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자 바라보기

삶의 목적8

21-01-31 지나다가 556
내 인생에서 크게 기뻤던 일을 상기한다면 그중의 하나는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을 때다. 가슴 벅찬 기쁨은 며칠을 계속되었다. 가장 원하던 소원을 이루었다는 것, 이제 할 일을 다 마쳤다는 것, 그것은 이제 거의 50년이 다 되가는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 음미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기억이다.그러나 그 기쁨은 3~4일 정도였던 것 같다. 이후에 난 갑자기 너무도 큰 공허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목적을 다 이루고 난 다음, 그리고 그 큰 기쁨이 가라앉은 다음 나에게 다가온 극심한 공허감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때 나에게 다가온 질문은 '나 자신의 목적은 무엇인가?'였다. 나는 왜 태어났는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이런 의문에 사로잡히면서 나는 그야말로 처절한 공허감에 매몰되었다.

이후 나는 종교에서, 철학에서, 교수, 선배, 친구 등 내 가시권의 모두에 의지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였다. 내 전공도 이보다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에 뒷전이었고 늘 기간이 임박해서야 숙제고, 해야만 할 일, 가끔 욕심이 나는 일들을 시간의 마지노 선에서야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언감생심, 이 답이 없다고 판단되는 문제를 포기하고 평범한 삶을 살다 나이 30을 넘어 만난 구절이 '자신을 바라보라. 거기에 진리가 있다.' 였다. 이후 열심히 자신을 바라본 몆년 후, 어느날 아침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이 존재의 근본적인 질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내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 그것은 이러했다.

'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야. 항상 여기에 있었어. 네가 태어난 목적, 그런 건 없어. 네 자신이 바로 목적이야. 앞으로 목적이 있다면 그건 네가 정하면 되는거야.'

이후 나는 내가 태어난 목적에 대해 다시 의문을 품은 적이 없다. 내 존재 자체가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주변을 보니 사실 모든 것은 존재 자체가 목적이었다.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목적이 분명하다. 만들어진 것은 형태가 그 목적이 된다. 의자는 앉을려고 만든 것이고, 집은 살려고 지은 것이고, 자동차는 탈려고 만든 것이다. 내가 나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목적이 무엇일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무엇인가 필요에 의해 도구를 만드는 제작적 사고가 자신의 존재에게 투영되어 나의 목적은 무엇인가 묻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무엇에 의해 생성된 존재인지 묻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멈추었을 때의 나의 순수 의식은 내가 누군가로부터 만들어진 존재로 다가오지 않았다. 내 부모가 나를 낳았지만 이것은 부모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태어나면서 나에게 깃들은 생명의 정신이다. 누가 만들었다는 제작적 사고를 멈추고 자연을 보면 생명이든 무생명이든 모든 만물은 스스로 존재 자체가 목적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된다. 길가의 돌덩이 하나 이름없는 들꽃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삶 자체가 목적이다.

내 존재가 이미 목적을 이룬 것이라고 생각할 때 삶은 생생한 현실로 다가온다. 음식을 먹을 때 나는 바로 나의 목적을 이루고 있는 것이며 그때 제대로 그 맛을 음미하며 즐기고 감사하는 마음이 된다. 누군가 만나고 있을 때 나는 이미 목적을 이루고 있는 것이며 그 사람은 소중한 인연으로 그 시간은 즐거운 혹은 교훈의 시간으로 또는 배움의 시간으로 다가온다. 내가 이루기로 정한 목적이 먼 훗날에 완성되는 것이라도 매 순간 나의 행위는 목적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과정 자체가 목적이 된다.

나의 정신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 꽃이 활짝 핀 완성품이다. 정신이 깨어난 순간 깊은 고요의 평안은 바로 모든 걸 이룬 순간이고 더 이상의 소원이 없이 완성된 순간이다. 이것은 텅 비어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고 또 채울 필요도 없다. 그 자체로 족하다. 존재 자체가 완성이다.

흔히 사람은 전지전능한 신을 설정하고 모든 자신을 신에게 헌신한다. 그리고 신에게 목적을 부여한다. 신은 인간에게 천국을 제공해야하고 죽은 후에도 영생을 보장해야 하며 그러기 전에 이 모든 것을 창조했어야 하고 그가 향후의 뚜렸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 없는 능력을 신에게 부여했을 뿐 신을 우리네 평범한 인간의 삶의 모습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완성된 존재에게, 완전한 존재에게 목적이 있을 수 없다.

사람은 전지 즉 모든 걸 알고 전능 즉 모든 능력을 갖추어야 완성되는 줄 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또 스스로 미완성된 존재라고 여기기에 불완전한 나로부터 즉 불완전한 내가 신을 상상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신은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데카르트는 불완전한 인간으로부터 완전한 신이 나올 수 없기에 신은 스스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참이 아니라 가정일 뿐이라는 걸 나는 한참 후에야 알았다.   

인간은 정신이 있기에 완전성을 상상할 수 있고 또 추구하는 존재이다. 내 안에 부족함 없는, 이미 목적을 이룬 완전한 속성이 있다는 걸 알면 지금 이 순간 바로 편안하고 감사하고 삶을 능동적으로 생생히 느끼며 즐길 수 있다. 동시에 완벽한 지식, 완벽한 능력의 소유에 관계없이 만족한 쉼, 진정한 휴식을 즐길 수 있다.

만약 완전한 신이 있다고 믿어진다면 나의 바깥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완전성이 있다면 안팍이 없이 존재할 것인 즉 내 안을 외면하고 밖만 본다면 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있겠는가?
  • 21-02-03 모모
    솔직히..글을 읽다가 든 생각은..
    "반했습니다.^^"
    가끔이라도  이야기좀 남겨두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너무..좋네요.^^
  • 21-02-03 원정
    "나에게는 삶 자체가 목적이다"
    100% 공감합니다.^^
  • 21-02-07 지나다가
    모모님께 과분한 칭찬을 들으니 무척 송구합니다^^
    감사합니다~
  • 21-02-08 원정
    아마도 지나다가님처럼 덤덤하면서도 깊이 있는 글(체험과 이론을 함께 녹여낸 글)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지나다가님, 모모님.... 시절인연에 감사합니다.^^
  • 23-11-21 여원
    인간은 정신이 있기에 완전성을 상상할 수 있고 또 추구하는 존재이다.

    → 정신과 육체가 있다는 이원론은 데카르트 이후 철학에서는 잘 쓰지 않습니다.

    성불이라는 패러다임

    ‘성불’이라고 하면 마치 정신을 가진 존재가 최상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여겨 다들 “성불하세요.”하면서 인사를 건넨다.
    이 또한 수정되어야 한다. 주관인 ‘나’가 있고, 이루어야 할 목적이 되는 객관, 성불이 있다면 데카르트의 이원론의 차원에 머무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말만 다를 뿐이다.
    부처를 이룰 ‘나’라는 주관는 없다.
    부처가 완성되는 '성불'이라는 객관도 없다.

    이때 우리의 자세는 '중도'다.
    ‘나’를 보면서 바로 그게 ‘연기’라는 것을 동시에 아는 것이 ‘중도’다.
    우리의 최종목적이 있다라면
    '중도'를 아는 것이다.
    '나'라는 개체를 보면서 즉시로 그게 '연기'라는 것을 아는 것!!!
    연기때문에 나를 부정하지도 않고,
    나때문에 연기를 부정하지도 않고.
    나를 보면 연기(업보)를 보고,
    연기(업보)를 보면 나를 보고.
  • 23-11-21 여원
    존재 자체가 완성이다.

    → 존재 자체가 완성이 되려면
    이 우주만물이 ‘연기되어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신이 깨어났는데,
    그 곳에 삶이 있고, 죽음이 있고, 나가 있고, 너가 있다면
    꿈을 꾸고 있는 것이죠.
  • 23-11-22 여원
    생각이 멈추었을 때의 나의 순수 의식은 내가 누군가로부터 만들어진 존재로 다가오지 않았다. 내 부모가 나를 낳았지만 이것은 부모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태어나면서 나에게 깃들은 생명의 정신이다. 누가 만들었다는 제작적 사고를 멈추고 자연을 보면 생명이든 무생명이든 모든 만물은 스스로 존재 자체가 목적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된다. 길가의 돌덩이 하나 이름없는 들꽃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생각이 멈추었을 때의 나의 순수 의식은 내가 누군가로부터 만들어진 존재로 다가오지 않았다.

    → 생각이 멈추었을 때, 나의 순수의식이란 존재가 다가온다는 생각은 마치 자이나교의 업이 소멸한 상태에서 지와가 드러난다는 것과 흡사하다.
    자이나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철저한 계율을 지키고, 고통을 통해 업을 소멸시켜 참된 영혼인 ‘지와’를 드러낸다고 하였다.
    어떤가?
    정말 쌍둥이생각처럼 똑같이 느껴지지 않은가?

    생각

    순수의식
    존재
    무생명
    들꽃
    등등
    이것들을 하나의 완벽한 존재를 지닌 개념으로 인식하는 것은
    산자나띠
    라고 한다.
    어떤 대상을 ‘개념’을 가지고 인식하는 ‘산자나띠’는 실상을 깨닫지 못한 중생들의 인식체계이다.
    반면
    여래의 연기적 인식체계는 ‘아비자나띠’라고 한다.

    예를 들어
    순수의식이 있어 생각이 멈추는 그 자리에 드러난다고 하면
    ‘산자나띠’이고,
    생각이 멈추는 그 자리에 드러나는 것이 ‘순수의식’이라고 하면
    ‘아비자나띠’이다.
    한 가지 더 예를 들어보면
    불이 있어 타고 있다라고 하면 ‘산자나띠’이고,
    타고 있는 것은 ‘불’이라고 하면 ‘아비자나띠’.....
    (순수의식과 불이 셀프인가? 아닌가?
    순수의식과 불이 환인가? 아닌가?)

    '산자나띠'를 하려면
    자이나교를 하든지
    아니면
    요가를 하든지
    공, 연기, 중도, 참나...라는 불교의 핵심을 들먹이면서
    ‘산자나띠’하는 것은 또 무슨 조화인가?

    순수의식이 있어 생각이 멈추면 드러난다는 것은
    업이 소멸하면 ‘지와’가 드러난다는 자이나교와 판박이로 똑같다.

    불교를 하겠다면
    '산자나띠'하지 말고,
    '아비자나띠'하라!!!

    ★이러한 산자나띠와 아비자나띠는 대승에 와서 속제와 진제로 계승되어 왔고, 결국 같은 세상에 대한 인식의 다른 두 양상이다.
  • 23-11-23 원정
    여원님
    그래요.
    여원님의 법이 더 정교하다고 인정할게요.
    그런데 말이지요.
    자이나교는 이 것(공, 참나, 순수의식, 텅빈충만, 깨달음, 연기, 알아차림, 생명, 불성....)을 모른다고 생각하세요?
    기독교는 모른다고 생각하세요?
    이것은 생각만 쉬어지면 드러나는 자리이기에 종교가 문제가 되지 않고, 문화가 문제가 되지 않고.... 어느 누구라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요.
    여원님도 이미 사용하고 있어요.
    여원님은 ‘정법’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시나 봐요.
    모두가 방편이에요.
    그래서 석가모니도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말했어요.
    이것(순수의식, 공, 불성, 참나...)은 불교도만의 것도 아니요, 기독교도만의 것도 아니요, 자이나교도만의 것도 아니에요. 무교도도 함께 모두가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이에요.

    정법이라는 것이 없어요.
    금강경 보세요.
    ① 無有定法(정해진 법이 없음)
    ②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所說法 不. 須菩提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법을 설한 적이 있었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 여래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모두 방편으로 말하는 거에요.
    ‘유아’라고 집착하는 사람들이게 ‘무아’라고 말하고, ‘무아’라고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유아’라고 말하는 거에요.
    불교라는 것도 없어요.
    금강경 보세요.
    ① 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수보리여 이른바 불법이라는 것도 곧 불법이 아니다)
    ②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어찌 된 까닭인가 수보리여. 부처가 말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며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강을 건너면 뗏목은 버리라는 말도 있잖아요.
    여원님은 내 뗏목이 네 뗏목보다 더 정교하다고 말하고 있는 꼴이에요.
    어짜피 버릴 뗏목인데...
    여원님은 “'산자나띠'하지 말고, '아비자나띠'하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산자나띠 하고 말할 때 드러나는 것이 이것(순수의식, 공)이요, 아비자나띠 라고 말할 때 이것이 드러나는 이치를 모르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사과 그림 그만 그리시고, 그냥 사과 맛을 한 번 보세요.
    빨리 강을 건너시고 뗏목은 버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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