하니까, 화가 난 사람들이 산헤드린에 고발했습니다. 산헤드린 법정에서도 똑 같은 말을 하니까 알비누스 총독에게 고발했습니다. 총독은 미치광이 취급하면서 방면했습니다.
서기70년 로마군 투포환이 쏟아지는 가운데 예수가 이것보란 듯이 춤을 추면서 “화 있을 진저” 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와 『유대 고대사』에서 발췌하여 엮은 겁니다. 요세푸스는 서기75년부터 팔레스타인 지방 사투리 아람어로 『유대전쟁사』를 쓰기 시작해서, 42세가 되던 서기79년에 완성했습니다. 라틴어로 쓴 『유대고대사』는 서기93년에 완성했습니다. 요세푸스가 전하는 자료는 유일무이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의 기록이 보존되지 않았다면 유대교와 기독교 태동기에 대한 정보는 모호한 채로 남을 뻔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사두개파, 바리새파, 엣세네파, 열심당 - 4대 종파의 관점도 요세푸스가 차별화 했습니다. 사두개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무관심, 엣세네파는 묵시적 도래, 바리새파는 율법 준수를 통한 촉진, 젤롯당은 항쟁과 쟁취였습니다. 요세푸스는 엣세네파 관점을 가장 이상적인 것처럼 묘사하면서도 나사렛 예수를 어디에도 연관시키지 않았습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면 - 그것은 새로운 대안, 문명세계였다고 봐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이천여 년 전 사람들에게 미래는 -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 종교적 불경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가 말한 <시대의 표적>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시대를 예견하는 혜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서 미래를 가져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시대의 표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요세푸스는 서기70년 이후 로마에 정착했으며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가문에서 사용하는 플라비우스 명칭을 얻어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로 개명도 했습니다. 황제 후견인의 영광도 누렸습니다. 로마시민권과 연금, 그리고 토지 등을 하사받고 노후를 편안하게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 전쟁사』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각종 전투 용어와 과장된 표현 일색입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가다라에 입성하자마자, 모든 젊은이들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고 모조리 학살하였다. 로마인들은 유대국에 원한을 품고 있었고 특히 칼루스(케스티우스)의 참패로 인한 적개심이 불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연령에 관계없이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이 정도면 웃어넘길 수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만 의지해서 수를 세면, 100만 이상의 유대인들이 서기70년 유대 전쟁에서 희생되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요세푸스도 지중해 밤하늘을 수놓은 거짓말 불꽃놀이에 한 몫을 했다고 봐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