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신을 바라보기를 오랫동안 해온 끝에 마음이 평안하게 됐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 지 잘 모른다.
뭐 그저 조금 편안해졌나 싶을 것이다.
내 가까운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은 그보다 하나님의 더 큰 평안을 찾으라고 한다. 마음 공부로 수행 꽤나 했다는 사람들도 거기서 안주하지 말고 더 나아가라고 한다. 이들의 생각은 완전하다고 믿는 신에 의해서만 진정한 평안이 가능하다는 것이거나, 수행은 끝이 없는 고로 현재에 안주하지 말라는 뜻일 테니 이해는 된다.
"자신을 바라보라. 거기에 진리가 있다"는 구절은 깊은 체험으로만이 그 경지가 이해될 수 있는 말이다.
그냥 습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의식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상태이다. 남의 눈의 티끌은 잘보여도 자기눈의 대들보는 못보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의식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의식은 주로 바깥으로 향해있다. 살아가려면 바깥 세상의 움직임을 잘 살펴야 한다. 이때의 의식은 바깥쪽 한 방향으로만 향해있다. 자신을 바라보게 되면 의식은 양방향으로 열리게 된다. 즉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와 다른 사람의 행위가 동시에 파악된다. 이 둘은 분명히 다른 차원의 의식이다. 후자를 자의식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듯이 자신을 보는 즉 객체와 주체를 통합적으로 보는 의식으로 이는 인간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고차원의 의식인 이 자의식은 아주 드믈게 일어난다. 아주 드믄드믄 드러나지만 그것 자체도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의 의식은 자동으로 거의 바깥쪽으로만 향해있도록 습관돼 있다.
이 자의식을 강화시키는 훈련이 바로 자신을 판단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훈련이 농축돼 어떤 임계점을 넘으면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우리의 정서상태가 바꿘다는 것이 내 체험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차원이라든가 더 완전한 평안이라는 생각은 무언가 지금의 상태보다 더 나은 상태가 있다는 비교의 개념을 바탕에 두고 있다. 그리고 최고의 차원에서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일거에 해결되고 모든 것이 완전히 갖추어진 그 어떤 상태일 것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나아가 그 상태에 인간이 스스로 도달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일 뿐, 오직 신만이 알고 있고 신만이 그 상태에 존재한다는 믿음이 거론된다.
나는 우리가 자신의 내면을 향한 판단없는 바라보기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평안의 상태는 무차원이라고 말하고 싶다.
현재가 스스로 아직 최고의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언가 그 너머의 상태에 대해 미지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거나, 무지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직은 덜 완전한 상태에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깊은 평안은 이런 것들을 초월한 상태이고 차원 너머의 상태이다.
깊은 평안은 말하자면 지극히 행복한 상태이다. 저 너머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또 무언가 내가 아직은 모르고 있다는 판단이 선다면, 그것은 아직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며 아직은 무언가 더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높은 차원의 앎과 행복을 향한 수행의 끈을 놓을 수 없고, 완전하다는 신을 찾을 수밖에 없다. 허나 지극한 행복은 만족의 상태이어서 더 이상 찾을 아무것도 없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한 바로 찰라의 연속이고 곧 영원이다. 또 판단없이 바라보는 상태이기에 차원도 초월해 있다. 차원은 판단에서 나온다. 우리는 우주의 모든 것을 알아야한다고 생각할 때 분별하고 나누고 구분하고 차원을 나눈다. 지극한 행복은 불랙홀처럼 그런 차원을 초월해있기에 자체로 완전하다.
깊은 평안은 바로 행복이자 우리의 종착지며 목적이고 완전성을 띠고있는 신성의 상태이다. 천국을 무언가에 의지해 저 멀리 미래에서 찾지 말고, 충만과 감사로 가득한 영원한 천국을 이 순간 여기에서 누리라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담담한 글에....
이렇게 좋을 수가 없네요.^^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