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자 바라보기

공간6

21-01-24 지나다가 467
"당신만 남아 계실 이 세상 것들은다만 지나가는 삶일 뿐이옵니다."

어느 지인이 보내준 글 속의 내용이다. 내가 아는 한은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얘기이다.

여기서 '당신'이 누구인가는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 우선 가장 일반적으로 다가오는 2가지 중 하나는 '당신'이 전지전능한 신인 경우이다. 세상 만물은 변한다.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은 없다. 만물의 창조주인 신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이다. 더 나아가면 '당신'은 세상을 주재한다. 만물은 물론 모든 사람의 생각까지도 주도한다. 우리가 불완전하고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당신'이 의도하는 바를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모든 것을 '당신'께 맡기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해방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또 하나는 소위 진리로서의 '당신'이다. 진아, 참나, 참마음, 반야, 불성, 공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린다. 이는 인간이 각고의 수련 끝에 도달할 수 있는 체험의 경지로 역시 종래에는 해방과 자유를 누린다.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추구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리 전개된다. 최근에는 간극이 너무나도 먼 이 둘의 접점을 찾고자 하는 노력들이 보이나 어느 한쪽이 크게 포기하지 않고서는 화합은 어려워보인다.

나는 이 '당신'을 텅빈 공간으로 인식한다. 만물은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공간 자체는 변할 수 없고 영원하다. 공간을 흔히 무(無)와 혼동하는 수가 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절대무(絶對無)를 상상한다. 그러나 절대무는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무(無)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식탁 위에 있는 컵을 다른 곳으로 옮겼을 때 식탁 위에는 더 이상 컵이 없다는 의미로 사용할 때이다.

공간이 절대무일 수 없는 것은 공간도 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공(時空)이라고 할 때 시간과 공간은 서로 얽혀있다. 시간이 있으므로 변화가 있는 것이며 변하는 만물은 공간이 있어야 존재한다. 공간이 없으면 만물이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시간도 있을 수 없으며, 시간이 없으면 공간은 무너져버린다. 무언가가 변화할 때만이 공간은 유지된다. 시공은 유기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유(有)이며 따라서 공간은 유이다. 만물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공간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에게 인식된다. 공간 자체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텅빈 정적으로 느껴진다.

우주가 공간과 물질로 이루어져 있듯이 나는 마음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 내게 마음은 공간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의 마음은 온갖 정서가 지나가고 나면 언제나 변함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텅빈 공간과 같은 근본 마음을 의미한다. 순수 의식이라고도 한다. 생각이 멈춘 상태에서 오로지 의식만 빛나고 있는 상태, 이를 소위 깨어있다고도 한다. 편의상 그 근본 마음을 공간이라고 부르자.

나에게 공간은 내 편안한 집이자 고향이다. 내가 태어난 곳이자 죽으면 돌아가는 곳이다. 공간은 사실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사실 나는 눈 뜨면 태어나고 눈 감으면 죽음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그렇게 영원하다.

나에게 공간은 변치않는 진리이다. 공간은 내가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를 찾다 마침내 도달한 지점이다. 찾고보니 그것은 한 순간도 변함없고 또 한 순간도 나와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만물은 지나가는 것이지만 이것만은 항상 그자리다.

나에게 공간은 깊은 평안이다. 모든 희로애락은 지나간다. 오욕칠정이 지나간 자리에 공간은 항상 정적 침묵과 함께 깊은 평안으로 느껴진다. 그 평안은 객이 아니고 바로 주인이다.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이다.

나에게 공간은 세상 그림을 그릴 백지이다. 공간은 나에게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 나에게 어떤 해답도 주지 않는다. 공간은 다만 질서를 부여할 뿐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된다. 공간은 시간과 연계돼 있어 내가 그린 그림을 지울 수는 없지만 항상 새로운 백지로 열려있다.

공간은 내 근본 정신(精神)이다. 우주가 빈 공간과 물질로 이루어져 있듯 나는 물질인 몸과 비물질인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신은 곧 마음이다. 내가 인식하는 유일한 신(神)이다. 신은 정의에 따라 수없이 다르다. 전지전능한 신, 우주 정신, 지구 정신, 만물에 깃들은 신, 인간의 정신 등 사실 여부를 떠나 인류가 거론하는 신은 천차만별이다. 이중 내가 확실하고 분명하게 아는 신은 내 정신이다. 이 정신은 텅 비어있어서 상처날 수 없고 무엇으로부터도 오염될 수 없다. 안팎이 없어 내 안에서부터 우주로까지 확장된다. 그곳에서는 우주도 만물도 너와 나도 모두 하나이다.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니 자체로 완전하다.
  • 21-01-25 원정
    "나에게 공간은 세상 그림을 그릴 백지이다. 공간은 나에게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 나에게 어떤 해답도 주지 않는다. 공간은 다만 질서를 부여할 뿐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된다. 공간은 시간과 연계돼 있어 내가 그린 그림을 지울 수는 없지만 항상 새로운 백지로 열려있다."
    너무나 멋진 표현입니다.

    저는 몸과 정신의 관계가 마치 뫼비우스 띠 같은 느낌입니다.
    인간의 정신은 신경계를 구성하는 최소단위인 뉴런들의 상호작용인데, 이 때의 상호작용은 전기적신호와 화학적신호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물심리학을 기초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 이야기이겠지만, 인공지능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21-01-31 지나다가
    인공지능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자신에게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자의식이 나타날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 주로 공과 계통의 사람들 중에 그런 예가 있더군요 물질의 진화과정에서 인간이 출현했고 자의식이 나타났듯 AI도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죠. 철학 쪽에서는 불가능한 일로 결론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생물의 진화과정과 AI는 전혀 다른 매커니즘을 통해 전개된다는 것이죠.

    유물론과 유심론이 있습니다만 베르그송은 처음부터 정신과 물질을 동시에 출발선 상에 놓습니다. 유심유물론이라고 해야겠지요. 이중 정신은 상승 원리를 갖고 물질은 하강 원리를 갖는다고 보았습니다. 물질은 무엇이든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 파괴되는 쪽으로 진행하나 정신은 상승 원리를 갖고 고차원으로 진행한다고 보았죠. 그리고 이 모든 진행의 정점에 인간의 정신을 두었습니다.

    AI가 어디까지 진행될지 모르나 사람이 판단하기에 같이 생활하면서도 그 AI가 자의식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파악이 안 될 정도까지 전개된다면 어떤 세상이 될까 궁금해집니다~
  • 21-02-03 원정
    대부분 마음에 대하여 깊은 일가견이 있는 분들은 지나다가님의 말씀과 같더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면이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저는 정신과 물질을 분리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여요.
    마치 초가 물질이라면 초 위에 타오르는 불꽃이 정신 같아요.
    물질과 정신의 관계가 초와 타오르는 불꽃 관계 같아 보여요.
    저의 생각은 일원론에 치우친 것 같아요.
    정신과 물질 모두 전기적 신호와 화학적 신호의 결과물로 보여요.

    뇌우주탐험-본다는 것은 뇌 해석의 결과-경험이 '쌓여' 마음이 되다.
  • 21-02-03 원정
    조금은 다른 관점인데....
    저는 참나(주시자 또는 주시자를 인식하는 자)도 연기법에 따라 인연지어진 존재로서
    결국 空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도, 하느님도, 참나도, 그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결국은 공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공한 존재가 인연대로  존재하다 사라지는 것 같아요.
  • 21-02-04 모모
    전 공간을 마음의 집이고..고향이고..
    이렇게 표현해 말씀하신 것들이 참 와 닿네요.
    제가 평상시 뭐지? 했던 것들이 확..정돈 되면서 아..그렇구나..^^
    의문이 해소되는걸 느낍니다.^^
    감사드립니다.^^
  • 21-02-15 원정
    저의 관점 중 하나는 '에너지 일원론'입니다.
    저는 정신도 에너지라고 봅니다.
    유물론적 관점이지요.
    그리고 모든 에너지는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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