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자 바라보기

원형이정(35) 기차 여행4

21-03-02 지나다가 450
원형이정(35) 기차 여행

사람이 신의 존재를 전지전능하다고 믿고 현실 속에서 역사한다고 생각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물론, 바람에 날리는 터럭 한올 조차도 사실은 모두 신의 뜻이라고 판단하는 게 가능해진다. 실제로 이런 사고는 어거스틴과 칼빈의 예정론에서 주제는 다르지만 비슷한 논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앞의 두 전제가 참이라면 예정론은 논리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이것은 비단 기독교만이 아니라 타 종교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 위치한 전통적 사상이나 수행 전통에서도 약하지만 그 흔적이 보이는 일반적 사고의 하나이다. 자유의지를 존중하지만 진정으로 이 사고를 밀고 나가면 결국 운명론과 맥락이 유사해진다.

대학교 1학년이 돼 여름방학을 맞았다. 죽이 잘 맞던 후배 둘과 여행을 계획했다. 멀리 경주까지 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여행 경비가 문제였다. 나는 결국 아버지께 거짓말로 돈을 타냈다. 학과에서 field work을 간다고 했던 것이다.

1974년도였으니 당시는 여행하면 기차여행이었다. 우리가 탈 기차는 서울역에서 부산까지 하루 종일 가는 완행열차였다. 여름방학 때는 서울역에서부터 여행객들(주로 대학생 위주의 젊은이들이다)이 짐짝처럼 꽉 들어차기 일쑤여서 앉아서 가려면 작전을 짜야했다. 개찰하자마자 달리기 하듯 열차를 향해 뛰어야하는데 자칫하면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확률이 있어서 머리를 썼다. 까딱 늦게 뛰어 자리를 못잡는다면 종일 서서 가야만 할 판이다. 우리는 미리 앞 열차 시간의 입장권을 끊어 역내로 들어간 다음 적당히 숨어 있다가 타야 할 열차가 들어온 후 넉넉하게 자리를 잡았다. 개찰 시간이 되자 밀물처럼 뛰어오는 여행객들을 여유있게 바라볼 수 있었고. 당시는 입장권이라는 게 있어서 잠시 열차를 배웅만 하고 다시 나오는 표가 있었다.

열차는 정말이지 사람들로 가득차서 러시아워 때 푸쉬맨이 밀어야 탈 수 있는 요즈음의 지하철처럼 옴짝하기 힘들었다. 우리는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 기분좋게 술을 마셨다.

열차가 천안역에 도착했다. 당시는 천안역에서는 이상하게 오래 정차했다. 시골을 방학 때마다 다닌 나는 천안역에서 우동 한그릇을 먹을 만큼의 시간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날 술도 한잔 먹었겠다 여지없이 우동 생각에 지나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앉은 곳이 중간쯤이어서 짐짝처럼 붙어있는 사람들 틈을 헤집고 나가는 대신 나는 창문을 통해 뛰어내렸다. 평소 가끔 그런 사람들을 보았던 것이다.

여유있게 휴식을 취한 후 열차가 출발해 다시 올라탔는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빈틈없이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때 문제가 발생했다. 술을 먹은데다가 우동까지 한그릇 채웠으니 몸이 강력히 수분의 배출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두 열차가 이어지는 곳에 서있었다. 화장실까지 가기에는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내 옆과 뒤는 사람들로 빈틈없이 꽉 채워져있었고 오직 앞에 두 열차의 틈새가 10센티(?) 정도로 벌어져있었다.

젊음과 술은 무모한 용맹을 갖고 있다는 게 공통점이다. 이 둘이 결합하였으니 아마 시너지 효과도 있을 터였다. 나는 그 틈새로 주요 부위를 이루는 전체를 바짝 밀어넣고 볼일을 보게되었다. 참 오래도 나오는구나라는 생각이 스친 것이 지금도 또렷하다. 시원히 일을 마치고 사람들이 눈치를 못채게 마무리를 한 다음 자연스레 내 오른손을 반쯤 양 열차가 이어져 있는 철제 틈새로 디밀어 한쪽면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손가락에 무슨 느낌이 있어 가만히 쳐다보니 철제 틈새가 서서히 조여져 오고 있었다. 원체 타고난 천성이 느린데다가 순발력이 형광등인 나는 그때까지도 그게 무슨 상황인지 판단을 못했다. 나는 그 틈새가 다시 벌어지겠지라고 생각하며 손가락이 꽉 끼워진 채 점점 조여져 오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가운데 손가락의 통증이 너무 심하다 싶을 때 퍼뜩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힘주어 확 잡아 빼냈다.

그리고나서 가만히 보니 세상에! 그 벌어진 틈새가 서서히 좁아지더니 완전히 붙어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정신이 번쩍났다. 그리고 그 틈새를 관찰해보니 이게 서서히 붙는 것이 아니라 텅~ 텅~ 소리를 내며 급하게 붙었다 떨어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기도 아주 짧았다. 내가 볼일 볼 시간이면 몇번을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했어야 했다. 한참을 보고 있던 나는 열차가 커브길을 돌 때만 서서히 붙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도 내가 볼일 볼 시간 정도의 긴 것이 아니라 극히 짧았다.

내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은 점점 부풀어 올라 평소의 1.5배는 되었다. 약국에 들렀더니 골절은 아니라며 무언가 바르는 약을 주면서 피가 아래 쪽으로 내려가도록 손을 들고 다니라고 하기에 나는 여행다니는 내내 오른손을 들고 다녔다.

여행을 마치고 나는 홀로 시골 큰집을 들러서 왔는데 장형이 후에 아버지에게 나에 대한 보고를 하는 과정에서 내가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탄로나고 말았다. 당시는 전화도 없던터라 아마도 장형이 무언가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낸 것에 내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날 부르시고는 단 한말씀만 하셨다.

"네가 다녀온 일정을 빼지말고 고대로 써라."

나는 여행 내용을 사실대로 적어 내려갔다. 말미에는 어디선가 본 그리이스 벽화에 써 있었다고 했던가(?) '요즘 청소년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대충 이런 문구를 슬쩍 넣어 은근히 아버지의 이해를 나름 희구했다.

아버지는 많지 않은 내글을 읽고 또 읽으셨다. 며칠을 반복해 읽으셨다. 그리고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아버지 입장에선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이 천운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시 언젠가 아버지가 일가 친척과 이야기를 나눌 때 열차 사이에 발이 끼어 절단된 사례가 흔했다는 말이 오간 것을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으니, 아버지는 틀림없이 당시의 열차 상황을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나는 죽을 고비를 몇번 넘겼지만 이 사건은 가장 강력하게 실감이 오래 남는다. 그리고 천안 지나 그렇게 커브가 오래 지속되는 구간에서 그 일이 일어났다는 정말 기적같은 사실에 아찔한 심정이 돼서 가끔 남에게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났을까? 직장에서 가까이 지내게 된 동료와 술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동료는 어쩌다 내가 평소에 쓴 수행기를 보고 마치 선재동자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며 나를 좋아했었다. 나는 그로부터 열차가 그리도 커브를 오랫동안 하게 된 연유를 알 수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천안 지역의 대 부호였는데 당시 열차의 노선이 직선이 되려면 할아버지의 땅을 관통해야만 하지만 할아버지가 무슨 소리냐며 완고히 반대해 할 수 없이 넓은 땅을 빙 둘러서 경부선 열차의 노선이 깔렸다는 것이다.

사람은 살다보면 기적같은 일을 숫하게 겪게 된다. 내가 당시에 종교를 믿었거나 무언가에 의지해 있는 상태였다면 지금처럼 그때 그 사건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기적이 일어나기 무척 힘든 일이라고 얼핏 생각하지만 전지전능한 신이 현실에서 역사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사람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숨쉬는 것 조차 기적이라고 생각되는 이 현실에서, 오히려 기적이 아닌 것을 찾기가 더 힘들 것이다.

나는 삶 자체가 기적이라고 느껴져 감동하고 감사하며 사는 태도와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는 기적이라고 확신하며 사는 태도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본다. 전자가 삶을 대하는 능동적인 태도로 꾸준히 자기 영혼의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면, 후자는 만들어진 틀 안에서 수동적으로 주어진 틀을 강화시키는 모 아니면 도의 상황에 자기 인생을 몰빵하는 셈이다. 따라서 그 틀 밖의 것은 모두가 윷도 아니고 걸도 아니고 개도 아니고 한 통속으로 도로 전락된다.

진리는 스스로 빛을 발해 어둠을 밝힐 지언정 굳이 그림자까지 없애려 하는 의지적 존재가 아니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 21-03-02 원정
    정말로 대단한 에피소드입니다.^^
    " '요즘 청소년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대충 이런 문구를 슬쩍 넣어 은근히 아버지의 이해를 나름 희구했다."
    제 청년시절의 저보다 훨씬 더 고급스럽게 용서를 구하셨군요.^^ 

    절대자에 의지하여 사는 삶이 한 때는 인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요즈음 코로나 정국을 거치면서.....
    이제는 순기능 보다는 역기능이 더 많아진 것도 같습니다.
    이제는 인간들이 절대자를 보내드려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21-03-04 모모
    신성이 참 많이 느껴지는 이야기네요.^^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예수든 부처든 상관없이..
    전 삶의 이야기들이 참 좋습니다.
    오늘 한라봉을 한개 까먹으며..
    이 멋지고 향기로운 귤이 내 입으로 들어오기까지...알수없지만..
    또한 너무 감사하고 ..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삶의 기적중 하나로..한라봉의 색과 향기를 통해 햇빛과 누군가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라니..좀  웃기기도 하지만..
    갑자기 그런 느낌으로 다가와서 웃음이 납니다.^^
  • 21-03-05 모모
    어젯밤 글을 읽다가 갑자기 
    내게 신은 뭐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안에서 이런 대답이 나왔지요.
    "낭만"
    딱.  그 대답이 너무 맘에 듭니다.

    아기에게 애착인형을 하나 안겨주며 키운다고  할때..
    그 아이가  자란후 그 헝겁인형이 갖는 의미를  표현하라고 하면..딱  그렇게  표현할거 같습니다.
    "낭만"
  • 21-03-05 지나다가
    '사람이 신의 존재를 전지전능하다고 믿고 현실 속에서 역사한다고 생각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물론, 바람에 날리는 터럭 한올 조차도 사실은 모두 신의 뜻이라고 판단하는 게 가능해진다. 실제로 이런 사고는 어거스틴과 칼빈의 예정론에서 주제는 다르지만 비슷한 논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앞의 두 전제가 참이라면 예정론은 논리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이것은 비단 기독교만이 아니라 타 종교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 위치한 전통적 사상이나 수행 전통에서도 약하지만 그 흔적이 보이는 일반적 사고의 하나이다. 자유의지를 존중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관점이고 신의 관점에선 모든 것이 신의 의지라고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사고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결국 운명론과 경계가 모호해진다. 운명론이 자칫 염세주의로 빠질 수 있다면 예정론은 완전한 행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는 점에서 차이는 분멍히 있다.'

    서두 부분을 이렇게 수정하려했는데, 이미 댓글이 달린 글은 수정이 안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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