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자 바라보기

죽음19

21-02-15 지나다가 417
모든 종교와 수행은 두려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종극에는 죽음이 있다. 사람은 남의 죽음을 말로 들었을 때 죽음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다. 사람이 남의 죽음을 볼 수 없다면 아마도 자신의 죽음을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타인의 죽음을 보았을 때도 얼마간의 충격은 있겠으나 곧 잊혀진다. 그러나 가장 측근의 사람이 죽고 그 모습을 보았을 때는 죽음을 실감한다.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정서는 공포 내지는 두려움 그리고 허무이다. 붓다가 죽음을 보고 수행의 길을 나섰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생로병사 중에서 죽음은 가장 두려운 존재로 사람에게 다가온다. 인간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추적한다면 길가메쉬의 서사시가 최초이다.

길가메쉬에 대한 이야기는 기원전 21세기 경의 수메르어 판본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야기의 내용은 판본보다 천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 시점부터 오래동안 면면히 전해져 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서사시에는 홍수의 이야기가 존재하는데 구약의 노아의 홍수와 거의 같아 홍수의 이야기가 성경이 유일한 기록인 줄 알았던 사고를 깨뜨린 바 있다. 성경이 기원전 5세기 경에 완성됐고 내용은 기원 전 1500년 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길가메쉬는 내용에 있어 기원 전 30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길가메쉬는 한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당대의 가장 용맹한 존재였으나 자신이 가장 아끼는 엔키두가 죽자 그때 죽음을 실감하고 극심한 공포를 체험한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를 해결하고 영생을 찾기 위해 대장정의 길을 떠난다.

길가메쉬는 천신만고 끝에 영생의 비밀을 알게된다. 그것은 가시덤불과 같은 식물이었고 손이 그 식물에 닿으면 길가메쉬는 다시 젊은이가 될 터였다. 길가메쉬는 그 가시를 손으로 꽉 움켜잡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 그는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가지고 오던 중 우물가에서 살짝 잠이드는 사이 뱀이 이 가시나무를 가져가버린다. 서사시는 이 대목에서 끝난다.

여기서 길가메쉬가 가시나무를 대한 태도에 역사가들은 주목한다. 그는 가시를 움켜쥐었다. 피를 흘리는 고통을 감내하였다. 진리는 달콤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주는 가시같은 것이다. 길가메쉬의 서사시는 진리는 각고의 노력끝에 진통을 겪고 자신의 능동적인 행위로 얻을 수 있다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길가메쉬의 가시나무는 이후 최고의 진리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이 가시는 구약성경으로 넘어가 최초에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 야훼가 불붙은 떨기나무에 나타난다. 떨기나무는 가시덤불이다.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 당시 큰 구원의 신비를 드러냈을 때 가시관을 썼었다. 구원의 상징으로 길가메쉬에 등장하였던 가시가 고통에도 불구하고 움켜잡아야 할 대상이었다면,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함께있는, 또는 예수가 구원의 상징으로 그 가시관을 대신 쓰는 모양새로 나타난다.

진리를 스스로 찾는 것이냐 혹은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냐는 역사를 거듭해오면서 선택의 문제로 계승된다. 바올 이전의 영지주의는 진리는 스스로 찾아야 할 대상이었다. 영지주의는 자신의 의식을 꾸준히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초기 기독교에 대해 세계적인 석학이라고 알려진 피터 캔디와 영성 전문가 티모시 프리그는 그들의 공저인 <웃고 있는 예수>에서 영지는 지식과 같은 정보가 아니고, 이 순간을 탐구해서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 일어나는 깨달음의 상태이며, 의식을 깨어있는 상태로 소생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올은 이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취급했고 예수에 의지해 그를 믿기만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구원종교를 신약으로 확립한다. 오늘날 영지주의의 요소는 카톨릭의 묵상이나 향심기도(관상기도)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물론 개신교에서는 이단으로 취급한다.

스스로 구원을 얻고자하는 노력이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형태로 변화되는 모습은 불교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붓다는 초기불교에서 자신은 스스로 수행을 통해 깨친자로서 마음의 평안을 얻은 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자신이 타인을 도울 수는 없으며 오직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이정표일 뿐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오면 붓다는 신으로 추앙되고 구원자의 상징으로 변한다.

인간이 신적인 존재로 변하는 예는 종교에서는 흔한 일이다. 예수는 애초부터 신이냐 인간이냐가 논란되다가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신으로 결정된다. 이슬람교에서도 마호메트의 사후 후계자 문제로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된 후 시아파의 통치자였던 알리는 지금은 신으로 추앙된다. 그가 반대파로부터 살해당하자 처음에는 성전에 모셔져 추모의 대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언젠가는 부활할 것으로, 현재는 신으로 섬겨져 매년 시아파들이 그를 순례하고 있다.

가시나무로 상징된 죽음의 해결, 또는 진리는 오늘날 여러 형태로 드러난 주장들을 종합했을 때 나는 우리의 의식과 관련있다고 생각한다. 인간 의식의 극치는 자아(자의식)이다. 여기서 자아란 일단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으로 한정한다. 이는 동물에게는 가능치 않은 인간만의 능력이다. 동물은 배울 수는 있지만 능동적으로 가르치지는 못한다. 이는 자아, 즉 자의식이 있어야 가능하다. 동서양의 모든 수행은 인간의 의식을 집중하고 그로인한 통찰에서 오는 정서적 고양을 지향하고 있다.

유교 경전 대학(大學)에는 수양을 위해 이발시공부(已發時工夫)와 미발시공부(未發時工夫)를 안내해 수행의 길잡이로 삼고 있다. 이발시공부는 마음의 움직임에 주목하여 마음의 변화가 시작되는 미세한 기미를 간파하고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며(이때 스스로 판단해 선한 마음이면 행하고 악한 마음이면 금한다), 미발시공부는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상태로서 성성하게 깨어있는 상태를 자각하는 것이다.

영지주의나 불교나 유교에서 행하는 수행의 공통점은 우리의 의식을 현재에 두는 것이다. 뇌는 좌뇌에서 과거와 미래를, 우뇌에서는 현재를 담당한다. 우리가 온갖 망상을 지어내는 좌뇌의 스윗치를 끌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장자는 < 내편>, '양생주'에서 "오관으로 접한 선입관이나 지식으로 알아낸 것들을 중지시킬 때 인체 내에 있는 신(神)이 스스로 움직이기를 원한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현재에 의식을 집중하고 있을 때 우리는 온갖 잡념을 묶어두고 망상에서 벗어나 생각이 없는 순수한 마음이 된다. 이는 사고가 형성되기 전의 어린이의 마음과 유사할 것이다. 나는 경전에서 어린이의 마음이 되라는 진정한 의미가 이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마가 10장 15절)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고통을 감내하며 수행의 길을 갈지, 이미 나를 위해 내 짐을 대신 짊어진 절대 존재에 의지할지는 선택의 문제이다. 죽음에 임박해서 평안할 수 있다는 점에 하등 차이가 없다. 하나의 차이는 전자는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후자는 자신의 믿음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가들이 말하는 길가메쉬의 잃어버린 가시나무에서 망각의 상징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잃어버려도 아쉽지않으면 그것은 망각된다. 길가메쉬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뱀이 가시나무를 가져가버렸으나 그에게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음의 공포도 그는 이제 잊어버린다. 사실 모든 문제가 해결되면 더 이상 그 문제는 나를 힘들게 하지 않고 망각된다. 트라우마는 망각되면 해결된 것이다. 죽음의 망각, 영원한 삶의 망각, 진리의 망각, 신의 망각, 깨달음의 망각이 일어날 때(그러나 애초부터 별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진정 그런 것들이 고통스럽게 다가와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피나는 고통을 감내한 후에 그리고나서 그것이 잊혀질 때) 우리는 그런 대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해방될 수 있다.

좌뇌의 기능인 생각은 프레임이다. 우리가 어느 것을 믿으면 그것은 프레임으로 작동하고 우리는 당시의 사고로는 갇혀진 프레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수행은 프레임을 벗고자하는 노력이기도하다. 수행은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고단하고 좌절하기 쉽다. 반면에 믿음은 비교적 다가가기 쉽다. 때때로 의심을 일으키지만 강화시킬 수록 확신을 주며 세상도 그렇게 변해간다. 이 둘의 접점은 없다. 한쪽에서 다른 쪽을 바라보면 분명 상대는 틀린 것이다. 결국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거기까지만이라도 서로 양보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다.

나는 그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도 성성히 깨어서 죽음을 평안히 맞이할 수 있음에 인간의 가치를 둔다. 존재자체가 인간의 목적이 실현되는 것이 듯, 죽음 또한 목적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21-02-15 원정
    요즈음
    지나다가님을 통하여
    상생의 세상에 진리와 지혜의 물결이 홍수처럼 넘쳐납니다.^^
    참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저도 그 물결에 녹아들고 있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저는 이 문구를 처음 접했을 때 "참으로 독선적인 문구이구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서는
    "돈과 명예나 사람이나, 과거나 미래나 기타 다른 어떠한 인연에도 의지하고 않고 오로지 내 근원에만 의지하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진정한 자유인이 한 말이구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죽음도 우주의 순환의 일부라고 생각하기에 자연스런 현상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제 욕망을 들여다보면, 아직은 즐기고 싶은 일, 풀고 싶은 일, 나누고 싶은 일들이 남아 있어 좀 더 천천히 왔으면 좋겠습니다.^^
  • 21-02-15 지나다가
    모든 생명의 존재는 죽음을 원치 않을거예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21-02-18 모모
    말씀 잘 들었습니다.^^
    너무 좋네요^^
    정토회 에서  법륜스님의 말씀을 듣는거 같아요.^^

    전 개인적으로 어릴때부터 무의식이 안내하고 보여주고 경험시켜주고..
    그 다음 의식적으로 그 경험을 내게 상식적인 설명이 가능하게 하는 의미로 
    책을 읽고 명상을 하고,,  
    그렇게 명상이란걸 하게 된거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의식과 무의식 방편이 다 좋고,,
    그래서  양쪽 모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지나가다 님의 글을 읽으면 제가 생각못하고 지나갔던 것들을 깨우쳐 주는 것들이 많아서  너무 좋습니다.^^
    요즘  지나가다 님의 글을 보려고 좀 더 자주 상생의 세상에 들리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 21-02-19 지나다가
    감사합니다^^
  • 23-11-17 여원
    스스로 구원을 얻고자하는 노력이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형태로 변화되는 모습은 불교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불제자들이 여러 형태로 불교를 이해하지 못하여 왜곡한 일은 많으나, 말씀하신 것처럼 ‘스스로 구원을 얻고자하는 노력이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형태로 변화되는 모습은 불교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신 말씀은 과연 누구의 견해일까요?
    그런 형태가 나타났다면 불교가 아닌 것으로 제외되었고, 지금도 제외되고 있습니다.
  • 23-11-17 여원
    붓다는 초기불교에서 자신은 스스로 수행을 통해 깨친자로서 마음의 평안을 얻은 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붓다는 연기법을 발견하였습니다. 스스로 수행을 통해 깨친 자로서 마음을 평안을 얻을 자라고 말한 기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연기법이란 자아가 없다는 것을 깨치는 것인데, 어디에서 그런 자를 언급합니까?
  • 23-11-17 여원
    나아가 자신이 타인을 도울 수는 없으며 오직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이정표일 뿐이라고 언급한다.
    붓다는 초기불교에서 자신은 스스로 수행을 통해 깨친자로서 마음의 평안을 얻은 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붓다는 연기법을 발견하였습니다. 스스로 수행을 통해 깨친 자로서 마음을 평안을 얻을 자라고 말한 기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연기법이란 자아가 없다는 것을 깨치는 것인데, 어디에서 그런 자를 언급합니까?
    자등명 법등명
    이것은 붓다라는 자아가 중생이라는 타아를 도울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연기를 깨달으면 자아도 타아도 소멸하는데, 아니 애초에 자아라고 할 것도 타아라고 할 것도 없는데 누가 누굴 도울 수 있다는 것인지요? 그리고 붓다는 연기법에 의지하라고 했지 자신을 이정표를 삼아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 23-11-17 여원
    그러나 대승불교에 오면 붓다는 신으로 추앙되고 구원자의 상징으로 변한다.


    아비달마가 붓다의 법을 왜곡하고 변질시켜, 그 위기감에서 나온 게 용수보살의 <중론>이죠. 용수는 <중론>에서 아비달마의 오류를 파사현정으로 깨부수고, 그때부터 대승불교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아비달마처럼 붓다를 자아를 가진 인격자로 보지 않고 법신으로 보편화시킨 것이죠. 붓다의 불교를 다시 바로 잡은 것입니다.

    파사현정(破邪顯正)
    삿된 견해를 논파하여 올바름에 해당하는 中道 또는 空을 드러낸다는 불교용어.
  • 23-11-17 여원
    스스로 구원을 얻고자하는 노력이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형태로 변화되는 모습은 불교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붓다는 초기불교에서 자신은 스스로 수행을 통해 깨친자로서 마음의 평안을 얻은 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자신이 타인을 도울 수는 없으며 오직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이정표일 뿐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오면 붓다는 신으로 추앙되고 구원자의 상징으로 변한다.

    → 지나가다님
    이 짧은 하나의 문단에서 지나가다님은 무슨 근거로 이런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시나요?
    무섭기까지하네요.
  • 23-11-17 여원
    天上天下唯我獨尊

    후대에 붓다가 태어나자마자
    영아형태로 그런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런 후대의 과장이다.

    실제로
    天上天下唯我獨尊은
    부처님의 연기법을 말하는 것이다.
  • 23-11-17 여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

    天上天下唯我獨尊은
    연기법을 깨달으신 부처님을 말함.
    각 개인이 성불하자는 말이거나
    각 개인이 부처라는 말이 아님.

    개인적으로 붓다 또한 개체일 수 없다고 보았기에
    天上天下唯我獨尊을 연기법이라고 하였음.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빛나올사 거룩하신 석가모니불
    시방세계 무엇으로 견주어보리
    이 세간 모든 것을 다 보았지만
    부처님만한 어른 다시없어라.
  • 23-11-18 여원
    수행은 프레임을 벗고자하는 노력이기도하다.



    본 게 있나요?
    본 게 무엇인가요?
    실상(진리)을 제대로 보는 게 깨우치는 것입니다.
    즉, 어둠(무지,무명)에서
    빛(명, 깨달음)을 켜는 것이죠.

    수행은 그 빛(깨달음)으로 어두운 구석구석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속지 않는 것이죠.

    불교의 見은 ‘실상은 연기이다.’이고,
    불교의 수행은 ‘아상을 소멸시켜 가는 것’입니다.

    나가 소멸되어
    즉 애초에 나라는 것이 환상이며
    소멸될 것도 없다는 것이 저절로 되면
    죽을 ‘나’가 없으니 죽을 일도 없어지는 것이죠.

    최근 과학에서는 포유류가 일부러 합리적인 차원에서
    ‘죽음’을 선택적으로 진화시켰다고 하더군요.
    유전자의 측면에서 보면 그건 죽음이 아니라 즉 끝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정도의 차원이겠지요.
    우리가 죽지 않으려면 박테리아 수준으로 내려가면 된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진화단계면 굳이 죽음의 과정이 합리적이지 않으니까요.
  • 23-11-18 여원
    수행은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고단하고 좌절하기 쉽다.

    → 무엇을 봤는지?
    무엇을 수행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끝을 알 수 없고,
    고단하고,
    좌절하시는 것입니다.

    ‘연기’를 보는 것이 깨달음이고,
    ‘아상’을 없애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러면 죽을 ‘아’란 놈이 없으니
    생사를 해결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 23-11-18 여원
    수행은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고단하고 좌절하기 쉽다. 반면에 믿음은 비교적 다가가기 쉽다. 때때로 의심을 일으만 키지강화시킬 수록 확신을 주며 세상도 그렇게 변해간다. 이 둘의 접점은 없다.

    → 이 두 가지의 예를 든다고 해서 중도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환상과 환상 사이에서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신앙합니까?
  • 23-11-18 여원
    한쪽에서 다른 쪽을 바라보면 분명 상대는 틀린 것이다.

    →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다만 아무 말을 하면서
    그것이 깨달음이니
    그것이 실상이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혼자서 하는 것이야 위험할 것도 없지만
    공론의 장에서 하는 것은
    신도를 양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쪽에서 다른 쪽을 바라보면 분명 상대는 틀린 것이다.”
    수행하는 쪽과
    신앙하는 쪽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무엇을 수행하는 지?
    무엇을 신앙하는 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셔야
    틀린 것이든
    맞는 것이든
    되는 것입니다.

    둘 다
    실상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헛 수행을 하고,
    헛 신앙을 하기에
    둘 다 틀린 것이겠군요.
  • 23-11-18 여원
    결국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거기까지만이라도 서로 양보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다.

    → 수행이냐?
    신앙이냐?
    에서 무엇을 양보하라는 것인지요?

    항상 ‘그 무엇’이 빠져 있습니다.

    실상을 보는 것에 양보란 있을 수 없고,
    “양보할 수 있다는 것이 최선이다.”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 23-11-18 여원
    나는 그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도 성성히 깨어서 죽음을 평안히 맞이할 수 있음에 인간의 가치를 둔다.


    이렇게 하실 거면
    뭐하러
    불교수행을 합니까?
    (불교수행을 하신 적이 없다면 취소합니다.
    깨달으신 분이라고 해서 불교수행을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불교수행을 한 사람이라면
    ‘나는’이 아니라
    ‘무아’의 상태가 되어
    ‘그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도’가 아니라
    ‘연기법’에 의지하여
    ‘성성히 깨어서’가 아니라
    ‘만생만물에 편재'되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음에’가 아니라
    그냥 잠자듯이
    ‘인간의 가치를 둔다.’가 아니라
    그 순간에도 연기법에 의지하여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아상’을 소멸하고자
    할 것이다.
  • 23-11-18 여원
    존재자체가 인간의 목적이 실현되는 것이 듯,

    → ‘존재자체가 인간의 목적이 실현되는 것이 듯’이란 말씀은 아주 애매합니다.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안 되는 것도 같고.
    존재자체가 인간의 목적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라면 모를까?

    불교수행이든
    현대과학이든
    ‘존재’는 ‘환상이다.’라고
    정리하는 데
    ‘존재자체가 인간의 목적이 실현되는 것’이라면
    대체 무슨 실상을 보고자하는 것이며,
    어떤 수행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요.
  • 23-11-18 여원
    죽음 또한 목적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죽음
    을 ‘존재’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수행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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