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르네상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왜 르네상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주체 세력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을까? 르네상스가 성공하려면 그것부터 알아야 한다.
312년 콘스탄티누스1세는 로마제국의 패권을 놓고 막센티우스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콘스탄티누스1세는 테베레 강 밀비오 다리에서 적과 대치한 가운데, 그동안 이단으로 간주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승리한 다음,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법적으로 공인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 그 후, 황제 테오도시우스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다(AD380). 이로써 300년간의 혹독한 박해를 받았던 기독교는 광범위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5세기 로마제국이 몰락하고, 14세기 후반까지를 역사가들은 ‘야만시대’라고 한다. 왕과 군주들이 인간성 말살을 자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기간 동안에 가톨릭교회는 무엇을 했을까?
가톨릭 연대표를 세기별로 살펴보면, 교황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6세기(13명), 7세기(20명), 8세기(12명), 9세기(21명), 10세기(22명), 11세기(21명), 12세기(16명), 13세기(17명), 14세기(10명), 도합 152명의 교황이 중세 유럽을 지배했다. 그러기 때문에 가톨릭교회를 빼고, 왕과 군주들이 인간성 말살을 자행했다는 주장은 어폐가 있다.
조토(1266?~1337)는 피렌체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 베스피냐노라의 가난한 농부 아들로 태어났다. 어느 날, 조토가 양을 돌보면서 평평한 바위에 어린 양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아이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조토의 아버지를 찾아가서 아들을 화가로 만들라고 설득했다.
그림을 배운 조토는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벽화를 그렸다. 그 당시 화가들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유다의 배반>, <최후의 만찬>, <겟세마네의 기도>, <그리스도 체포>, <빌라도의 심문>과 같은 성경에 들어 있는 기사를 그림이나 조각으로 형상화 했다. 가톨릭교회는 무턱대고 성경을 번역하거나 유포하지 않았다. 그림이나 조각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러기 때문에 창조적 재능이 튀어난 화가와 조각가들은 성경을 필사 하는 기능공에 지나지 않았다. 책을 발행하면 되는 일을 가지고, 굳이 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다. 여기에는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
성경에는 오해의 소지가 너무너무 많다. 그래서 성경을 보지 못하게 했다. 화가들에게도 까다로운 조항을 붙여가면서 주문했다. 그런데도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기 전날, 열두 제자와 함께 만찬을 나누었다는 마태복음(26:20)과 마가복음(14:17) 그리고 누가복음(22:14) 기사를 전무후무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성당 수도원 식당 벽화의 ‘최후의 만찬’은 다른 화가들처럼 신성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산만하고, 사람들이 논쟁을 하면서 격렬한 감정 속에서 동요하고 있다는 느낌이 잘 드러난 그림이다. 그림 속 예수의 뒤에는 신성을 상징하는 원반 모양의 후광이 없다. 사람들 표정도 예사롭지 않다. 수상쩍은 부분이 여기저기 들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가톨릭의 기준에는 맞지 않는 그림을 그렸다.
'이해 불가능한 명제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조롱'이라고 토머스 제퍼슨이 말했다. 다빈치는 가톨릭을 조롱했다. 그런데도 현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천재성이 너무나도 잘 드러나 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눈감아주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다빈치와 동일한 시기에 살았던 마틴 루터(1483~1546)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신약성경을 책으로 발행했다. 루터는 가톨릭 수도원 사제였다.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그런 사람이, 어찌하여 의문투성이 성경을 무턱대고 책으로 발행했는지 나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마틴 루터는 1519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에라스무스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책을 발행하고는 루터교회를 창설했다. 신약성경 번역으로 교회에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성경을 아무나 볼 수 있게 되면서, 수많은 교파가 생겨날 가능성이 열렸다. 이를 사전에 차단할 요량으로 1541년 4월22일, ‘예수회’가 만들어졌다.
‘예수회’의 첫 번째 목표는, 종교개혁으로 실추된 교황의 절대 권력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두 번째는 해양 개척으로 발견된 신대륙에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세 번째 목표는 학문을 발달시킴으로써 교파가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
‘드니 디드로’(1713∼1784)는 프랑스 동부 랑그르의 부르주아에서 태어났다. 칼 제조업자였던 부친은 성직자가 되라고 했다. 디드로는 파리의 ‘예수회’ 소속 학교를 졸업하고, 파리대학교에서 법률과 철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1749년 『맹인에 관한 서한』책을 출간했다. 디드로는 맹인의 심리와 반응을 연구하고, 진리는 객관적인 것이며 우리의 경험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라면서 무신론적이고 유물론적 글을 발표했다. ‘예수회’쪽에서 보면, 디드로는 배신자였다.
『맹인에 관한 서한』이 발행되기 무섭게, 디드로는 ‘예수회’의 고발로 102일간 파리 근교의 벵센느 감옥에 투옥 되었다. 이때부터 디드로와 ‘예수회’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디드로는 『맹인에 관한 서한』에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허물어버렸다. 인식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우리의 뇌리에 반영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사람과 맹인이 동일하게 사물을 인식한다면서 진리는 객관적인 것이고, 진리인지 아닌지는 경험에 의해 확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가톨릭을 향한 도전이었다. 그의 도전 정신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던 디드로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양면 작전으로 나왔다.
벵센느 감옥에 있을 때 유물론적 인식론이 완성되었다. 『맹인에 관한 서한』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극단적인 작품을 계속해서 썼다. 수도원의 해악을 폭로한 『수녀』, 모순을 파헤치고 허위로 가득 찬 세계를 다룬 『운명론자 자크』, 철학자의 권위적 논의가 무뢰한의 어설픈 얘기에 역전되는 『라모의 조카』등을 썼다. 하지만 디드로는 제2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살아생전에는 위험천만한 작품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자기가 죽은 다음 출간하도록 숨겨 놓았다.
디드로가 벵센느 감옥에 투옥되기 전이었던 1745년, 한 출판업자로부터 영국의 체임버스가 발행한 『백과사전』의 프랑스어 번역을 의뢰받았다. 처음에는 달랑베르(1717~1783)와 함께 번역만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벵센느 감옥에 있으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디드로는 새롭게 편집하는 『백과전서』에, 가톨릭교회 비판을 비롯하여 중세적 편견 타파, 전제정치 비판 등 불합리한 권위에 도전하는 내용을 담기로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백과전서』는 훗날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디드로는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20여 년에 걸쳐 편집된 『백과전서』에는 당시 계몽 사상가들이 총동원 되었다. 본문 17권, 도판 11권에 달하는 책이 완성되기까지 ‘예수회’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철학적 입장을 위태롭게 한다면서 출판을 방해 했다. 그러나 디드로는 내용을 먼저 공개하면서 보충하는 방법을 썼기 때문에 구독자가 4천명으로 늘어났다. 『백과전서』가 유물론을 주장하고, 종교를 파괴하고, 자유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론을 의식한 프랑스 검찰은 디드로를 구속하지 못했다.
하지만 달랑베르는 백과전서 관련 업무를 1판이 나온 후 포기했다. 튀르고를 비롯하여 몇몇 인사들도 악평을 받고 있던 『백과전서』에 기고를 거부했다. 그래서 디드로는 혼자서 수백 편의 글을 썼다. 짧은 글도 있었지만 꽤나 긴 글들도 있었다. 게다가 기고자들의 원고를 고증해야 하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했다. 그 작업을 하면서 시력에 손상을 입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권력의 비위를 건드릴까 두려운 나머지 출판업자는 위험성 있는 텍스트는 제거하면서 출판했다. 이 때문에 20여 년의 기념비적 작업은 돌이킬 수 없도록 손상이 되었다.
디드로는 1784년 7월 31일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었지만 르네상스로 촉발된 도전 정신은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은 씨앗처럼 태생적으로 창조 정신을 갖는다. 그러기 때문에 중세 이후에도 르네상스는 우후죽순 생겨나는 자연현상이었다. 씨앗이 어디에 떨어졌느냐에 따라, 발아의 상태가 달라질 뿐이었다.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떨어진 자요. 돌밭에 떨어졌다 함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떨어졌다 함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을 맺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떨어졌다 함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혹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결실을 맺는다 하시더라.” (마태복음13;18~22)
디드로가 생애를 걸고 편집한 『백과전서』원본은 박물관에 소장될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인터넷 세상이 열리면서, 『백과전서』는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이처럼 명약관화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여행을 통해서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사양하지 않고 또 가겠습니다.