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만화책에 나오는 스토리가 나를 몹시 동감하게 했던 기억이 있다. 등장인물이 10을 3으로 나누면 나머지 1이 나오는데, 1을 계속 나누어도 끝없이 또 1이 나오는 것이다. 주인공은 종이를 더 가져와 계속 나누다가 마침내 미쳐버린다. 나도 그것을 보고 참 답답하였다. 왜 계속 나누어도 똑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같은 경우로 0.9999... 또한 마찬가지 였다. 끝없이 1과 가까워지지만 결국 1과 만나지는 못한다. 왜 안타깝게 1과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
대학시절 성경을 보면서 비슷한 의문을 품게 된 경우가 인간의 조상에 관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계속되어야지 왜 갑자기 신이 툭 튀어 나올까?
전자는 완결되지 않고 계속되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었고, 후자는 계속 진행되지 않고 갑자기 단절되는 것에 관한 의문이었다.
자연을 관찰해 온 인간은 모든 사건에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원인이 밝혀져야 그리고 결과가 확인되어야 마음이 시원해지는 정서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를 다시 위의 의문들에 적용하면 전자는 결과가 완결되지 않은 것 같아서, 후자는 원인이 확인 되지 않은 데서 오는 답답함이다.
창조는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드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제작한다는 것이다. 제작에는 재료와 제작자가 전제된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의 질서 위에서 제작 즉 창조는 이루어진다. 여기서 제작자는 인간이다. 이 제작적 관점은 인간이 도구를 만들면서 가지게 된 관점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완전한 의미의 새로움이 아니라 실제로는 이미 있는 재료를 변형해 새로운 것을 제작하는 것이다. 생명의 경우 새 생명체가 탄생하는 경우는 재료의 변형이 아니므로 진정한 의미의 창조라고 할 수 있을텐데 이 경우에도 완전한 무에서의 창조가 아니라 앞의 생명체와 연속선 상에 있어 인과로 연결돼 있다.
헤브라이즘에서는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인데 이 경우의 창조는 생명체의 탄생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 제작적 의미로, 세상 만물을 신이 만들어냈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간의 제작적 사고가 자연에 투영된 것이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인과의 연속성이 없이 즉 원인없이 세상을 만듦으로써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비약이 있다. 무에서는 유가 나올 수 없다. 이는 철학적 명제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실제적 제작이 아니라 가상 속의 제작, 즉 상상된 제작일 수밖에 없다. 이는 인간이 무언가를 표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면 쉽게 납득이 갈 것이다. 인간은 상상으로 삼각형도 그리고 사각형도 그릴 수 있듯이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도 상상으로 무한히 만들 수 있다. 원인 없이 만들어지고 결과없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제작에는 재료와 제작자가 필요하듯이 상상으로 만들어진 세계에서도 제작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인간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본성은 그 상상의 제작자에게 전지전능한 능력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자연의 질서를 초월해 어떤 것이라도 가능한 무소불위의 능력을 지닌 존재로 표상된 것이 헤브라이즘의 인격신이다.
그런데 왜 사람은 이런 불합리한 존재에 매료되는 것일까? 그리고 지구상 곳곳에 창조설이 존재하는 것일까? 오늘날 이 신화적인 창조설을 실제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창조설이 여전히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심리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 나는 10을 3으로 나눌 때 똑 떨어지지 않는 데에 대한 답답함을 거론한 바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를 계속해서 거슬러 올랐을 때 최초의 원인이 끊긴 것에 대해 의심하였다. 우리의 이성적 사고와 정서적 사고는 때로는 정반대에 위치할 수도 있다. 위의 예들이 대표적 사례들이다. 즉 이성적으로는 0.9999...로 끝없이 진행되어도 1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아버지가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야한다는 걸 안다. 그러나 정서적으로는 1과 만나야 후련하다. 또 최초의 원인이 밝혀져야 후련하다. 여기서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는 최초의 원인자가 상상이라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정서에는 만족감을 준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이 또한 살아있어서 그 최초의 원인자는 어디서 왔는가하고 다시 묻게된다. 그래서 우리는 신이 스스로 존재한다고 해도 그 신에 대해 어디서 온 존재인가 또다시 묻게되는 것이다.
우주 과학자 칼 세이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양과 동양의 일부 문화권에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에 대한 설이 있는데 우리는 솔직히 물어야 한다. 그 신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이점에 있어서 보다 이성적인 전통적 사고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천부경과 주역의 사상이다.
천부경과 주역에는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一始無始一 ••• 一終無終一
終卽有始
일시무시일과 일종무종일은 천부경 81글자의 첫구절과 마지막 구절이다. 여러 해석이 있으나 그 의미는 서로 상통한다. 즉 하나로 시작하나 그 하나는 시작이 없는 하나이며, 하나로 마치나 그 하나는 마침이 없는 하나라는 의미이다. 곧 우주의 시작과 끝은 없다는, 시작과 끝이 무한 계속된다고 본 것이다.
종즉유시는 주역의 마지막 괘에 대한 설명에서 나온다. 우주의 순환이 모두 끝난 마지막 괘에서 '끝은 곧 시작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똑 떨어지는 최초의 시작과 마지막 끝은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지금 여기가 바로 시작이고 동시에 끝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시작과 끝이 무한 반복돼야한다는 우리의 이성적 사고와 일치한다. 빅뱅을 말하는 물리학자들도 이제는 빅뱅이 시작점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빅뱅 전은 우리의 사고로 아직은 접근할 수 없는 지점일 뿐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시작점을 지닌 창조주가 아니라 시작과 끝이 없는 우주, 이 세상, 곧 자연이다. 그리고 자연은 질서 속에서 변화할 뿐이다. 그래서 自然이다.
신을 믿고 그 신이 전지전능하다고 믿는 것은 자유이다. 그래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축복된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아무도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진실로 믿는대로 변한다. 그러나 인간의 수준으로 신을 감히 재단하지 말라거나, 전지전능한 존재이니 질서를 초월해 어떤 것도 가능하다거나,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규범과 도덕을 초월해 신을 앞세우는 것은 실제의 세상을 무척이나 왜곡되게 만든다.
태극무늬도 보면..주역을 바탕으로 되어 있어.. 시작과 끝이 따로 없이 영원히 지속되는 모양새지요.
음과 양이 서로 교차되며
아래에 있을 음이 위로..
위에 있을 양이 아래로 모양이 만들어지면 생명이 크게 활성화 되고.(지천태).
그 반대면.. 죽음이 활성화 되는 구조..(천지부)
그건 음과 양의 변화에 따라 영원히 지속 되겠지요.^^
그렇게 우리가 말하는 사계절의 모양새가 보이는 거든..보이지 않는 거든..계속 생겨나는 거겠지요.
다만.. 그 규칙을 알고..습관화 시켜 버리면.. 어느정도 예측 가능하니..
충격이나.. 답답함은 좀 줄어들지만.
대신.. 호기심이나 경외로움..감탄..같은것도 일상화 되어 같이 줄어드는게..문제.
그 둘을 다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전 명상에서 찾고 있지요.^^
사랑의 아이콘인 예수의 이름으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들이 주 예수를 (주)예수(주식회사 예수)로 만드는 사람들이지요.
지금도 '사랑' 대신에 코로나19를 끊임 없이 퍼뜨리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