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 에드워드 글레이저는『도시의 승리』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도시> 라고 단언한 바 있습니다. 수레바퀴, 화약, 금속활자와 같은 발명이 문명 발전을 가능케 했지만, 그 모든 기적이 펼쳐지게 된 바탕에는 <도시>라는 종합적 플랫폼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글레이저와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또 있습니다. 티투스 리비우스가 쓴 역사서 『도시의 건설로부터』 에 보면, “역사 연구는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약이다.”
이처럼 역사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면서도, 기원전 9년까지만 쓰고 더 이상 쓰지 않았습니다. 서기14년 아우구스투스 사망 이후 3년이나 더 생존했으면서도 황제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로마인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신화, <트로이 장군 아에네이스가 이탈리아에 도착해서 로마를 건국했다.>는 허황된 이야기를 자신의 역사서에 포함시키라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건국 신화를 1장에 넣으면, 『도시의 건설로부터』는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황제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서 서두에 신화를 넣었습니다. 그런 다음, 생뚱맞은 내용을 9장에 넣어 불필요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만약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탈리아로 쳐들어와서 로마와 싸웠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도시의 건설에 앞서 일어난 전설들, 또는 그것이 건설된 것은 역사가의 확실한 기록보다 시인의 창조로 꾸며지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자신의 역사서를 한낱 허구(虛構)로 만들게 한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시인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비아냥거렸습니다.
문명 시대 여명기에 살았던 로마인들은 도로, 항만, 수로, 건축 등 인프라 확충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습니다.
인프라 이야기에 앞서, 리비우스와 스티브 잡스의 공통된 견해를 알아보겠습니다.
* 『도시의 건설로부터』 서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세계를 지배하게 된 로마인들을 부각시키고 로마를 위대하게 만든 훌륭한 집정관들과 민중을 선동하면서 내란을 부추긴 별 볼일 없었던 호민관들을 구분하면서 로마의 장래를 위해 누가 더 옳았는지 드러내려고 글을 썼다.”
* 스티브 잡스. “창의력이란 건 … 그저 사물을 연결하는 것이다. 창의적인 사람들에게 그걸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곤혹스러워 한다. 사실 그들이 한 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뭔가를 찾아냈을 뿐이다.”
* 리비우스와 아이작 뉴턴 견해도 유사성이 있습니다.
“역사 연구는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약이다. 왜냐하면, 역사서는 모든 사람이 뚜렷이 볼 수 있는 무한히 다양한 인간 경험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런 기록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나라를 위한 모범적 사례와 경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좋은 일들은 모범으로 삼고 철저히 부패한 지저분한 일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피해야 할 것이다.”
* 아이작 뉴턴“내가 남들보다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 서 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기원전3세기부터 서기2세기까지 500년간에 걸쳐 간선도로만 8만 킬로미터, 지선도로까지 합하면 15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로마가도를 건설했습니다. 로마인들은 도로를 네트워크화 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했습니다. 도로를 네트워크화 하면 그 기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병사들은 전쟁을 수행하지 않을 때 도로를 개설했습니다. 로마군이 주둔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지역 특성에 맞게 도로를 개설하고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병사들은 급료를 받는 용병이라서 싸우지 않을 때, 자진해서 토목공사에 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도로와 시설물에는 자신들 사령관 이름을 붙이는 게 관례였습니다. 로마에서 아스콜리까지의 살라리아 국도, 로마에서 카푸아까지의 아피아 국도, 발레리아 국도, 클로디아 국도, … 이런 식의 도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8개 군단이 주둔한 라인 강 방위 사령부, 3개 군단의 도나우 강 방위 사령부, 4개 군단의 극동지역 사령부, 3개 군단의 이스파니아 사령부, 2개 군단의 이집트 사령부, 아프리카에도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거미줄처럼 도로가 깔려 있었습니다.
도로에는 말 탄 병사가 반나절이면 닿을 수 있는 구간마다 역참이 있었습니다. 역참에는 여관, 상점, 마구간과 말을 대여하는 업자와 마차를 수리하는 대장간도 있었습니다. 도로망이 잘 갖추어 있어서 걸어서 한 달이나 걸리는 곳이라도 2~3일이면 소포와 우편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화물 운송업자와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 역마차도 있었습니다. 운송업자는 통행료를 지불했습니다. 마차에 실린 짐의 크기와 무계에 따라 이용료를 다르게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병사들 급료를 지불했습니다.
역참이 있는 주요도로가 이탈리아반도에 19개가 있었고 역참이 없는 도로에도 민박시설이 있었습니다.
아펜니노산맥의 생수를 수로를 통해서 공급 받아 생활용수로 쓰면서, 공공목욕탕은 로마인들 자랑거리였습니다. 아피나 수로가 최초로 만들어졌습니다. 아니오 수로, 마르키아 수로, 테풀라 수로가 잇달아 건설되었습니다. 측량기술이 발달하면서 마루쿠스 아그립바가 만든 율리아 수로는 아펜니오 산맥의 깊은 계곡의 생수라서, 수로의 길이가 가장 길고 수량이 풍부했으며 물맛이 좋기로 유명했습니다. 비르고 수로, 알시에티나 수로도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수로에 딸린 크고 작은 공공목욕탕이 줄잡아 170개나 되었습니다. 욕탕, 세탁소, 이발소, 수면실, 와인가계, 레스토랑, 체육관도 있었습니다.
상주인구가 백만 명에 육박했지만, 주거 환경과 기반 시설이 완벽한 로마는 도시다운 면모를 제대로 갖추고 있었습니다. 로마 시가지 도로에는 배수로가 별도로 있었습니다. 포장이 잘 된 도로에서는 말발굽 소리와 마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 때문에 낮에는 도성에 마차가 들어 올 수 없었습니다.
아펜니노 산맥의 생수를 공급 받으면서도 저수조가 없었습니다. 고인 물에는 벌레가 생기기 마련이라서 전염병 예방 차원에서 광장마다 분수대가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벽돌과 모르타르를 가지고 3~4층 아파트를 짓고 살았습니다. 석회와 화산재 그리고 물을 일정 비율로 섞으면 모르타르가 됩니다. 그 모르타르로 크기가 똑 같은 벽돌을 만들어서 일렬로 놓고, 위에 모르타르를 놓고, 다시 벽돌 놓기를 반복하면 건고한 벽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벽체의 안과 밖을 다시 모르타르로 바르면서 주상 복합 건물을 지었습니다.
복합건물 1층에는 빵집, 푸줏간, 세탁소, 옷가게가 차지했고 2층에는 병원, 부동산, 사채업자, 용역업체, 심부름센터, 전당포, 변호사 사무실 용도로 쓰였습니다. 3층부터 주거용으로 사용하면서 건물주들은 세입자들로부터 임대료를 받았습니다.
비트루비우스의 『건축 십서』에 보면, “주택은 새나 벌의 둥지를 모방해야 편안한 휴식처가 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견고성과 유용성 그리고 아름다움을 강조한 그 책 3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습니다.
“인체는 비례의 모범이다. 왜냐하면 팔과 다리를 뻗음으로서 완벽한 기하 형태인 정방형과 원에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인체비례도는 아파트와 같은 건물을 지을 때 최소한의 공간 확보를 위한 지침서였습니다.
비트루비우스는 이탈리아의 베로나에서 태어났습니다. 카이사르 휘하 군단 건축기사로 있으면서 막사, 도로, 교량과 같은 공병업무 책임자였고, 그가 쓴 『건축십서』 는 도시계획과 건축일반, 건축재료, 극장, 대중목욕탕, 운하, 항만의 설계를 비롯하여 측량과 건축 시공에 관련된 지식을 망라한 로마 건축 문화의 금자탑이었습니다.
이처럼 도시 건설을 통해서 문명시대 여명기에 접어든 로마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통치자가 필요했습니다. 더 좋은 세상이 도래하기 위해서는 미래를 상상하고 설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때,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카이사르였습니다.
문명세계의 통치자는 인프라에 대한 개념이 명확해야 하고, 실천계획도 세워야 합니다. 카이사르는 로마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려고 했습니다. 도시 문명을 일으킨 로마인들이 선도적 역할을 하지 않으면, 역사적 퇴행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로마인들이 관용과 포용정신을 보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왔습니다.
로마인들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테오도르 몸젠의 『로마사』 는 로마 건국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망까지를 - 역사적 증거물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진행한 실증적이며 객관적인 저작물이라서 19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3권에 보면, “위대한 폼페이우스는 천부적인 군사적 재능으로 스페인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이후에는 동방을 제패했다.” 는 기록이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유일한 창조적 천재” 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
카이사르에 대해서 극찬을 했으면서도 갑자기 몸젠은 『로마사』 를 쓰다가 중단한 이유에 대해서 여러 설이 분분합니다. 몸젠이 깊이 존경했던 영웅이 죽으니까 더 쓸 마음이 안 나서 그만두었다는 설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카이사르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면, 리비우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갑자기 『도시의 건설로부터』를 중단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기원전63년 발생한 <카탈리나 역모 사건>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고금리 사채로 많은 사람들이 빚더미 속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원로원 의원이면서도 어느 시민의 양자로 입적한 카탈리나는 2인1조 집정관 민중회의 쪽에 출마하면서 획기적인 부채 탕감을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원로원의 방해 공작으로 당선에 실패하니까, 쿠데타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누설되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습니다.
토스카나 지방에서 궐기한 민병대가 당선이 확정된 키케로를 죽이려고 한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었습니다. 키케로가 동료 집정관 실라누스로 하여금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하여, 카탈리나를 즉시 처형해야 한다고 먼저 말하게 한 다음, 자신도 카탈리나를 고발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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